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에서 보도한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연재 시리즈를 보고, 한국에 체류 중인 네덜란드 입양인 김은영 씨가 보내온 기고문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보통 사람들”과 다른 해외입양인들의 삶의 시작점
내 이름은 김은영, 소냐 반덴베르흐(Sonja van den Berg)이다. 성장하면서, 난 내가 태어난 것이 “보통 사람들”처럼 내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내가 태어난 것, 배경, 그리고 부모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입양서류에 따르면, 나는 서울 성북구의 한 파출소에서 버려진 아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국 입양기관이 내가 태어난 날을 추정했고, 1978년 12월 9일이라고 했다. 1979년 5월, 네덜란드의 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가 갖고 있었던 것은 한국어로 쓰여진 얇은 서류들, 짧은 영어 번역문, 내가 입고 있었던 옷이 전부다.
“보통 사람들”에게 아기 사진앨범은 자신이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찍은 그 사진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다르다. 내 사진앨범은 김포 공항을 거처, 일본의 나리타 공항을 경유하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까지 비행했을 때, 내가 비행기로 북극을 통과했다고 언급되는 네덜란드 항공의 파란색 증명서로 시작되었다.
자라면서, 내게 이 서류들과 옷은 마치 마법과 같은 물건이었다. 이것들은 내가 한국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믿기 어려운 증거였다. 믿기 어렵다고 말한 이유는 문자 그대로 내가 그것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非)입양인들은 자신들의 부모와 가족들에게 그들이 태어난 상황이나 일화들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물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서 내가 태어난 것을 목격한 사람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누구도 한국에 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한국은 나에게 마법적이며, 신비한 장소였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이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나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로테르담에서 자랐다. 아이였고, 십대였고, 청소년이었을 때,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떠나온 과거, 장소는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고, 난 거기에 속해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표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1979년 5월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내 삶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내 입양서류는 가짜였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나, 나에게 사랑하는 양어머니와 가족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내 생모가 나를 입양 보내기 위해서 포기했던 상황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진실이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엄마에게서 버려졌다는 점이다. 난 이 사실을 몇 년 전에야 깨달았다. 내가 한국에 와서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을 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많은 입양인들이 불안해하고 불편해하는 이유 중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들이 입양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전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내 엄마가 나를 떠났고,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이는 내가 마치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에서 어떤 공간도 차지하도록 허락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감정들의 일부는 나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많은 입양인들이 말로 얘기하지 않지만,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대 초반에, 내가 입양되었을 때 한국 입양기관이 내 정보가 기입된 서류를 보낸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서류를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출생 증명서에 따르면, 나는 1979년 2월 10일 한강 근처에 있는 서울 마포구의 작은 조산소에서 태어났다. 내 생모는 당시 21살이었고 그녀의 이름은 김순자이다.
그녀는 비혼 상태였고, 이것이 아마도 엄마가 나를 낳은 지 3일 후에 딸을 품에 안지 않고서 조산소를 떠나야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이 때문에 내가 엄마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나를 만나주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아마도 이후에 결혼을 했을 것이고, 가정을 꾸렸을 것이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나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 마포구의 작은 동네, 내 삶이 진짜 시작된 곳
나는 2010년부터 2015년까지 5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다. 2011년에 남자친구를 만나서 2014년에 서울 관악구에서 딸을 낳았다. 우리는 딸의 이름을 1998년에 돌아가신 나의 양어머니 이름을 따서 지었다. 2015년에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내 딸과 함께 네덜란드로 돌아와 거기에서 2년 반 동안 살았다.
그때야 비로소 한국에서 산 경험이 얼마나 나를 바꾸었는지 깨달았다. 한국은 내가 거의 소리 내어서 말할 수 없었던 신비의 나라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한국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나에게 고통스러울 리만큼 이상했었다. 이제 난 정말 많이 변했다. 네덜란드에 돌아왔을 때, 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했다. 한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입었던 그 아기 옷들을 모두 싹 버렸다. 그 옷들은 이미 마술을 잃어버렸는데, 왜냐하면 한국은 이제 내게 신비한 마법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딸과 나는 모두 서울에서 태어났다.
나와 내 딸은 2018년에 다시 한국에 왔고, 우리는 현재 인천에서 살고 있다. 나는 내 딸이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 문화와 삶의 방식에 적응하길 바란다. 서울에서 길을 걷는 것이 내겐 여전히 고통스러울지라도 말이다. 왜냐면 나는 길에서 지나쳐가는 모든 아줌마들이 내 엄마일 수도 있고, 혹은 모든 아저씨들이 내 아빠일 수 있단 생각에 늘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년이 흘렀고, 특히 작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비로소 좀 더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출생 증명서의 내용이 맞는지, 내 엄마의 이름이 진짜 그녀의 이름인지 아닌지에 대해 결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시작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내 출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적어도 알게 되었으며, 혹은 아는 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작은 동네에서 시작되었다. 그 동네는 정말 기적적으로 높은 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여 여전히 건재했다. 아마도 내 생모가 많은 작은 공장들, 봉제공장 중 하나에서 일했을 수도 있는 곳이 바로 그 동네이다.
