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2017년, 나의 새해 목표는 (진부하지만) 10kg 감량! 일찍이 많은 사람들을 좌절시켰던 미션이 내게도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미용 체중 만들기에 도전한 것은 처음이다. 퀴어 패셔니스타를 꿈꾸면서 항상 펑퍼짐한 치마나 고무줄 바지만 입어야 하는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자, 다이어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정확히 1년 전에 <일다>에 기고한 칼럼 “석사학위보다 무거운 내 11kg”에서 ‘공부에 비하면 시시한 싸움’이라고 표현했던 그 다이어트 말이다. 그래, 내가 바로 다이어트 하는 페미니스트다!
내 ‘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아’ 식단은 하루 약 3,500kcal로 성인 남성의 평균 식사량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므로, 다이어트 식단까지는 갈 길이 구만리였다. 그렇지만 인정사정 없이 칼로리를 계산해가며 식이 조절을 한 결과, 약 3개월 동안 체중 감량에 성공하여 원하던 몸매를 만들었다. 이 글은 내 몸을 다룬 80일간의 여정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이다.
# 나는 다이어트 하는 페미니스트다
내가 처음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하기야 몸을 매력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음식을 통제하겠다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발상은 아니다. 요컨대 몸에 무의미한 고통을 주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내 친구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는 친구들의 이런 반응에서 내 몸에 가해지는 또다른 통제의 시선을 느꼈다.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나의 가치관이나 몸이 어떻다든가 하는 평가를 입에 올리는 데에 훨씬 거북함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이 ‘내 몸을 바꾸고 싶다’는 선언을 ‘누구든 이 몸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점에서 다이어트에 부정적인 사람들의 반응은 비만인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의 반응과 통하는 데가 있다. 내가 내 몸에 대해 의견을 갖는 것과 남이 내 몸을 재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인데,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쉽사리 무너지곤 한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경계의 허물어짐은 내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더욱 멋있어지고 옷을 잘 입기 위한 것이 살을 빼는 커다란 목적 중 하나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그간 해왔던 모든 자기긍정의 표현들이 의심받을 것 같았다. 한동안 다이어트라는 말 대신 커팅(보디빌딩에서 근육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체지방을 줄이는 작업)을 한다는 표현을 고수했다. 살을 빼는 이유를 물으면 건강상의 이유를 댔다.
다이어트는 내 몸에 대한 혐오일까? 엄연히 존재하는 과도하게 마른 몸에 대한 선호와 미용에 대한 압박 때문에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어쩌면 비만인으로서의 나를 긍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한순간 다이어트의 동기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다이어트를 하고 날씬한 몸을 가지고 싶었던 자신의 욕심을 부정하고 거부하던 태도도 마찬가지로 내 몸을 소외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 다이어트, ‘빼기’의 철학
한편, 다이어트는 음식을 권한다는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행위에 담긴 폭력적인 전제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주기도 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과 종류는 무척 한정적이었는데, 그럼에도 뭔가를 먹어야 하는 상황, 먹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발생했다. 먹는다는 행위가 그토록 선택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 이전에는 알 턱이 없었다.
조금 엉뚱한 반응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럴 때마다 채식주의자인 친구가 떠올랐다. 언젠가 그가 해 준 얘기가 있다. 한국어 교사인 그에게 가끔 김밥을 싸서 가져오는 학부모가 있었는데, 김밥 안에 햄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먹기도,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망설이다 자신이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밝혔는데, 그 학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햄을 빼고 드시면 돼요” 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유사한 형태의 소외를 당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분식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애꿎은 물만 홀짝거리고 있는 내 코앞에 한 친구가 떡볶이를 흔들어 대면서 장난을 쳤다. 다들 웃어넘겼지만 채식주의자인 친구는 “내 앞에서 고기를 구우면서 놀리는 거랑 뭐가 달라!” 하며 보기 드물게 분개했다. 나는 그가 내가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정말로 공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친구와 밥을 먹을 때 채식 메뉴가 있는 식당을 알아보는 것을 자주 깜빡했던 일이 얼마나 배제적인 행동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이를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상하게도 식습관에 새로운 것을 더하려는 변화는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있던 것을 빼려는 시도는 곧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나나 채식주의자 친구가 앞으로 건강이나 미용을 위해 어떤 새로운 음식을 먹기로 했다면 한결 원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비단 음식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은 뭔가를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데에 무척 서툴다. 예컨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나, 주말에 약속을 잡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장애물을 맞닥뜨리는 것처럼 말이다.
