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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오늘은 와 우리 집에서 밥 묵자 카노?- -종가 식구들이 전부 따로따로 묵심니더. 오늘은 캐서 우리꺼정 무울라고 여따 채렸심더- 광수에미는 우악스럽게 밥숟가락을 입으로 넣은 후 김치 한 자락을 손으로 쭉 찢어 불룩한 입으로 더 욱여넣는다. 태광은 그런 마누라의 모양을 보며 아직 첫 숟가락도 뜨지 않은 채 마른 입맛만 다신다.
광수에미는 저녁에 종가에 밥상만 네 개를 차려서 들이밀었다. 하나는 태섭이 방에 또 하나는 안방에 그리고 세 번째로 소향이방에 밥상을 갖다 주고 장서방은 그냥 정기에서 먹도록 마련해주었다. 시아주버니 태섭은 태섭이대로 영 천근같은 납덩이를 얻고 있는 행색이고 안방 형님도 얇게 얼어붙은 얼음조각처럼 얼굴이 까칠한 표정이고 소향도 고개를 들 줄 모르고 입은 입대로 더 붙어버려 억지로 말을 시키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덜렁거리는 광수에미지만 그 정도의 눈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없어졌다는 것도 서방한테 들어서 안다. 한수가 태어난 지 삼칠일이 다 됐으니 떠날 일로 마음이 무거운 소향의 사정도 안다. 물론 안방 차지하고 있는 형님도 잔치 벌릴 마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같이 밥을 먹을 때 밥상 앞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밥 씹는 소리만 서걱거리며 목구멍으로 삼키자니 밥알이 위장에서 살아 튀어나올 것 같이 불편하고 어색했던 광수에미는 아예 밥만 챙겨 집으로 와서 식구들과 먹는다. 속이 후련하다. 퍼질러 앉을 수 있어 편하고 우저적대며 먹을 수도 있고 눈치 볼 일도 없고 할 말도 맘대로 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소향이 낼 갑니더-
-행님 집에 가모 술 있겠제?-
날짜를 달력에 표기해놓지 않은 소향이일지라도 이미 지난 며칠 동안 큰아지매로부터 들은 말이나 또 작은아지매의 동정 서린 말로 가는 날이 내일로 못 박힌 것은 알고 있다. 소향은 거절도 부정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소향도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모두에게 알린 것이다. 한수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 그저 한없이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울뿐이었다. 오늘도 큰아지매는 예외 없이 젖 먹일 때만 빼고 한수를 거의 하루 종일 안방에서 건사하였다. 받아놓은 저녁 상위의 밥과 국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다. 시간은 흐르고 있고 그 시간을 잡아 주저앉힐 수도 없고 그러니 자신은 시간의 힘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을 소향은 안다. 온 사지에 맥이 풀려 내린다. 가슴이 휑하게 비어져가고 시선이 고정되지 못할 만큼 불안하다. 하지만 이겨낼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는 소향은 쥐고 있는 주먹에 땀이 배어나오는 것도 모르고 옆에 쌓여있던 한수의 기저귀를 끌어안고 푹 쓰려져 부들부들 떨며 나오는 울음을 목으로 삼킨다.
-아지매- 하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광수를 앞세우고 재수도 우르르 들어오다 문간에 놓여있던 밥상 다리에 재수의 발이 걸려 상이 넘어진다. 국이 방바닥에 쏟아지고 두어 가지 반찬이 뒹군다. 그러나 밥그릇의 밥은 그대로 그릇 속에 담긴 채 구르고 있다. 당황한 광수와 재수는 눈만 커다랗게 뜨고 이제 막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는 눈물 맺힌 소향의 눈을 바라본다.
-니는 묵도 안한 상을 엎었구나. 우짤레-
-문 좀 열어라- 하는 소리에 광수에미가 허리를 뻗어 문을 열자 큰아지매는 한수를 안고 들어서며 -자네 여기 와 있었구만- 하고 말은 광수에미에게 하지만 눈은 넋이 빠진 소향을 본다.
