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세 할머니들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한다. 얼굴을 닦고, 머리를 쓰다듬고,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자막이 흐른다. ‘역사가 위안부라 낙인찍는다 해도 우리에겐 그냥 할머니다.’
<어폴로지>(The Apology, 티파니 슝 연출, 캐나다, 2016)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성범죄 피해여성들 중 세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는다. 세 할머니의 삶은 각 국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는 나이든 몸을 이끌고 세계를 여행하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왔다.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다른 여성들과 만나고 서로 돌보아 왔지만, 가족들에게는 아직도 기억을 털어놓지 못했다. 중국의 차오 할머니는 상처를 마음속에만 묻은 채 살아 왔다.
이처럼 세 할머니의 삶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강요된 침묵 밖으로 나와 ‘전쟁 성폭력’ 문제가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 구현 이슈임을 몸소 증명한 삶이라는 점은 같다. 감독은 세 명의 ‘위안부’ 피해여성과의 6년간의 만남을 통해, ‘위안부’라는 명명을 덜어내고 ‘할머니’로서 그들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어폴로지>는 전쟁이 여성의 몸에 남긴 상처를 ‘현재’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과거 아시아의 비극으로 박제해서는 안 되는, 범세계적이고 현재진행 중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최근 <귀향> 등 같은 소재를 다루었던 영화들과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녀’의 아픈 기억으로 바라보거나, 영적 의식을 통해 한을 푸는 것이 아닌, 기억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의 현재를 진행 중인 만남과 활동의 맥락 위에서 풀어나간다.
여기에서의 ‘현재’란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과의 논의 없이 일본 정부와 10억 엔 합의를 맺고 이 문제에 함구하기로 독단적 결정을 내린 현재이다. 또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기 위해 떠난 길원옥 할머니의 여행길 위에서 “한국 매춘부” 운운하는 우익단체들의 야유가 들려오는 현재이다.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나오자, 주변의 초대와 선물이 끊겨버린 필리핀 사회의 현재이며, 누구도 공유하지 않으려는 트라우마를 개인의 문제로 품고 평생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현재이기도 하다. 영화는 현재에 발 딛은 할머니들의 강인한 걸음을 좇는다.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는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는 과거 일본군 주둔지를 방문해, 자신이 수개월 간 감금되어 있었던 방을 마주한다. 할머니의 기억은 현재에 존재하는 공간 위에서 서술된다. 길원옥 할머니의 기억은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규탄하기 위해 떠난 여행길 위에 중첩된다. 영화에서 피해의 기억들은 잔혹함을 강조하기 위한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으며, 싸움을 이어나가는 길 위에서 다시 해석된다.
영화는 전쟁이 아시아 여성들의 몸에 남긴 상처의 지도를 더듬어 간다. 그리고 더 확장된 세계 여성들의 얼굴과 목소리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간다. “한 달 한 달 (몸 상태가) 다르지만” “필요하니까 부르겠지” 싶어서 여행을 멈출 수 없다는 길원옥 할머니의 발걸음과, 침묵을 깨고 가족들에게 과거를 털어놓으며 “심장에 박힌 가시”를 뽑아낸 아델라 할머니의 용기, 어렵사리 마음을 더듬어 기억을 꺼내 놓는 차오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성감독의 응시를 통해 지도 위에 각인된다.
그들의 이야기 사이에는 처음 듣는 ‘위안부’ 피해 증언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역할을 다짐하는 일본 여학생이 있고, 차오 할머니의 등을 감싸 안으며 고통에 공명하는 딸이 있고, 전 세계에서 받은 서명을 UN 인권 이사회에 전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활동가 여성들이 있다.
영화는 국적이 다른 세 할머니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여성들을 잇는 세계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가공동체 내의 문제가 아니며, 국경을 초월한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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