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귀퉁이 목조건물, 비전화카페 오픈 준비기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선택의 연속, 비전화카페 개점

이민영 | 기사입력 2019/09/23 [19:45]

서울 한 귀퉁이 목조건물, 비전화카페 오픈 준비기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선택의 연속, 비전화카페 개점

이민영 | 입력 : 2019/09/23 [19:45]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편집자 주

 

비전화카페에서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은 설레면서도 꽤 부담스러웠다. 이 건축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그리고 그 안에서 복작대며 작당하는 모습에 귀 기울여온 애정 어린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부족하더라도 그 과정을 함께 하자고, 우리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동료라고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만 혹여 우리의 부족함으로 손님들이 비전화의 장면들에 실망하거나 희망을 저버리지는 않을까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 비전화카페는 건축할 때부터 조명으로 쓸 초와 램프를 위한 옴폭한 벽면을 준비해두었다. 흙으로 미장한 벽면에 반사되는 빛이 멋스럽다.     © 비전화공방서울

 

비전화제작자 중에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 이는 제법 있었지만 카페를 운영해본 이는 없었다. 게다가 비전화(非電化, 전기와 화학물질이 없는) 카페 아닌가. 비전화의 공간을 영유해본 경험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카페 하면 기대하는 최소한은 갖춰두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비전화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로 빠져들 듯 환상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을 선사하고 싶었다.

 

예상치 못한 복병, 고집과 타협 그 어디쯤의 선택

 

매 순간이 선택이었다. 전구를 대신해 어둠을 밝혀줄 밀랍 초와 램프를 구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등받이에 기대 작업하기 좋은 책상과 의자가 아니라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들이 모여 앉을 것만 같은 낮고 작은 책걸상을 만들었다. 나무가 아닌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지만 번들거리는 코팅제 대신 얇고 여러 차례 기름을 먹여 오래도록 닳아 편안한 느낌을 냈다. 아침저녁으로 바닥을 쓸 근사한 빗자루도 구해 벽 한 켠에 기대어 놓았다.

 

타협이 필요한 지점도 있었다. 상시적으로 식음료를 준비하는 장소인 만큼 불 사용만큼은 안정적이어야 했다. LPG와 가스레인지는 기성 제품을 구매하기로 했고, 설치 역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뒤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안전성 평가를 받았다. 이 과정 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소규모 업소용 가스레인지 중 건전지형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것이다.

 

▲ 비전화카페 입구 옆면에 세워둔 책꽂이와 빗자루     © 비전화공방서울

 

가정용이 아닌 이상 가스레인지 대부분이 점화 시 필요한 최소전력 수급을 위해 플러그를 꽂아야만 하는 제품이었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 가스레인지를 쓰고 영업을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듯 눈에 띄게 파워코드 선 타입 여부를 판매 시 안내하는 곳은 드물었다. 상점별로 전화 문의하거나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구형 모델이나마 찾으면 현행 규정에 적합하지 않아 영업용 허가를 받을 수 없는 등의 상황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가스레인지 구매와 설치에만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언제부턴가 플러그가 달린 생활용품들이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기 전까지 몰랐다.

 

식재료도 가까이에서, 우리 손으로

 

식음료를 정할 때 가장 혼란스러웠다. 대부분의 선택이 그렇듯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다. 가능하면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재료를 쓰면서도 비전화카페만의 특색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마침 비전화카페가 위치한 서울혁신파크 내 목공동 앞 커다란 모과나무에서 모과가 무르익고 있었다. 서울혁신센터에 이 모과나무에 농약을 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양해를 구해 잘 익은 모과를 땄다. 딱딱한 모과를 박박 씻고 나박썰어 유기농 설탕에 재워 청을 쟀다. 얼마간의 숙성기간을 거치면 달달한 향의 모과차를 맛볼 수 있으리라.

 

인천 볼음도에서 반농반X의 삶을 살고 있는 제작자가 키우는 유기농 고구마도 공수해왔다. 비전화농장에서 재배하고 있는 작물들로 채수를 내고 받아온 호박고구마와 밤고구마를 적절히 배합해 한 끼 따끈한 고구마스프를 끓였다. 역시 비전화농장에서 바로 딴 잎채소 모둠 위에 작년에 걷어 말려둔 깨와 땅콩 그리고 몇몇 견과를 더해 비전화 착유기로 갓 기름을 짜내 뿌리면 별다른 첨가물 없이도 신선하기 그지없는 샐러드와 드레싱이 완성됐다.

 

우유나 버터 없이 고구마만으로도 부드럽고 묵직한 스프와 아삭함을 도무지 잃을 수 없는 샐러드의 반전 식감이 제법 잘 어울렸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기름의 향까지 얹히니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손으로 펌프질하는 방식으로 기름을 짜내는 비전화 착유기. 누구나 적은 힘으로도 기름을 짤 수 있다. ©비전화공방

 

근거리에서 식재료를 운송하는 것은 보관방법이 제한적인 비전화카페의 숙명이기도 하다. 높든 낮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우니 가능한 빠르게 수급하는 방식으로 위험부담을 줄였다. 기대 이상으로 신선한 재료를 구하기가 까다로웠다. 착유를 하려면 생 땅콩을 바로 볶아야 향과 맛이 깊은 기름을 짤 수 있는데, 시중에는 볶은 땅콩을 주로 판매했다. 어디서든 쉽게 바로 살 수 있는 곳이 도시인 줄 알았는데 유통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들은 얻기 어려웠다.

 

지금 여기에 다다른 선택 그리고 시작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15평 남짓의 카페. 그곳의 터를 잡고 짓고 온기를 채워가는 청년들. 그리고 그곳에서의 머무름을 선택한 나. 무언가를 해나가는 방식도 관계도 역할도 모두가 낯선 것투성이라 제약은 선뜻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숨 고르고 들여다보면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을 감사하게도 받았고 이제야 그 입구에 들어선 것이기도 하다.

 

정신없이 속 시끄러운 나날을 보내다가도 차분하게 내가 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살핀다. 한 사람의 일생은 선택이라는 수많은 점이 만들어낸 선과 면이고, 어떤 선택은 이후 가져올 결과를 냉철하게 분석한 후 설계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선택은 그저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이후들을 수용하겠다는 결단만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분명한 건 그 선택은 내가 만들어온 수많은 점선면이 그려낸 상이자 앞으로 만들게 될 내 삶이란 형체의 점선면 중 하나라는 점이다.

 

▲ 강화에서 특산물인 속노랑고구마를 유기농법으로 재배하고 있는 비전화제작자. 비전화카페에 스프를 만들 고구마를 납품한다. 그는 일주일에 3~4일은 농사짓고 그 외 시간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일상을 실험하고 있다. ©촬영: 조정훈

 

그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어우러지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비전화카페는 보이지 않는 전기로 층층이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이 시대란 성벽에 작지만 단단히 뿌리 내린 풀 한 포기 아닐까. 그렇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들이 그 성벽을 둘러싸 잠시나마 숨구멍을 틔울지 갑갑함에 말라 죽을지 아니면 씨앗이 퍼져나가 성벽을 뒤덮고 결국엔 그 성벽을 무너뜨릴지 속단하기엔 갈 길이 멀다.

 

서울 한 귀퉁이에 지어진 볏짚과 왕겨로 채워진 목조건물 하나. 이 카페가 어떤 사람들과 어떤 무늬의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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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심 2019/09/26 [17:39] 수정 | 삭제
  • 유통의 테두리 밖의 것들은 대도시가 더 얻기 어려울 수도있겠네요. 카페 직접 만드는 얘기 좀 느리지만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첫 손님이 누굴까 궁금해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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