그제야 소향은 한수를 안더니 젖을 내놓는 대신 얼굴에 한수를 갖다 대고 자신의 얼굴을 꼭 붙인다. 큰아지매는 보기가 민망한지 칭얼대는 한수에게 젖을 먹이지 않는 소향이 못마땅한지 살짝 돌아앉으며 -낼 아침 일찍 오라고 당부는 해놓았나?- 하고 광수에미에게 묻는다. 유모를 이르는 말이다. 한수를 얼굴에 묻고 있는 소향을 보다가 광수에미는 큰아지매의 그 말을 듣고는 -그 말을 꼭 여서 해야 됩니꺼?- 하고 도로 걸레질을 팍팍 해대며 -얀들 오죽하겠심니꺼? 행님은 아를 안 나봐서 모림니더. 할 장소 안할 장소 따로 있는 긴데- 하고 중얼거린다.
말을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다는 것을 탓하는 광수에미는 아주 예외적이다. 종가의 며느리들로서 단지 종부라는 것만 빼고는 둘의 위치가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동안 광수에미는 거의 단 한 번도 큰아지매의 말에 반박이나 반대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때로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이 들 때도 감히 말을 아꼈던 광수에미인데 오늘 저녁은 그것도 자신의 일이 아닌 소향의 일로 큰아지매를 나무라고 있다.
큰아지매도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소향의 몰골을 보고 행여 소향에게 자극이 될 만한 언행을 가리던 중이었는데 불쑥 입에서 유모 얘기가 나왔다. 사실 모든 것을 미덥지 못한 광수에미를 통해서 전달하고 전달받는 큰아지매의 입장에서 당장 내일 아침부터 한수에게 젖을 먹일 유모의 일은 중한 일이었고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광수에미의 말은 큰아지매를 잠시 생각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나 시인하거나 물러서는 큰아지매는 아니었다.
-한수는 이집 아들이고 종손일세. 그리고 이집 아들이면 내가 종부인 이상 내 아들이고. 누가 놓고 안 놓고는 불문인줄 모르나? 그리고 유모를 물어보는 것은 종손을 건사하는 종부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 함부로 말하지 마-
입이 허하게 벌어진 채로 광수에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큰아지매가 나간 방문을 보지만 아무 말도 못한다. 소향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울어대고 있는 메아리 때문에 사실 둘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천천히 한수를 내려 젖을 물리자 한수는 조용히 그러나 옹골차게 젖을 빨아댄다. 소향은 속으로 그래, 다 먹어라 내 속까지 다 먹어라. 내가 없어지도록 다 먹어라 그래서 삼천포 갈 내가 없어지면 좋겠다. 훨훨 날아서 삼천포 가겠다던 소향의 생각이 훨훨 다 날아가 버렸다. 광수에미는 계속 혀를 차대며 정신없이 젖을 먹고 있는 한수의 볼에 손가락을 대고는 다른 한손으로는 소향의 머리를 쓸어 올린다. 마땅히 소향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몰라서이다.
저녁을 혼자서 정기에서 먹었던 장서방은 할 일 다 마친 저녁이라 슬렁슬렁 자기 방쪽으로 가다가 소향의 방안에서 들리는 큰아지매의 말을 무심코 들었다. 속으로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심한 말이라고 여겼던 장서방이 자기 방안에 있던 장에서 산 털신을 들고 나와 방안에 대고 부른다.
정기에 앉아 불을 때고 있던 장서방에게 광수에미는 -자 혼자 갈라나 모리겠심더. 그 먼 길을- 하며 가마솥 뚜껑을 열어본다. 아직 물이 김도 내놓지 않고 있어 도로 닫으며 -암만 그래도 기차역까지는 누가 가야 안 되겠십니꺼?- 하고 허리를 펴고는 장서방을 내려다본다. 장서방은 부지깽이만 잡고서 그저 불길만 보고 있다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알려준 광수에미를 향해 -그렇군요, 소향이를 동행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광수어머니가 가시지요?- 하자 광수에미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렇지예? 쿠모 내가 가야지- 하고 도로 가마솥 뚜껑을 열고는 이제 막 김이 서리는 물을 퍼내서 대야에 담아 소향의 방안에 들인다. -암만 그래도 깨끗이 하고 가래이. 너거 어무이 보기도 그렇고- 하고 돌아서는데 안방문이 열리고 큰아지매의 말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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