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더 이상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의 무덤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혼으로 인해 의무와 책임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결혼 후 나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알기엔 상상력이 부족했다. 주변 사람들과 인터넷을 통해 간접경험이 넘쳐났지만, 동시에 ‘설마 내 일이 되겠어’ 라는 게으른 오만 또한 넘쳤다.
그래서 결혼했다. 당시의 애인과 만난 지 5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꽤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비관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성향 탓에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헤어짐에 대한 각오를 남겨두는 내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관계였다. 그는 내가 좀 더 자유롭고 용감하게 사는 것을 늘 지지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상대에 대한 믿음은 행복한 결혼생활의 전제가 될 수는 있어도 전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역할인생의 강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시아버지는 나를 앉혀놓고 짐짓 근엄한 얼굴로 파일 수여식을 진행하셨다. 그 안에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이 손수 적힌 종이와 남편의 보험증서가 들어있었다. 시아버지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셨지만, 나의 역할은 명확했다. 남편과 시가의 신변잡기 문제를 담당하는 것. 그렇다면 남편은 우리 집에 와서 뭘 받았을까? 그야 물론 밥상이다.
시아버지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에게 나는 ‘며느리’이고 ‘아가’이다. 남편 부모님은 역할로 사시는 것에 익숙하다. 한 쪽은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역할로 생계를 책임지고 가정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다른 한 쪽은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역할로 살며 가사노동을 도맡고 자녀를 양육한다. 물론, 시어머니도 경제활동을 꽤 오래 하셨지만, 그건 시어머니의 본분이 아니기에 보조 역할로 치부될 뿐이다. 두 분은 이렇듯 명확한 역할 구분으로 평생을 사셨고, 당연하게도 나에겐 며느리의 역할을 기대하신다.
나는 그분들 앞에서 며느리라는 역할로서 존재할 뿐, 나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가치, 기호, 목표는 관심받지 못한다. 그분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남편을 내조하고, 건강하게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시가의 행사와 안부를 챙기는 것이다. 즉, 남편의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챙겨주고, 남편 부모님에게 살갑게 애교를 부리고, 부모님 댁에서는 부엌일을 알아서 야무지게 하는 것들이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다. 여기에 나의 가치관이나 성향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답을 알면서도 궁금할 때가 있다. 그분들은 나를 왜 그리 찾으실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혼자 시부모님을 찾아뵙기로 한 날, 그래도 내가 오는지 안 오는지 궁금해하신다. 우리 집에 오시기로 한 날, 나의 일정과 상관없이 내가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와있기를 바라신다. 그분들은 나라는 사람을 원하시는 걸까, 며느리를 원하시는 걸까. 나를 만나서 하시는 말씀의 대부분이 남편 안부에 관한 것인 걸 보면, 답은 후자다.
물론, 역할인생은 당신들의 자식인 나의 남편에게도 적용된다. 남편 또한 이름보다는 ‘아들’이라 불리며, 아들로서 부모님을 챙기고 지원할 것을 요구받는다. 또한, 나의 남편으로서 나를 먹여 살리길 강요받는다. 역할인생이란 건, 필연적으로 개인성을 말살한다. 전통적인 성 역할을 거부하는 나와 남편의 선택은 존중받지 못한다. 개인의 주체적 선택과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는 이기적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이다. 심지어 당사자들끼리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출발점이 다르다. 결혼으로 인해 새로 얻게 된 우리의 호칭은 각각 '아가야'와 '김서방'이다. 이 호칭들 뒤에 올 자연스러운 말은 뭘까? ‘김서방, 이리 와서 갈비찜 들게’, ‘아가야, 그만하고 와서 쉬어라’ 정도일 것이다. ‘아가야, 들게’나 ‘김서방, 쉬어라’는 주술호응이 맞지 않는다. 나와 남편 모두 이름을 잃었지만, 과연 이를 같은 차원으로 볼 수 있을까.
며느리와 사위의 신분 차이
현재의 결혼제도 안에서 여자와 남자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내가 여자임을 생애 처음으로 가장 적나라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깨닫게 해준 것이 결혼이었다. 나는 절대로 남편과 동일한 위치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영원히 남편에게 종속된 한 단계 아래의 인간임을 결혼은 끊임없이 되새겨주었다. 이쯤에서 남자의 경제적 책임과 부담을 반론으로 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에 대한 가부장제의 억압은 경제 사정과 관련 없이 존재한다.
며느리와 사위에게는 주어지는 기대가 다르다. 사위는 0에서 시작해 조금만 잘해도 바로 +로 올라가는 데 비해 며느리는 수많은 기대를 다 채워야 비로소 당연한 0이 된다. 그 많은 기대에서 하나라도 못 채우면 바로 -로 떨어진다. 시간을 내서 남편 부모님을 만나고, 좋은 식당과 카페를 알아보고, 나로서는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하여 그럭저럭 화목한 식사를 하고 나서도 ‘애교 없는 며느리’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다.
