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디펜스를 배운 여성들이 들려준 말들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세계여성폭력 추방 주간에

최하란 | 기사입력 2018/11/28 [21:07]

셀프 디펜스를 배운 여성들이 들려준 말들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세계여성폭력 추방 주간에

최하란 | 입력 : 2018/11/28 [21:07]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이번 회는 11월 25일~12월 10일 세계여성폭력 추방 주간을 맞이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편집자 주

 

삶의 긍정적인 변화들

 

나는 어릴 때 운동선수였거나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전공은 철학이었다. 스물여섯이 되던 해, 몸에 이상증세가 찾아왔다. 거북목 증상에서 시작된 통증이 가슴까지 퍼져갔고, 일상이 고통이었다. 병원에 갔더니 ‘목뼈의 정렬이 좋지 않아서 디스크가 눌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카이로프랙틱 치료를 받으면서 많이 좋아졌다.

 

심각한 통증이 줄고 나니까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뭔가 하고 싶었다. 요가를 배웠고, 매일 공원 트랙에서 달렸다. 비가 와도 달렸다. 너무 쏟아질 때는 1층에서 17층까지 아파트 계단을 뛰어다녔다. 어느 날, 수련하던 요가원에 요가 지도자 과정 공고가 붙었다. 더 깊이 알고 싶어 신청했고, 요가 강사가 됐다. 더 활동적인 걸 원해 택견을 배웠다. 대회에 나가 곧잘 입상했고 유단자가 됐다.

 

▶ 케틀벨 운동 ⓒ스쿨오브무브먼트


운동을 즐기다보니 케틀벨 운동 같은 기능성 운동으로 나아갔고 해외에서 몇몇 자격을 취득했다. 관심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확장됐다. 복합적인 움직임이자 대인운동이며 셀프 디펜스(호신)의 가치도 있는 ‘크라브 마가’를 세르비아, 덴마크, 이스라엘, 체코, 독일, 중국, 호주 등에서 배웠다. 지난 6년 동안 나는 자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셀프 디펜스 기술로서 크라브 마가를 널리 알리고 있다.

 

내 크라브 마가 스승인 이얼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크라브 마가가 내 목숨을 살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보다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선생님의 말씀은 실제로 삶과 죽음이 오가는 위험상황에서 기술을 사용하는 일보다 셀프 디펜스를 배움으로써 삶의 긍정적인 변화들을 훨씬 더 많이 경험한다는 뜻이다.

 

내게 배운 여성들에게서도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보다 적지만, 실제로 셀프 디펜스 기술을 사용한 사례들도 들었다. 지하철 성추행범을 퇴치한 경우도 있고,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잘 대처한 경우도 있고, 폭력에 직면한 다른 여성을 도운 사례도 있다. 고객의 폭력적인 행동을 해결한 경우들도 있다. 내 자신도 식당에서 술을 마신 세 명이 시비 거는 걸 회피하고 위험을 모면한 적이 있다.

 

그러나 속 시원히 대응하지 못한 사례들도 들었다. 슈퍼맨조차 최악의 위기에 처할 만큼 악당들도 머리를 참 잘 쓰지 않나. 예를 들어 공격자가 가장 유리한 조건과 타이밍을 노려 성추행을 시도한다면, 우리가 대응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내가 들은 이런 사례들에서 그들은 자책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사건을 잘 평가하고, 정리했다. 사건을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도 셀프 디펜스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폭력 생존자다

 

어느 수업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평소 자주 하는 얘기다.

 

“많은 여성들이 셀프 디펜스를 모르고, 배운 적도 없지만 실제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왔다. 그러나 언론은 당한 사람, 죽은 사람만 보여준다. 피해 생존자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관심이 없다. 예를 들어, 강간 미수라고 하자. 그러면 강간범이 강간하려다 ‘아, 이러면 안 되지’하고 정신을 차리고 그만두어서 강간 미수가 되었을까? 여성들이 뭔가 했다! 그래서 강간에 실패한 거다.

 

실제로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애원했다’, ‘소리 질렀다’, ‘협박했다’, ‘속였다’, ‘도움을 요청했다’, ‘뛰어서 도망갔다’, ‘저항하고 싸웠다’ 같은 다양한 대처가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응답은 훨씬 적다.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성폭행 시도의 75퍼센트가 성공적으로 저지된다. 언론은 이런 사실들에 관심이 없다. 혐오스럽고 등골 오싹한 단어들을 선별해서 제목에 집어넣고 자극적인 부분을 상세하게 묘사하는데 열심이다.”

