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대학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 줄줄이 폐지된 총여학생회
작년 성균관대 총여학생회(이하 총여) 폐지 총투표가 발의되던 즈음, 아빠가 말했다. “여기서 지면 너 때문에 총여가 없어지는 거야.”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 총여가 사라지는 걸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딸을 괴롭게 만들려고 질책하듯 한 말은 아니었다. 아빠는 우리의 총여 재건 운동과 폐지 총투표 거부 운동을 내내 지켜보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준 지지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에 밤마다 울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등교해 필사적으로 총여 폐지를 막아달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돌렸다.
마침내 총여가 줄줄이 폐지되고 나서는, 연세대 총여의 제안으로 연세대와 동국대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그 민주주의는 틀렸다” 포럼과 집회를 열어 총여가 없어졌어도 총여를 살리는 운동에 참여했던 주체들은 건재하다는 걸 알리고자 했다.
올해 3월에는 대학 페미니스트들을 모아 ‘3·8 여성의 날 마녀 행진’을 개최했고, 5월부터는 대학의 경계를 넘어 페미니스트들을 연결하는 범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의 창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이 숨 가쁜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죄책감이 동력이 되었다. 다만 그 과정을 함께한 동료들 덕분에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후보가 없던 총여학생회에 9년 만에 입후보하겠다고 나서서 결과적으로 총여를 없앤 ‘여자애’가 아니라, 총여 정치의 2막을 여는 <유니브페미>의 창립 멤버이다.
대학 내 ‘미투’에 대해 누군가는 응답해야 하지 않나?
2016년 5월, 아무도 나오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강남역 10번 출구에 도착해 있었다. 이미 붙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속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장을 쓰고 목례를 하며 여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세상, 반드시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만 이런 결심을 하는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그 마음은 아주 작고도 큰 것이어서, 이후의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했다.
당장 학생회장으로 있던 학과 내부에 여성주의 책모임을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꽤 많았고, 방학 동안 이론서 한 권에 독립영화 한 편을 보았다. 과방에 무상 월경대를 비치하는 사업도 해보고, 여성학 강연도 개최했다. 다음 해에는 인권에 대해 폭넓게 다루던 학회의 1년 커리큘럼을 욕심껏 여성주의 도서로 채웠다. 학내 여성주의 모임이 다수 생겨나고, 페미니즘의 역사부터 계급, 생태, 퀴어 이론, 장애학, 평화학 등 다양하게 관심 범위를 넓혀갔다.
미투 운동이 시작된 2018년에 이르러, 페미니즘은 대학을 넘어 널리 퍼졌다. 미투 운동은 세상을 흔들었고, 수많은 여성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목소리를 냈다. 그중에는 내가 다니던 대학의 전(前) 교수님도, 그와 연대한 재학생과 동문들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가해 교수에 대한 합당한 처벌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대표자들은 성폭력 가해 사실 자체를 의심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었지만, 그만큼이나 이에 대한 반격(백래시, backlash)도 거세졌다. 대학 내 여성주의 모임이 구성원들의 졸업을 앞두고 하나둘 문을 닫으려던 시기의 학생회들은 ‘미투’나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기조차 부담스러워했다.
재판으로 간 미투 운동은 1심에서 피해 교수가 승소했지만, 2심이 진행 중이었다. 그 결과까지 봐야만 연대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태평한 학생회를 대신해서 목소리를 낼 ‘성균관대학교 위드유특별위원회’(이하 위드유특위)가 발족했고, 나는 공동대표가 되었다. 지속적인 요구에도 1학기가 끝날 때까지 학교와 학생회는 시간을 끌며 변화하지 않았고, 위드유특위는 ‘6·5 백래시 박살대회: 결국엔 우리가 이긴다’라는 제목으로 학내 집회를 기획했다.
이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또 여기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9월에는 약 9년 동안 회칙상으로만 존재해온 총여를 부활시키기 위해 총여 재건 모임인 ‘성균관대 성평등 어디로 가나’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누군가는 미투에 대해 응답해야 한다고 믿었고, 우리가 찾은 답은 총여였다.
총여 재건 활동은 순조롭지 못했다. 입후보 희망자가 나왔으니 총여 회칙에 따라 총여학생회장 선거를 진행하라고 요구했더니, 그에 대한 반응으로 ‘총여 폐지 총투표’가 돌아왔다. 총투표를 발의한 대의원이 누구인지 열람조차 불허된 상황에서 사유도, 대안도, 세칙도 없는 초유의 학생 총투표가 열렸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투표 거부[보이콧] 운동을 전개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3개 국어로 발송되는 투표 독려 문자와 1분에 수차례씩 외치는 투표관리위원들의 독려 구호를 이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표 마지막 날 투표율은 44.8%로, 개표를 할 수 없게 50% 미만으로 만들고자 했던 우리의 승리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별다른 사유 없이 하루가 연장되었다. 총 나흘간의 접전 끝에 투표율 52% 중 84%의 찬성으로 총여 폐지안은 가결되었다.
여러 학교의 총여가 이처럼 폐지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만나게 된 타 대학의 페미니스트들과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잘 싸웠다’, ‘그 민주주의는 틀렸다’라는 제목의 집회를 통해 끊임없이 대학 내 페미니즘 정치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말하려 했다. 또한 범 대학 페미니스트 연대에 대한 수많은 이들의 열망을 확인했다. 이제 더 가까이 그 주체들을 만나볼 차례였다.