내가 태어난 그 조산소를 여전히 기억하는 노인들이 거기에 있었다. 거기는 한 다세대 주택의 1층이었고, 주변은 이제 아파트가 되었지만 그 주택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출생 증명서를 들고 조산소의 위치를 물어물어 찾아가는데, 그 동네의 노인들은 그 동네에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도록 도운 조산사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 조산사는 불행히도 몇 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산사의 여동생이 여전히 그 동네 살고 있고, 지역 노인들과 어울리며 지내고 있었다.
왜 우리의 엄마들은 우리를 키울 수 없었는가?
나는 생모와 함께 자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나를 돌보고 키웠다면, 우린 둘 다 낙인과 수치심의 삶을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신의 아이를 입양 보내야 한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왜 한국 해외입양인으로서 정체화하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우리는 어떤 감정들과 경험을 공유한다. 초국가적 입양인 중에서 우리 한국 해외입양인들은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집단으로 꼽힌다. 우리는 국가 간 입양인(intercountry adoptees)으로서 첫 번째 세대이며,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들의 국가로 돌아가기 시작한 첫 번째 세대이기도 하다.
미국의 국내입양의 선례들이 그러하듯이, 해외 한국 입양인들은 입양이 사적인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즉, 아이들을 키울 수 없는 생모들이 필사적으로 아이를 갖고 기르기 원하는 부부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내준 것이다.
또한, 입양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이다. 왜 우리의 생모들이 우리를 기를 수 없었는가? 왜 한국 정부는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 국가로 입양 보내면서, 동시에 낮은 출생률을 걱정하는가?
입양인이면서 여성주의자로서 내가 생각하는 입양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재생산권에 관한 문제이다. 여성은 자유롭게 자신의 신체에 관해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자유롭게 언제 그들이 원하는 가족을 구성할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섹스를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몸을 즐기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림, 과거를 용서하기 위한 나의 연속적인 시도
고등학교 졸업 후, 난 예술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항상 예술가가 되길 원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정말 사랑했다. 당시 나는 사진, 자화상, 또는 동물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추상적인 예술 작업보다 비유적인 예술 작업에 항상 매력을 느껴왔다.
예술학교에 다니는 동안, 스스로를 지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시각예술 학교에 1년 동안 다닌 후, 레이던 대학교에서 문학전공과 철학과 한국학 부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에서 나는 어떻게 사고하고 관찰하는지 배웠고, 이는 나의 예술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한 기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2006년~2007년 시기에 내 고유한 그림체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양어머니가 1998년에 돌아가시고, 내 삶의 파트너가 2006년에 죽고 난 뒤, 우울증 치료를 하기 시작할 때이다. 나는 종종 혼자 밖에 나가서 역사적인 도시인 헤이그 중심가를 돌아다니곤 했다. 헤이그의 몇몇 건물들은 후기 중세 시대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것이었다. 평일 낮 시간에 밖에 나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보기 위해서 걷고 또 걸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풍경과 사람들로, 살아있는 것 같은 큰 그림이나 소묘들 사이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일, 가족, 의무 등에 어떤 방식으로든 얽매어있을지라도, 어떤 순간순간들에는 자유롭기도 하다.
나만의 그림 스타일을 찾으면서, 한참 후에야 나의 궁극적인 소원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2010년, 나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을 밟기 위한 한국 정부의 장학생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초청되었다. 박사 논문을 쓰고 있을 때였다. 내 논문은 해외 한국 입양인들의 트라우마에 관한 것인데, 이는 나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한 주제였다.
많은 해외입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입양된 국가와 출생국인 한국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내가 입양된 국가와 태어난 국가 사이에서 항상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나서, 바로 학문적인 연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기 시작했다. 왜냐면 문화적 소외의 다른 측면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있는 태양, 구름, 그리고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로테르담이든 한국이든지, 화요일 아침에 거리를 자유로이 걸었다. 이것은 과거에 의해 짓눌려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하기 위한 연속적인 시도였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서 나의 일상과 꿈에서부터 나오는 인상들이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도록 가만히 두었고, 이것이 내 그림이 된 이미지이다. 내 작품의 방법들은 매우 직관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쓴 글과 비슷하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무의식적이고 잠재의식으로부터 만들어진 이미지들로 구축된 그림들을 그린다. 내 작품은 나 스스로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표현들을 담고 있다.
내 그림들은 기억, 일상의 사건들, 두려움과 희망과 같이 한 개인으로서 나의 뇌리를 사로잡는 것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 집단의 한 부분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 보면 우리는 개개인들이지만, 그 표면 밑에는 우리의 욕망, 생각, 감정, 꿈의 이미지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연결된다. 궁극적으로 다른 곳곳에 있는 모두를 위해서, 당신과 나는 같은 이미지를 공유한다.
내 작업은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각, 감정, 두려움, 가장 비밀스러운 욕망들을 힐끔 볼 수 있도록 시도한다. 왜냐면 우리가 자유 속에서 살려 하고 과거를 용서하려고 시도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비밀스로운 욕망을 갖고 있으며 그 욕망은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욕망이란, 비록 단 한 번일지라도 나를 있게 해준 나의 생모와 생부를 보는 것이다. (번역: 우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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