 

▶ 여성 셀프디펜스 수업 공간. ⓒ스쿨오브무브먼트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데 작년에 만났던 그가 ‘선생님, 잠깐만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작년에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날 자기소개 시간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이 수업을 들어도 내가 달라질 것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소감을 나누는 시간에는 “그래도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나고 다시 만난 두 번째 수업이 끝나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라졌던 기억이 20년 만에 떠올랐어요. 20년 전에, 저는 가까운 사람에게 세 시간 동안 칼로 위협 당하고 심각하게 추행 당했어요. 그때의 폭력이 너무 크고 강해서 저는 그 폭력만 기억에 남았고,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는 지난 2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어요. 그런데 오늘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그때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했다는 것이 갑자기 생각났어요. 오늘은 제게 무척 특별한 날입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나는 그에게 안아도 되겠냐고, 이 얘기를 알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이죠”라고 답했고 우리는 따뜻하게 서로 포옹하고 헤어졌다.

 

그는 사회복지사다

 

나는 도전행동(자해, 타해)을 하는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교사나 실무자들에게 도전행동이 발생했을 때 장애인과 실무자 모두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하고 있다. 교육계획을 위한 회의 자리에서 그는 내게 자신이 겪은 위험했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어머니와 분리되고 매우 불안해하던 (기관) 이용자가 어머니를 찾으러 복도로 뛰쳐나왔습니다. 저도 급하게 따라 나섰는데, 복도에는 거동이 불편해서 조심스럽게 걷고 계신 어르신과 이제 막 걸음을 뗀 어린 아이가 있었어요. 불안한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이용자는 복도에서 있던 아이를 쳐다보고는 갑자기 다가갔습니다. 저는 위험을 느끼고 즉시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는데, 결국 이용자는 제 머리를 물어뜯었어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는 이용자의 도전행동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여러 고민들과 함께,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당연히 느끼는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나는 먼저 그때 다친 곳은 괜찮은지 물었다. 그 다음 그가 자신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사람 앞을 막아서고 어린 아이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가 한 일은 경호원들이 하는 중요인물(VIP) 보호와 같은 것으로, 자신이 위험해지더라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뛰어든 매우 헌신적인 행동이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이와 비슷한 일이 다음에 일어날 경우 더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과 기술에 대해 조언했다.

 

▶ 안전한 대처와 실천 교육 ⓒ스쿨오브무브먼트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우리에게는 공평한 시각이 필요하다. 그는 8회기 16시간의 교육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고,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여전히 자신을 물었던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성인 남성 이용자를 담당하고 있다. 일과 시작 전에 배운 것들로 몸을 풀고 연습하며 몸과 마음의 긴장감을 낮춘다고 한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커져서 몸도 마음도 조금은 더 유연해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민원담당 공무원이다

 

민원담당 공무원 대상 교육을 요청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교육 일정을 잡고 민원담당 공무원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2017년 5월에 발간한 A4용지 133쪽에 달하는 공공부문 특별(악성, 고질)민원 대응매뉴얼을 발견했다. 사례를 보면 폭언과 욕설, 위협은 기본이고 매우 드물지만 자해와 방화, 상해, 살인까지 다양했다.

 

교육 장소에 갔다. 참가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다. 육체적 보호뿐 아니라 정신적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위험을 인지하는 방법, 경계를 설정하는 방법,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방법들을 교육하고 연습하고,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위험한 인물과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라고 하셨는데요. 저희가 일할 때 민원인과 민원대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마주해야 할 때가 있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하는 공간의 구조를 안전하게 설정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우선 가능하다면 확실한 공간 분리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같은 곳입니다. 모든 곳을 그렇게 분리할 수 없고 함께 있게 된다면, 출입구를 등지지는 말고 출입구와 가까운 쪽에 자리를 잡고 민원인은 상석이기도 한 안쪽으로 안내하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그래도 이제 일도 오래 하고 그래서 요령도 좀 있고 한데, 젊은 여성공무원들이 정말 많이 힘들어해요. 이 교육 받고 나니까 ‘그래 올 테면 와봐라’하는 든든함이 생기네요! 오늘 못 온 우리 직원들도 꼭 이 교육 받았으면 좋겠어요.”

 

▶ 갈등과 대립에 대처하는 방법 ⓒ스쿨오브무브먼트

 

나는 2016년부터 가정폭력과 성폭력 생존자들을 정기적으로 수개월씩 교육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심각한 폭력을 실제로 경험했다. 내가 이들의 트라우마 극복과 회복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쁘다.

 

또 직업적으로 셀프 디펜스가 필요한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어 민원담당부서 공무원들, 응급실 간호사들, 자해타해 성향이 있는 발달장애인을 담당하는 특수교사, 사회복지사들을 교육한다. 이들도 폭력에 취약한 처지에 있다. 어떤 분은 ‘뺨을 열대를 때려도 그냥 맞고만 있던 내가 이제 맞지 않을 방법이 생겼다’며 기뻐하셨는데, 그 순간 가슴이 찡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일들을 여성이 맡고 있다. 내가 가진 기술이 도움이 됐다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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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cibel 2018/12/13 [15:40] 수정 | 삭제
  • 여성들이 무언가를 했다! 공백이 채워지고 다르게 해석되는 발상의 전환이라 좀 놀랐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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