훗날 우리는 어떤 페미니스트로 기억될까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를 고민하는 연합 세미나’를 홍보하기 위해 포스터를 들고 우선 근처 다섯 군데의 대학을 무작정 찾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포스터 원정을 마치고 2주가 지나자 10여 개 대학에 다니는 30여 명이 모였고, 나는 월·화·목요일마다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세미나를 진행하게 되었다.
요일별 세미나에서는 내가 경험한 총여 운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양한 대학 현장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활발하게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학생회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정받고 있는 여자대학교의 사정, 적극적인 여성주의 활동 자체가 쉽지 않은 신학 대학의 사정, 여성주의 모임을 결성하는 것조차 어려운 지역 여남공학 대학의 사정을 듣고 있으면 그동안의 내가 꼭 우물 안 개구리처럼 여겨졌다. 내게 약 3개월 동안의 연합 세미나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가로지르는, 혹은 포괄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픈 세미나의 주제는 ‘1990년대 대학 반성폭력 운동사’였고 나는 토론 거리 중 하나로 이런 질문을 남겼다. “90년대 영페미의 학내 활동이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으로 기억된다면, 훗날 우리는 어떤 페미니스트로, 어떤 운동으로 기억될까?” 재미있는 의견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대답은 ‘차별금지 학칙 제정 운동’ 세대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의심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도전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하는 욕심이 동시에 드는 순간이었다.
세미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운 좋게도 첫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의 인큐베이팅룸 ‘샘’ 무상 입주 단체로 선정된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한 칸짜리 책상이었지만, 의미는 그 이상이었다. 공용 공간이나 회의 공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든든한 울타리를 얻은 것이자, ‘공식’의 자리에서 밀려난 대학 페미니스트들이 숨을 고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버팀목이 생긴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페미니스트 동료 선생님들의 존재도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유니브페미, 내가 꿈꾸는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는…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7월부터는 각 세미나 팀에서 <유니브페미>의 회칙과 강령을 함께 만들 구성원들을 모집하고, 발기인 가입도 받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100명이 넘는 발기인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은하계 모임과 오로라 모임은 매주 만나 회칙과 강령 초안을 제정하는 데 집중했다. <유니브페미의 ‘유니브’가 university(대학)뿐 아니라 universal(보편의), universe(우주)라는 뜻도 있어서, 회칙 제정 모임과 강령 제정 모임의 이름이 각각 ‘은하계’와 ‘오로라’가 되었다.>
한 단체의 체계와 지향을 정하는 것은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라 감을 잡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하나하나 검토하며 합의를 넓혀가는 시간이 소중했다. 아래는 유니브페미의 지향과 의지가 담긴 초대 강령 초안의 일부이다.
<이성애 규범과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고 평등한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페미니즘 정치가 필요하다. 젠더를 기반으로 사회를 해석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페미니즘 정치에만 주어져 있다.
대학의 변화 또한 페미니즘 정치에서 시작된다. 페미니즘 정치는 차별과 폭력의 단순한 지양을 넘어 실질적인 평등을 요구함으로써 일상을, 대학을, 나아가 사회를 바꿀 것이다.
유니브페미는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로서 대학 페미니즘 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다. 우리는 대학의 경계를 가로질러 서로의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결될 것이다. 함께 모여 싸우는 우리가 존재하는 한, 머지않아 대학에서 페미니즘은 상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학을 건설할 페미니스트 공동체다.>
지난 8월 11일에 마련했던 발기인 집담회 ‘U Need Femi’에는 약 30여 명의 발기인이 참석해 그동안 은하계 모임과 오로라 모임에서 만든 회칙과 강령 초안을 검토하고, 2019년 하반기 사업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1부 발제를 마치고 2부 ‘우리가 꿈꾸는 페미 공동체’라는 순서에서는 “나는 ~하려고 유니브페미에 가입했다”라고 쓰인 카드를 각자 채우고 발표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다양한 이유와 다짐에 모두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로 다른 대학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아무리 가져도 넘치지 않는 것이어서, 오후 2시에 시작된 이 날 행사는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새로운 대학을 건설할 페미니스트 공동체 만들기
집담회 이후 유니브페미는 9월 7일 창립총회를 앞두고 바쁘게 지냈다. 2학기가 시작된 9월 첫째 주에는 창립총회 포스터와 대표(단) 선거 후보자 포스터를 발기인이 있는 학교들에 부착하기 위해 다시 원정을 떠났다. 비록 지금은 학교 바깥에 있지만, 대학 페미니스트들이 스스로를 대의할 페미니스트 대표를 선출해 다시 대학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나아갈 것이다.
하반기에는 대학 내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볼 계획이다. ‘미투 이후의 대학’이라는 주제로 2018년 이후 대학 당국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학생회 공약은 어떤 것들이 포함되고 있는지 조사하고, 성평등한 대학을 위한 제도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 대토론회를 열어보는 것이 목표다. 연말에는 ‘대학 성평등지수 프로젝트’의 완결로서 대학별 성평등지수를 공개하고 연례 프로젝트로 발전시켜나가고 싶다.
창립 총회의 제목은 ‘중력을 넘어서’(Defying Gravity)로, 뮤지컬 <위키드>의 OST 제목이기도 하다. 지난 3월 마녀행진에 이어 백래시라는 중력을 넘는 마녀들의 반란을 표현하려 했다. 불온하다는 명목으로 처형대에 세워졌고, 세워지는 순간 웃음거리가 된 대학 내 ‘마녀’들과 함께 “마녀사냥에도 마녀는 죽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이번에는 행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상을 바꿀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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