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편집자 주
벽과 지붕이라는 뼈대가 서고 미장하며 살이 붙으니 준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자각이 든다. 그래, 원래 이 건물은 카페로 쓰려고 짓던 것이었지. 과정에 몰입하다 보면 본래 목적이 쉽게 잊히곤 한다. 건축의 마무리가 어떤 형태인지 알지 못해 아직 막연하지만 익숙했던 건축물의 모양새가 드러나면서 이곳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카페에 커피는 있어야 하지 않아?
카페라면 모름지기 커피를 팔아야 하지 않을까. 그전에 우리는 비전화(非電化, 전기와 화학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카페에서 무얼 하고 싶었지? 갈수록 건축을 하면서도 이곳의 쓰임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나의 건축물을 함께 지었지만 저마다 여기서 하고 싶은 일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각양각색이다. 경량 목구조의 스트로베일 하우스라는 점은 그 누가 봐도 명확한 특징이었지만, 그 배경을 전제로 구현하고 싶은 분위기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차이가 뚜렷했다. 여럿이 만드는 장소인 만큼 의견을 통일하기 쉽지 않았다. 전기와 화학물질을 최소화한 공간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한계 역시 분명했다.
그래도 어쨌든 커피는 있어야 해. 거창한 방향성을 설정할 수 없다면 구체적인 사안부터 접근해보기로 했다.
비전화공방은 여러 발명품을 개발해왔는데, 대중적인 상품으로 인기를 얻은 것 중 하나가 핸드 로스터기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로스터기 상부에 뚫려있는 구멍으로 생두를 넣은 뒤 불로 직접 가열해 사용하는 방식이다.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 있어 안전하고, 앞부분 뚜껑이 분리되어 청소도 간편하다. 앞부분에 공기구멍이 뚫려있어 골고루 열이 전달되는 점 또한 장점이다.
비전화 로스터기 익히기
용법은 쉽고 간단하지만, 잘 쓰는 일이 늘 어렵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생두를 볶아보며 감각을 익히는 게 중요했다.
로스팅은 오감을 이용하는 작업이었다. 나무 손잡이 앞 알루미늄에 살짝 손가락을 대고 있다 뜨거워서 더 만지기 어렵다 싶을 때쯤이 로스터기가 적당히 달궈져 좌우로 흔들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눈으로는 로스터기를 좌우로 흔들면서 가스 불의 어느 지점을 스치면서 지나가게 할는지 지켜보고, 귀로는 타다닥 하고 생두 균열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균열이 시작되면 코로는 향을 눈으로는 생두의 색을 살피며 언제까지 볶을지 판단한다.
카페 벽면에 그림이나 전시용으로 놓여있던 원두를 매일 같이 접하는 일은 꽤나 근사했다. 로스팅을 하고 나면 가스레인지 위 환풍기는 물론이고 온몸에 은피(silver skin, 커피 생두를 감싸고 있는 얇은 막으로 로스팅 과정 중 생두가 수분을 방출하면서 벗겨진다)가 내려앉지만, 그래도 기분은 꽤 좋았다. 한 번에 서너 잔가량이 되는 생두를 볶는데, 볶은 후에는 이번 로스팅을 시음해 주겠노라며 동료들이 몰려드는 일도 즐거웠다.
사실 모든 과정이 시행착오였다. 여러 종류의 생두를 사서 배전을 달리 해보고 비율에 차이를 두어 섞어보기도 하면서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입맛이란 게 어찌나 편차가 큰지 마신 뒤 해주는 답변들이 극과 극을 달려 가끔은 시음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한 모금씩만 마셔도 하루 섭취가능 카페인 량을 훌쩍 뛰어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생두도 욕심껏 유기농에 공정무역 커피를 고른 건 차라리 선택지를 좁힐 수 있어 다행이었다. 미세하게 핸드 그라인더로 입자 굵기를 조율하는 일은, 이 위치에는 어느 길이와 두께의 나사못을 쓰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잘 연출된 무대 같은, 사이폰
추출기구도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 사이폰을 선택했다. 사이폰은 하부 플라스크에 물을 데우면 위로 솟구쳐 올라 상부 로드의 분쇄커피를 우려내는 방식으로, 드립커피에 비해 누가 커피를 내려도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추출과정을 보는 즐거움이 꽤 컸다.
사이폰이 테이블 위에 놓이면 그곳이 어디든 실험실이 된다. 물이 담긴 하부 플라스크에 열을 가하다 물이 끓으면 상부 로드를 바로 꽂아 하부 플라스크를 진공상태로 만든다. 그러면 수증기가 팽창하면서 물을 관을 통해 밀어 올리는데, 이 뜨거워진 물이 로드의 커피를 적신다. 하부 플라스크에 계속 열을 가하는 동안에는 수증기 응축으로 진공상태로 머물기 때문에 물이 로드에 머물다가 불을 끄면, 플라스크 압력이 낮아지면서 커피를 추출한 물이 다시 하부 플라스크로 내려오게 된다.
증기압을 이용하는 진공식 추출법을 사용하는 데다 나무막대로 커피와 물을 부드럽게 섞는 등의 행위가 흥미로워 보이기도 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비전화카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을 연출해주기도 해 사이폰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아침마다 커피를 일일이 볶고 키질을 하며 커피껍질을 날린 뒤 맷돌을 갈듯 원두를 분쇄해 알코올램프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 커피가 추출되길 기다리는 일은 하나의 의식 같았다. 특히 램프의 불을 끄고 로드에서 물이 관을 타고 빠르게 내려오는 막바지에 자글자글 짧은 거품 소리를 내는 순간이 가장 좋았다. 이렇게 내려진 커피를 잔에 담으면 무사히 의례를 마친 듯 안심이 됐다.
비전화카페에서 들리는 소리는
어느 카페에 들어가든 익숙하게 들리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웅웅대는, 포터필터를 그룹헤드에 왈그락달그락 장착하는 그런 소리가 비전화카페에는 없었으면 좋겠다. 카페에서 대접할 커피를 준비하며 로스터기를 흔들 때마다 생두가 알루미늄 통 안을 또르르 구르고, 키질을 할 때면 아주 먼 곳에서부터 들리는 파도 소리가 싸르륵싸르륵 귀에 맴돌고, 학창시절 쉬는 시간이면 교실 뒤편으로 가 돌리던 연필깎이처럼 다르륵다르륵 원두가 분쇄되는. 그런 아기자기한 소리들로 가득 찬 비전화카페의 모습이 선명도를 더해간다.
이렇게 조금씩 비전화카페에 다가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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