과도한 다이어트에 대한 비판은 종종 ‘먹는 기쁨에 대한 긍정’을 근거로 동반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음식으로 삶을 채우려는 강박이 살을 빼려는 강박에 못지않게 흔하다는 것이 내가 다이어트를 하면서 받은 인상이다. 식단조절을 하면서 누구도 지적한 적이 없었던 나의 폭식습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던 것처럼 음식을 능동적으로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음식을 위에 가득 밀어 넣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먹는 양을 줄이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면서 처음으로 두부의 고소한 맛,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식빵의 달콤함, 샐러드의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틱낫한 스님의 절에서 배운 ‘맛있게 먹는 명상’의 의미를 이해했다.
폭식 충동이 오면 가까스로 참아냈지만, 사실 못 먹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음식으로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채워줄 다른 무언가를 찾는 일이었다. 감량에 성공해도 폭식 습관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고 그때그때 억누르는 것에 그친다면, 언젠가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결국 궁극적인 다이어트의 완성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음식에서 위로를 찾을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다이어트는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 예쁜 몸은 어떤 몸인가?
살이 빠지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같은 옷을 입어도 더 예뻐 보이게 된 것,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더 친절해지고 내 말을 존중하기 시작한 것, 외모와 전혀 상관없는 성취도 살이 빠지면서 더 인정받게 된 것…. 왜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좋은 변화만을 얘기하는 걸까?
세상은 우리에게 ‘살을 빼고 예뻐져라!’ 라고 지겹도록 외치지만, 하나를 없애면 다른 하나가 생기는 것이 바로 몸이다. 내 몸에 일어난 변화는 이렇다. 바지는 예쁘게 맞게 되었지만 자랑하던 엉덩이의 볼륨은 줄어들었다. 쳐지는 뱃살은 없어졌지만 가슴근육이 발달해서 드레스가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콤플렉스이던 펑퍼짐한 허벅지를 크게 줄이자 대신 넓은 어깨가 부각되었다. 살을 빼서 도리어 못 생겨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중 감량이 곧 아름다움을 보장할 정도로 아름다운 신체의 구성 요소는 기계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게다가 예뻐진다 한들, 누구나 연예인 같은 외모를 가질 수는 없다. 다이어트 식품이나 피트니스 센터의 광고는 잠재적인 다이어트 수요자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모델의 아름다운 몸매는 날씬하다는 것 외에도 큰 키에 길고 곧은 다리, 얇은 허리, 탄력있는 가슴 등 대부분 타고나야만 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보통의 신체 조건을 가진 일반인이 살을 뺀다고 결코 그런 몸매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넘을수록 더욱 높아지는 허들에 도전하는 꼴이라, 작은 성취가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나의 작은 키가 콤플렉스였던 적이 없다. 그런데 만족할 만큼 날씬해지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일이 늘어나면서, 왜 다리는 다른 마른 사람들처럼 늘씬해지지 않는지 고민되었다.
‘역시 다리 길이가 문제였나?’
모델처럼 아름다운 몸매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찾자면 끝이 없다. 몸의 모양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그런데 하나의 이상적인 몸이 목표가 될 때, 그렇지 않은 몸은 고쳐야 하지만 고칠 수 없는 단점의 집합으로만 보인다.
