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 실패는 부도덕한 일인가요?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피임일기

도영원 | 기사입력 2017/12/09 [10:39]

피임 실패는 부도덕한 일인가요?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피임일기

도영원 | 입력 : 2017/12/09 [10:39]

# 사후피임약 처방받기

 

일요일 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겸 파트너와 섹스를 하다가 뒤늦게 콘돔이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급한 마음에 날이 밝자 마자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기로 결정했다. 약을 먹을 시간과 피임이 성공할 확률까지 계산해보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혼자서 병원에 갔다. 중년의 남자 의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며 “피임 똑바로 하세요” 라고 훈계했다. 우연히 자궁을 가져서 내 몸에만 위험 부담을 ‘몰빵’하는 것도 억울한데! 불운한 사고에 대해 오히려 핀잔을 들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혹시 교통사고를 당해 실려 온 사람들도 수술 전에 의사에게 “운전 똑바로 하세요” 같은 소리를 듣곤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병원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대의학을 통해 더 나은 삶의 옵션을 제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에서 보면 산부인과는 조금 별난 병원이다. 여기서는 환자들이 치료나 적절한 의학적 도움을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생활에 대한 훈계를 듣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이라고 오해나 받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가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문란한 성관계’를 했다고 해도, 그걸 뭐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산부인과 의사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어떤 성생활을 하고 있든 피임에 실패하거나 성병에 걸리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콘돔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을 경우를 포함한다면 콘돔의 피임 성공률은 약 80%라는데, 이번에 나는 그 20%에 속하는 경우를 경험한 셈이다. 부작용(?) 치고는 꽤 높은 확률이다. 살면서 몇 번이라도 보지-자지 간 삽입섹스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콘돔이 실패하는 일을 겪게 될 것이다. 환절기에는 조심해도 감기에 걸리곤 하는 것처럼, 임신은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다.

 

내가 경구피임약을 먹으며 이중 피임을 했다면 피임 성공률은 훨씬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언제 있을지 모르는 그 한 번의 가능성을 위해서 매일매일 경구피임약을 챙겨 먹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덜렁거리는 나는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약을 빼먹곤 했다. 게다가 매달 피임약을 구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나는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가능한 가장 안전한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여 누구도 ‘도의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100% 피임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지: pixabay)

 

# 고행의 길, 피임법을 찾아서

 

사후피임약은 3만원 가량으로, 적지 않은 가격에 보험처리도 되지 않는 항목이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기준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여태까지 병원에서 ‘비보험’이란 말을 들었던 건 미용 보톡스 주사를 맞을 때 정도였기에 사후피임약이 비급여 항목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역시나 임신은 상해나 질병의 경우와 달리 ‘내가 감당해야 하는 내 행동의 결과’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임신이라는 리스크가 개인적인 일로 인식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나는 스스로를 위해서 더 나은 피임법을 찾아 나섰다. 더 확실한 안전성을 손에 넣어야 하겠다는 생각, 다시는 피임 실패로 이런 불쾌한 일을 당하기 싫다는 생각에 지금까지와는 드라마틱하게 다른 피임법을 원했다. 어쩌면 나는 나를 임신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여성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무언가를 필요로 한 걸지도 모른다.

 

그 때 마침 주위에 임플라논을 시술 받은 친구가 있었다. 임플라논은 팔 안에 삽입하는 피임기구로, 한 번 시술 받으면 효과가 약 3년간 지속된다. 피임에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은 나에게 적절한 옵션 같았다. 그러나 막상 임플라논 후기를 찾아보니 정보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부작용이 심하다고 들었기에 객관적인 위험이나 효과에 대해 다수의 경험담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에는 몸에 뭔가를 집어넣는다는 것, 인공적으로 임신을 막는다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에서 기인한 것 같은 우려가 가득해서 답답했다.

