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프라이부르크 시에 신설된 이주난민청(Amt für Migration und Integration)의 난민 전문 센터(Kompetenz-Center für Geflüchtete) 담당자 안차 라인하트(Antje Reinhart)를 만났다. 이 자리에는 한국에서 온 32명의 젊은 난민 지지자도 함께 해 더욱 의미가 깊었다. ‘녹색전환’이라는 주제로 나와 함께 10여일 간 프라이부르크를 탐방한 대안학교 ‘길위의 학교 로드스꼴라’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베를린에 위치한 이민-난민을 위한 연방정부기관 BAMF(Bundesamt für Migration und Flüchtlinge)에서 큰 제도정책적 틀을 만든다면, 서남부 바덴-뷔르템부르크 주에 소속된 프라이부르크 시 이주난민청의 주된 역할은 난민신청자들에게 직접적인 지원(물품, 숙소, 현금 등)을 제공하고, 노동허가를 받은 이들에게 직업훈련과 일자리를 중계하는 것이다.
유입되는 난민 수에 비해 준비가 부족했던 2014년에는 최대한 규모가 작은 집단 숙소들을 도시 곳곳에 운영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2015년에는 조건이 보다 나은 전문 수용시설(competent reception facility)을 건설하는 한편, 난민 주거 3단계 중 마지막인 연결 숙소(connection accommodation), 가족 혹은 개인 단위로 독립된 주거가 가능한 일반 주택을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사회복지사 인력을 충원하고 자원봉사자 관리 부서를 만든 것도 이 때였다.
2017년부터는 관청과 소속센터가 한결 자리를 잡아, 난민 당사자들의 주도하는 프로그램이나 트라우마 치료 지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프라이부르크 시는 대다수 시민들의 친(親)난민 성향에 힘입어 꽤 순조롭게 ‘난민 통합 정치’를 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5년 가까이 이곳에서 거주했으며 도시행정과 시민운동에 관심이 많은 내가 관찰한 바로도, 프라이부르크는 독일의 이른바 ‘난민 위기’ 시기에도 큰 소요나 불화 없이 난민과 공존하는 도시를 만들어 왔다.
기존 풀뿌리 시민단체와 모임들이 앞 다투어 난민들을 위한 프로젝트(물품 기부, 공동텃밭, 무료 독일어 강좌, 식사 모임, 아랍문화축제)를 전개했다. 행정과 사회복지 분야 경험이 있는 일반 시민이나 난민 출신의 외국인을 별정직으로 채용해 사회복지사처럼 개별 난민에게 배정하는 제도(Integration Manager)도 효과가 있었다.
아마 중산층이 두텁고, 예전부터 윤택한 가톨릭 국경 지역이었던 도시의 특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탈핵 운동에서 출발한 유럽의 대표적인 환경도시, 녹색당 정부가 오래 집권한 곳, 과거 군 주둔지를 친환경 재개발한 성공적인 거버넌스 사례로서의 면모를 잘 발휘한 것 같기도 하다.
이주난민청과 100분간 진행한 정책 브리핑과 질의응답을 통해 배운 것을 나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마을이 난민을 구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난민 한 사람이 새로운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매일 의식주가 이루어지고 직업 활동 및 여가생활, 인간관계를 영위하는 시공간, 마을(지역공동체)이다.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을 결정짓는 것은 인생의 거창한 성취나 실패가 아니라 일상이다. 일상을 보내는 마을이 자신에게 편안하다면,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거기에 자기 몫이 있고 자신도 구성원이라는 감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비록 한 국가의 난민 정책이 더디고 배타적이더라도 마을은 난민을 포용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마을이 난민을 구할 것이다.’ 시민권도 투표권도 없는 힘없는 외국인 중 한 사람으로서, 다음 달 밥벌이를 걱정하는 불안한 프리랜서로서, 나에게는 이것이 그나마 희망적인 소결론이다. 요즘 나는 이주난민청과 관련 단체의 뉴스레터를 일일이 받아보고, 지역에서 열리는 관련 행사와 모임도 달력에 표시한다. 그렇게 나는 어느 난민에게 편안한 마을이 되고 싶고, 나 자신도 살기 좋은 마을에 속하고 싶다.
비로소 여자의 얼굴을 한 난민, 그들의 말말말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연재 초반에 번역자 노트에서 나는 내게 ‘난민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었다. 이후 일 년 동안 여성 난민들의 이야기를 가까이 접하며, 이제 내 안에는 여성의 모습을 한 난민들의 얼굴이 수없이 맺혀있다.
그녀들은 정치인, 종교인, 학생, 직장인, 활동가, 생존자이며 어머니, 딸, 아내이고, 이 모든 것 이전에 존엄한 인간들이다. 인터뷰한 시점의 나이는 20대 초반부터 50대 후반까지 다양하며 출신국가와 경험도 다채롭다.