나의 애쓴 마음은 당연한 것이 되고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받는 반면, 남편의 마음은 쓴 만큼 그대로 빛이 난다. 사위에 대한 평가는 ‘한 일’에 집중되지만, 며느리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은 일’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양가에 같은 수준의 마음을 쓰고 행동을 하기로 합의하며 결혼한 지 1년, 나의 남편은 자상하고 배려 깊고 착한 사위가 되어 있었고, 나는 남편의 팔불출 덕분에 편하게 지내는 ‘그냥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제도 속의 개인
괴로울 때마다 나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내게 행해지는 억압의 얼굴인 남편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남편 부모님의 인품과 언행에서 좋은 점을 찾아서 별개의 문제들을 퉁치려고 노력했다. 어찌 됐든 가부장제 속에서 나는 약자의 위치에 놓여있고, 약자는 강자를 이해해야 표면적으로라도 편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고 염려하는 부모님이고, 내가 정기적으로 교류할 대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개인으로 보자면, 그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분들이다. 이 사실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불필요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분들은 정이 많고, 성실하게 가계를 꾸리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일상의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선량한 분들이다.
그러나 온화한 성품의 그분들과 내가 시부모와 며느리로 만나는 순간, 상황은 복잡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상처 입힐 의도가 전혀 없지만, 결과적으로 상처 내고 상처 입는다. 그분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분명 나를 상처 입히는 건 그분들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분들을 서운하게 만든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는 시도가 그분들에겐 며느리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 친할머니의 제사에 참석하기로 했을 때였다. 갈 때 앞치마를 꼭 챙기라는 시어머니의 당부가 있었다. 여기서 슬픈 건, 이 조언이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나를 위한 배려라는 점이다. 일할 때 옷이 젖을까 봐 걱정해주신 것인데, 나에 대한 걱정이 그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이 남편 부모님의 한계다. 남편 큰집에서 남편이 아닌 내가 부엌일을 한다는 차별적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무리 다정하게 나를 배려하셔도 가부장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억압은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나와 남편은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편이 전화를 걸어, 나 혼자 부엌에서 일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고, 남편도 나와 같이 일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남편 부모님의 평소 다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엄청난 역정과 함께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셨다. 시아버지는 ‘너희가 너희의 생각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문화가 있다’고, 시어머니는 남편이 부엌에서 일하는 건 당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라고 하셨다. 남편 부모님이 나를 배려하고 다정하게 대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내가 며느리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순간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내면화된 억압
끔찍한 건, 역할을 가장한 억압이 이미 나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점이다. 일단,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의 부당함에 대해 이성적으로는 명확하게 인지하지만, 무의식적인 책임감에 스스로 당황할 때가 있다.
결혼 후, 남편이 회사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와이프가 아침밥 차려줘?”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 과일 도시락을 싸가는 남편에게 부러움과 칭찬이 쏟아졌다고 한다. 나의 상황과 성향에 기인한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었지만, 남편의 아침 도시락을 싸는 것은 개인적이기보다 사회적인 역할로 해석되었다. 질문이든 부러움이든 고정된 성 역할 발언과 발언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남편에게 쏟아내면서도, 내가 그들의 시선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도시락 내용이 부실할 때면 그들이 도시락을 보지 않기를 바라는 스스로에게 놀라곤 했다.
결혼한 순간부터 남편의 건강과 외형에 대한 평가는 곧장 아내에게 그 책임이 돌아간다. 남편이 살이 쪄도, 살이 빠져도, 셔츠가 구겨져도, 머리가 덥수룩해도 그건 아내의 직무유기로 여겨진다. 살이 쉽게 붙지 않는 남편의 몸은 나에겐 보기 좋게 늘씬한 몸이지만, 남편 부모님에게는 늘 걱정거리다. “OO(이)가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라는 남편 부모님의 말씀은 남편이 아닌 나를 향하고, 나는 자동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학습 받고 세뇌되었다. “그런가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신경을 안 쓰려고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이 이미 노력을 요한다.
이렇듯 아내에게는 남편을 ‘관리’할 의무가 주어진다. 남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전 세계를 움직이는 게 자연스럽다고 여겨지지만, 결혼제도 안에서는 갑자기 자율성이라고는 없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되는 아이러니이다. 남편이 미용실에 갈 타이밍을 살펴 안내해주는 것은 사소해 보이나 실은 굉장한 에너지 소모이다.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자들의 노동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다.
비혼과 기혼의 손익계산서
이 땅의 많은 여자들은 알고 있다. 결혼제도가 여자의 삶을 제약한다는 것,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에게는 기대되지 않는 것들이 ‘역할과 도리’라는 이름으로 요구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결혼을 원하고 결혼을 한다. 분명 결혼이 주는 달콤함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을 약속하고, 관계에서 안정감을 얻는 것과 같이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과업을 완료했다는 인정, 살 곳을 마련하고 아이를 기르는 데 필요한 제도적 지원 등도 있을 것이다.
결혼의 장점과 단점을 따져보면 어느 쪽의 리스트가 더 길까. 기혼과 비혼의 장단점을 표로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손익계산서를 만들어본 후, 여전히 결혼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사회적 특성을 고려해볼 때, 그 손익계산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어쩌면 비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일 수 있다.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 비혼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다면, 과연 이 사회의 여자들은 결혼에 관해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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