 

결국 나는 ‘어차피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라는 생각에 시술을 강행했다. 이후 의사의 권고대로 목욕도 2주 이상 피했고, 격한 운동을 하면 자리 잡는 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에 겁이 나서 운동은 1주가량 쉬었다. 상처가 아무는 과정은 꽤 번거로웠고 팔에는 작은 흉터가 남았지만, 반영구적인 피임 효과를 얻었다. 생리 기간의 출혈과 고통이 거의 없어졌다는 점도 최고로 만족스러웠다. 한 달에 한 번씩 입 주변에 뾰루지가 나는 등 부작용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3년간 피임과 생리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극적인 효과에 비하면 감당할 만했다.

 

안타깝게도 임플라논을 시술 받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효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부정출혈이라는 부작용 때문에 오히려 한 달 내내 생리를 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빨리 기술이 발전해서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 손쉽게 임신의 위험과 생리, 생리통이라는 번거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인간이 달에도 가는 시대에 이미 그런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과연 ‘여성이라면 출혈을 하면서 힘들어 하거나, 섹스를 하고 나서 임신을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도,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수단들이 이렇게 꼭꼭 감춰져 있었을지 모르겠다. 아, 가격도 꽤 비쌌다. 33만원. 마찬가지로 의료보험으로 커버되지 않는 시술이었다.

 

# 아예 내 몸에 세금을 붙이지 그래

 

“그러게 피임 좀 하지!”

 

임신중절을 하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사연에는 꼭 이런 생각 없는 반응이 가장 많은 공감을 받는다. 그렇게 쉽게들 말하는 피임에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지, 의료보험 혜택이 이만큼 일반적인 나라에서 자궁을 가지고 성생활을 누리는 것에 따르는 비용만큼은 개인이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려도 없이 말이다.

 

사람들은 ‘여성’이라는 몸에 세금을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이 틀림없다. 남성용과 똑같은 제품에 ‘여성용’이라는 라벨만 붙여서 더 높은 가격을 받는 현상을 비판하는 ‘핑크 택스’(pink tax)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실상은 ‘핑크 택스’는 핑크색 면도기의 가격 정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성’으로 인식되는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라이프스타일 자체로 그렇지 않은 몸보다 많은 비용을 물게 된다. 그것도 꼭 금전적 비용에 한정되지 않는 많은 영역에서 말이다.

 

▶ 생리용품에 대해 배우고 필요한 용품을 구비하는 것은 오로지 생리하는 당사자의 책임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생리용품의 다양한 종류와 필요성은 ‘여자들만의 상식’ 정도로 사적인 것으로만 흔히 생각된다. (이미지: 셔터스톡)

 

생리용품만 해도 그렇다. 나는 삽입형 생리대인 탐폰을 처음 사용해 봤을 때, 두 가지 의미에서 놀랐다. 생리를 하면서도 이렇게 편하고 쾌적할 수 있다는 점, 또 이렇게 편한 것을 학교나 가정에서 널리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위에 물어가며 탐폰 사용 경험에 대해 듣고, 부실하다는 국내 회사 제품 대신에 추천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고 유명한 해외 제품을 직구로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까지 모든 것이 내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탐폰 이전에는 면 생리대를 쓴 적도 있다. 가격이 상당히 비싼데다가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고 그때는 제작하는 업체도 많지 않아서, 주문을 해놓고 한 달 가까이 기다려 제품을 받았다. 제품의 질은 만족스러웠지만 바쁜 와중에 매일 저녁 화장실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빨래를 하면서 보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 피가 빠지도록 물에 담가만 놓고 다 빨지 못한 생리대가 늘어만 가고, 제 때에 빨지 못해서 비싼 것을 버리게 되기도 했다. 결국 다시 일회용 생리대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유해한 생리대에 대한 기사에는 그렇게 쉽게들 “면 생리대를 쓰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대신 빨래라도 해 줄 셈인가? 생리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혼자서도 잘해요’ 식으로 모든 번거로운 일을 스스로 감당해내길 요구 받는다.