난민에 대한 어떤 정형화된 규정이나 편견을 거부하고 자기 경험을 용기 있게 세상에 내 놓았으며, 누구보다 정치적 존재가 된 화자들의 목소리를 오래 기억하고자 발언 중 일부를 세 가지 주제-1)젠더 박해 2)난민 인권 선언 3)유럽 사회의 차별-로 나누어 정리해본다.
1) 젠더 박해: 폭력, 학대, 강간, 할례에 맞서 살아남다
“오늘날에도 그 사람들을 나를 급진적으로 본다. 유럽까지 왔으면서도 그들의 눈은 아직 닫혀있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직도 말을 꺼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게 이 야만적 행위를 같이 멈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나한테 전화기가 한 대 있으면 할례 전통이 없는 국가에 우선 사무실을 만들 것이다.” –여성 할례에서 살아남은 소말리아 출신 빈투 보장 (관련 기사: 끔찍한 ‘여성할례’ 악습이 전부 폐지되는 날까지 http://ildaro.com/8205)
“사우디에서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선 남자는 시민이고 여자는 노예나 마찬가지다. 여성이 공부하고, 일하고, 결혼하려면 남성의 허락이 있어야만 한다. 내게 방을 빌릴 돈이 있다 해도, 내 이름으로 계약할 수 없다. 문서에 서명을 하려면 언제나 남자가 필요하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나 마찬가지다. 운이 좋으면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여성 (관련 기사: 사우디에선 ‘노예’, 독일에선 ‘갇힌 신세’ http://ildaro.com/8222)
“여성들은 우선 자기 가족의 남자들부터 설득하는 싸움을 거쳐야 사회에 나와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 여성이 직업을 가지면 뒤에서 악의적으로 수군댄다. 주변에서 ‘나쁜 여자’로 회자된다. (…)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가 직업을 가지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아프가니스탄 국회의원 후보 출신의 여성 (관련 기사: 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국회의원 후보였다 http://ildaro.com/8312)
2) 난민 인권 선언: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
“젠더 박해도 정치적 망명으로 인정하라! (…) 그 어떤 법도 국경의 군대도 우리가 여기 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 오고야 말 것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머물 것이다.” –아프리카 출신 여성 (관련 기사: ‘젠더 박해’를 정치적 망명 사유로 인정하라 http://ildaro.com/8148)
“이곳에서 우리의 자리는 제대로 된 삶과는 거리가 한참 먼 난민 숙소이다. 마치 우리에게 전염병이라도 있다는 듯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듯이, 우리 아이들에겐 다른 아이들처럼 살 권리가 없다는 듯이. 견디기가 정말 어렵다. (…) 우리를 이런 비참함 속에 내버려둠으로써, 이런 처지에서 살게 함으로써,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우리가 ‘차라리 그냥 돌아가겠다’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라크 출신의 무슬림 여성 (관련 기사: 무슬림 여성난민의 외침 ‘자유와 인권은 어디 있나’ http://ildaro.com/8264)
“나는 친구들과 “난민이란 지칭을 그만두자”(stop calling people refugees)는 캠페인에 대해 얘기해보았다. 내게 이 메시지는 “그 누구도 불법이 아니다”(Kein Mensch ist illegal)라는 슬로건과 같다. 하지만 실상 내가 느끼는 감각은 “그래, 난 불법이다”(Doch, ich bin illegal)이다. (…) 현실에서 나는 불법이고 그걸 무시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당신들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고. 우린 동등하지 않다. “난민 환영”(Refugees welcome) 슬로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환영받지 못한다. 거리에서 외치는 말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오히려 “나는 난민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누군가? 나는 난민이다. 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나의 불평등을 인지하는 선언이다.” –이란 출신 트랜스젠더 여성 (관련 기사: ‘그래, 나는 불법 난민이다!’ http://ildaro.com/8287)
“어떤 형태든 강제 송환은 일어나선 안 된다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난민 신청자들이 유럽으로만 오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야겠네요. 당신들만 난민을 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가면 수천 수백만 난민들이 있습니다. 전체 난민의 1/3 정도만이 여기 유럽으로 옵니다. 정 난민을 원치 않는다면, 분쟁 지역에서 당신들이 벌이는 그 모든 짓을 안 하면 됩니다. 그만두세요! 그러면 누구도 유럽에 와서 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관련 기사: “난민 인권을 위해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http://ildaro.com/8340)
(…) 나무 농성 때, 아주 추운 날씨에 비까지 내리는데 경찰이 밥을 못 먹게 했어요. 결국에 저는 설사가 나고 온 몸이 부어서 입고 있던 셔츠를 찢어야 했어요. 이런 일을 해낼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냐고요? 다른 여성 동지들이 나무 밑에서 장미나 꽃을 들고서 제 이름을 불러주는 데에서 에너지를 얻었어요. 나만 괴롭다고 할 게 있나요? 그 사람들도 빗속에 종일 거기 서서 애들까지 데리고 와 있는데.” –수단 출신의 활동가 나풀리 랑가 (관련 기사: “여성들은 어디서든 존재감을 드러내야 합니다” http://ildaro.com/8347)
3) 백인 유럽 사회의 위선과 차별을 고발한다
“독일 사람들, 정말 우습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게도 평범한 여자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랑과 공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망명 신청자’라는 나의 상황과, 이 과정에서 내가 그들에게 뭔가를 부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틀렸다. 나는 내 힘으로 여기 왔고, 경비도 스스로 지불했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다. 남자를 찾는 게 내 목적이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나의 발전에 집중한다.” –아프리카 출신의 여성 (관련 기사: ‘젠더 박해’를 정치적 망명 사유로 인정하라 http://ildaro.com/8148)