나는 분명 건강한 자기표현이자 삶의 방식으로서 다이어트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동시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이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만이었음을 느꼈다. 그래서 다이어트는 우리에게 ‘어디까지 해내느냐’의 도전에 못지않게 ‘어디에서 만족하고 멈출 수 있느냐’의 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 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 존중받는 몸
“Every size is beautiful, and every size is healthy!”(모든 사이즈는 아름답고, 모든 사이즈는 건강하다.)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운동에서 흔히 쓰이는 구호다. 그런데 나는 이 구호가 강조하는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지언정, 몸을 존중하자는 운동이 반드시 ‘모든 몸이 아름답고 건강하다’는 주장과 함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아름다운 몸과 건강한 몸, 그리고 존중받아야 할 몸을 하나로 묶는 프레임이야말로 다양한 몸에 관용적인 사회분위기를 위해 경계해야 할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거나 건강한 몸을 곧 가치 있는 몸으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이상적이지 않은 타인의 몸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손쉽게 근거를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건강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만인을 비난하면서, 타인의 신체를 재단하려는 욕망에 건강이라는 변명을 가져다 쓰는 행위의 끔찍함에 대해 인식하지 않는다.
게다가 뚱뚱한 몸이 건강하지 않은 몸이라는 것은 사실과도 거리가 멀다. 한때, 나에게도 건강은 곧 날씬함을 의미했다. “석사학위보다 무거운 내 11kg”에서 잠깐 언급했던, 하루 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서 인스턴트 음식으로만 끼니를 때우고 살이 잔뜩 쪘을 시기이다. 무거운 몸은 여러 가지 건강상 이상을 동반했기에, 나는 건강을 되찾기를 고대하면서 머릿속에 자연스레 날씬한 몸을 그렸다.
그런데 막상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식사도 건강하게 챙겨 먹고 또 잠도 실컷 자게 되면서, 체중과 체력은 동시에 최고점을 찍었다. 평생 50kg를 넘어본 적이 없던 나는 벌크업(고중량 운동과 고칼로리 식단으로 근육량을 증가시키는 것)을 통해 60kg가 되면서, 처음으로 넉넉한 지방이 우리 몸의 에너지 저장고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운동을 해서 몸은 좋아졌는데 살이 빠지지 않은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이르는 ‘건강한 돼지’라는 표현이 있다. 아니, 대체 누가 감히 ‘건강한 돼지’를 조롱거리로 삼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나는 전신에서 넘치는 힘을 느꼈고 강인한 신체가 가능하게 하는 일들에 매일 감탄했다.
반대로 내가 살이 빠지면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실감이었다. 평소대로 운동을 했을 뿐인데 숨이 가쁘고 피곤함을 느끼는 내 몸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몸이 피곤하니 의지력도 쉽게 바닥나곤 했다. 이러니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이어트의 고단함을 이해하는 트레이너 선생님은 내가 가볍게 들던 무게를 더 이상 들지 못하게 되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위로할 뿐, 전혀 답답해하지 않았다. 나는 지독한 아쉬움을 느꼈지만, 선생님의 말마따나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날씬한 몸이 건강하다는 말이 항상 사실이 아닌 것처럼, 뚱뚱한 몸이 늘 건강한 몸인 것도 아니다. 정답은 건강한 몸이 건강한 몸이다. 건강한 몸은 여러 가지 모양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미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아름다운 몸도 건강한 몸이 아니다. 아름다운 몸은 아름다운 몸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과 존중받아야 할 몸 또한 다르다. 모든 몸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모든 몸이 건강하고 아름답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몸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과, 타인의 몸의 경계를 존중하는 것은 별개이다. 뚱뚱한 몸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뚱뚱한 사람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살찐 몸이 날씬했을 때와 변함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 삶의 결과로서 내 몸이 자랑스러웠다.
일 년 전과 지금의 내 몸이 다른 것처럼, 일 년 후에 어떤 몸을 하고 있을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가능하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내 몸과 계속 살아갈 것이다. 결국 1년 전과 같은 결론으로 끝맺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보다,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경험자로서 말해 보자면, 다이어트는 한 번쯤 해볼 만한 시도이다. 하지만 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몸은, 그리고 모든 ‘먹는 철학’은 존중받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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