 

이렇게 나 혼자 알아보고 고생해가며 돌봐 온 몸에 대해 갑자기 내 의사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는 때가 있는데, 내 자궁의 생산능력을 자궁 없는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이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낮은 출산율이나 여성들의 이기심 따위를 들먹이며, 나라를 위해서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임신의 지속 여부를 당사자 대신에 결정하는 권한을 놓지 않으려 하고, 이미 일어난 임신중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독박 육아’, ‘독박 가사’ 뿐만이 아니라 ‘독박 피임’, ‘독박 생식능력 관리’, 심지어는 나 혼자 지켜야 하는 ‘독박 성적 도덕성’이라는 말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와 몸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몸이 가진 어떤 기능 때문에 생겨나는 비용, 수고, 결과나 책임도 분담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생각은 다시 나를 훈계했던 산부인과 의사에게로 돌아간다. 피임 실패로 혼자 사후피임약을 처방 받으러 와서, 보험 처리도 안 되는 3만원짜리 약을 먹고 하혈을 했던 나의 현실이 의미하는 여러 가지 책임에서 그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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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실은바닥 2020/02/26 [00:38] 수정 | 삭제
  • 이 글 너무 좋네요
  • 로앙스 2019/01/25 [05:30] 수정 | 삭제
  • 너무 공감되는 내용이네요. 합의하에 진행된 성관계라고는 해도, 피임의 책임을 모두 한쪽으로 미룬 채 한쪽은 권리를 다 챙긴다? 애는 같이 갖기 싫으면서 같이 즐기고 발뺀다? 이런 생각밖에 안드네요. 기본적으로 남녀의 몸차이에 기반한 생각들이라지만, 여자로 태어나 독박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을 볼때마다 환멸이 느껴지네요
  • ㅇㅇㅇㅇ 2018/05/10 [16:35] 수정 | 삭제
  • 생리에 대해서는 공감. 피임에 대해서는 그닥.. 합의하 성관계라는 전제 하에 피임은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나?
  • 몽실에덴 2018/04/12 [19:17] 수정 | 삭제
  • 나 혼자 알아보고 돌봐온 내 몸이라는 부분이 많이 와닿네요.
    사후피임약이나 임플라논, 생리대 등 사람들은 정말 여성의 자연스러운 몸의 기능에서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얘기를 잘해주셔서 너무 좋네요. 생리통으로 허리, 배, 머리 등 아픈 곳이 많잖아요.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 아니고 임신하고 싶어서 임신하는 것도 아닌데 참.. 아직 사회가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네요.
  • 레디니모 2018/04/03 [13:56] 수정 | 삭제
  • 정말 좋은 글이네요. 여성으로서 더 높은 성적 도덕 관념을 강요 받는 다는 것과 대부분의 경우 온전히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한국사회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 지도관장 2018/04/02 [11:38] 수정 | 삭제
  • 공감?공감!
  • 날이 2017/12/23 [10:13] 수정 | 삭제
  • 구구절절 공감이 되네요! 생리와 임신, 그리고 피임을 여성 개인의 일로 치부하는 남성사회에 분노가 치미네요. 면생리대 빨래 정말 힘들잖아요. 팔도 아프고 물도 많이 쓰게 되고. 하루 빨리 안전한 일회용 생리대가 많아지고, 손쉽게 피임과 임신중절할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어요.
  • 2017/12/14 [09:42] 수정 | 삭제
  • 맞아요. 피임이 얼마나 힘든데 알아서 하라는 식이잖아요 헬조선!
  • ㅠㅠ 2017/12/12 [18:51] 수정 | 삭제
  • 돈 많이 드는 몸 ㅠㅠ 슬픕니다
  • 아줌마 2017/12/09 [13:38] 수정 | 삭제
  • 독박육아 독박가사에 이은 독박피임 독박도덕성 너무 멋진 말이네요
  • 덩치 2017/12/09 [12:02] 수정 | 삭제
  • 너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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