“세르비아에서 받는 것과 마찬가지 홀대를 유럽연합 국가들에서도 받고 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유럽”에 우리를 원치 않는다. 독일에는 나치도 있다. (…) 지금도 독일은 난민들이 제 발로 독일을 떠나게 만들려고 수용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로마니들은 튼튼해서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다.” –로마니 여성 아드밀라 아닉 (관련 기사: 유럽의 ‘집시’ 박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http://ildaro.com/8166)
“이곳은 하나의 행성, 하나의 세상. 사랑은 하나, 혈육도 하나. 차별의 근거를 저는 찾을 수 없네요. 지구에 인간을 위한 공간은 충분합니다. 다 같이 살 수 있어요. 분류하고 구별하며 사람들을 서로 다른 집단과 계급, 비둘기집 구멍 같은 곳으로 몰아넣지 않고도요. 독일은 세계 제일의 무기 수출 국가예요. 무기 생산에 들어가는 자원은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나오고 있죠. 그러니까 이 사회는 왜 난민들이 유럽으로 계속 흘러들어 오는지를 의아해해선 안됩니다. 저 반대편, 아프리카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 이 난민들, 특히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은 유럽에 의한 식민지 건설의 결과이자 증거입니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앞으로 수세대에 걸쳐 이런 현실이 계속될 겁니다.” –케냐 출신의 활동가 미리암 (관련 기사: 독일서 17년을 살고도 나는 여전히 난민 신세였다 http://ildaro.com/8375)
“한국사회가 난민에게 기회를 준다면…새로운 문이 열릴 것”
난민 문제가 어느 딴 나라의 것이 아니라 한국의 과제이기도 하다는 것은, 올해 5월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출신의 난민 신청자들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여론’ ‘다수 의견’ ‘국민 정서’라고 나오는 말들에 실체가 없다고 보는 편이지만, ‘난민에 대한 여론’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예멘 난민신청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 무지, 혐오는 실로 커보였다. 이는 낯선 대상, 소수에 불과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을 딛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더 많은 난민들이 앞으로 한국을 찾아올 것이며, 이들의 체류권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수단 출신 난민 나오라스는 난민인권센터에서 발행한 ‘한국 거주 난민 에세이집 <안녕, 한국!>’에서 “난민 신청은 국제사회가 잘못된 정책에 참여하고 침묵하여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하면서 한국도 수단의 독재 정부를 지지하고 거기서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한국에서 사는 주류 시민들은 우리 사회에 찾아온 난민이라는 존재를 통해 세계에 대해 더 배울 것이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는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분쟁 지역의 정세에 대해, 식민 제국주의와 20세기의 전쟁들이 오늘날 테러리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상식으로 익히면서 다인종 사회가 겪는 혼란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주와 난민 문제는 빈곤, 지속가능한 개발, 기후변화와 맞물려 있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이러한 골칫거리를 기꺼이 끌어안는 데에는 겸허한 용기와 흔들리지 않는 낙관이 필요하다.
2014년, 36살에 독일에서 숨을 거둔 난민 미미는 “우리는 언제쯤에나 다 같이 문제 해결에 나설 건가요?”라고 물었고, 이에 화답하듯이 한국에 사는 난민 나오라스는 2018년에 “한국 사회가 난민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들 앞에 새로운 문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2017년에 독일 체류권을 받으러 이주통합청에 갔다가 담당 공무원의 책상 위를 스치듯 보았다. 뜻밖에도 이런 글귀가 붙어있었다. ‘아스팔트 좁은 틈에서 민들레꽃이 필 수 있다면, 우리 역시 길을 찾을 수 있다.’ 아, 이 사람도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구나. 굴욕적인 비자 면담이 한결 낫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2018년을 며칠 남긴 어제는 한 책갈피에 적힌 인도의 시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다음 말이 유독 와 닿았다.
“나는 내 나름의 낙관주의자가 되어왔다. 내가 만일 어떤 문을 통과할 수 없다면 나는 다른 문으로 지나갈 것이다. 혹은, 내가 직접 문을 만들 것이다. 현재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뭔가 훌륭한 것이 올 것이다.”
오늘도 새 삶과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난민 여성들에게, 또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2019년 신년 덕담으로 건넨다.
※ 본 연재 지면을 함께 만든 <일다>와, 같이 뜨거운 마음이 되어준 독자들, 그리고 마감을 앞둔 늦은 밤마다 내 곁을 지켜준 코뿔소와 누룽지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5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를 출간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젠더와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글쓰고 행동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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