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좋아하는 외국인 여성’에서 ‘신뢰받는 교사’로<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슬: 장애통합유치원 교사, 프랑크푸르트※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슬 이주 이력서
이주 9년 차. 2007~8년 라오스 배낭여행 2주, 네팔에서 자원 활동 2주 2009년 ‘캠프 힐’ 남아프리카공화국 공동체에서 1년간 자원 활동 2011년 자원활동가 비자를 받아 독일 입국, 장애인공동체에서 1년 생활 2012년~2015년 ‘장애인 교육 돌봄사’(Heilerziehungspfleger) 직업교육 2015년 9월 독일인과 결혼 2016~2018년 발도르프 교육 기반 마을공동체에서 장애인 생활보조교사로 근무 2018년~현재 프랑크푸르트 소재 장애-비장애 통합유치원에서 근무
대학 졸업을 앞둔 슬은 어느 국제아동구호 기구의 채용 마지막 단계인 영어 면접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슬은 그때 영어 실력을 높일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경제 형편이 넉넉지 못해 일반적인 어학연수는 갈 수 없었던 그에게, 한 친구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캠프 힐’이라는 공동체로 봉사활동을 가보라고 했다.
‘캠프 힐’(Camp Hill)은 장애인-비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생활공동체로 전 세계 곳곳에 100여 개가 있는데, 6개월~1년가량 공동체 안에 살면서 숙식을 제공받고 운영을 도와줄 자원봉사자를 상시 모집하고 있었다. 슬은 그중에도 비자 수속 비용이 저렴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캠프 힐로 가게 됐다.
“공동체에서 밤낮으로 고된 일을 하는데도 일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 전엔 장애인과 같이 사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고, 만나본 적도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캠프 힐에서 만난, ‘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인간적으로 참 흥미로웠고 이들과 친구가 되어 평범하고 재밌게 살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외국인인 제가 오히려 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들도 있었어요. 서로 뭔가를 주고받는 연대가 있었어요.”
캠프 힐은 독일계 오스트리아 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을 바탕으로 세워졌는데, 인지학에 따르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신체를 떠나서 정신적인 존재이다. 장애는 재난이나 불행이 아니라 인간의 또다른 존재 양상이며,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기능이나 능력상의 한계일 뿐이라고도 한다. 슬은 이러한 교육 사상에도 크게 매력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가면 특수교육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길 정도였다.
당시 캠프 힐에는 독일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많았는데, 슬은 그중 한 사람과 사귀게 됐다. 둘은 함께할 방법을 찾다가 막 독일 대학에 입학한 남자친구보다는 대학 졸업 후 소속이 없었던 슬이 움직이기로 했다. 외국행을 막연히 꿈꾸긴 했지만 구체적인 계획, 특히 독일로 가는 것은 생각해본 적 없었던 슬의 독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로운 진로 ‘직업교육’: 장애인 교육돌봄사
독일인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평소 결혼에 별 뜻이 없었던 슬은 정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자기 힘으로 비자를 받고 싶었다. 캠프 힐과 유사한 이념으로 운영되는 독일 헤센주의 한 장애인공동체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조건으로 1년짜리 자원활동가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
새로 발견한 잠재적 진로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잘한 선택이었지만, 슬은 이때를 ‘거의 매일 울던 힘든 시기’로 회상한다. 아주 기초적인 독일어밖에 할 줄 모르는 상태로 일을 하다 보니 다른 독일인 직원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그들은 ‘도움보다 짐이 되는’ 슬을 외면하고 배제했다. 감정 노동의 고충을 잘 아는 지금은 좀 이해가 가지만, 당시에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자원활동가 생활이 끝나갈 무렵, 공동체 대표는 슬에게 특수교육 학사 과정을 추천했다. 하지만 등록금이 드는 사립대였고, 당시엔 대학 수업을 들을 만한 독일어 실력이 못 되어 그쪽은 접었다. 사실 일반적인 한국 유학생이나 이주민들이 밟는 ‘워킹홀리데이 비자->어학/입학 준비 비자->학생비자’ 수순을 거치려면 독일에서 2~3년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여유자금이 있어야 가능한데, 슬에겐 그만한 돈이 없었다.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배우고 자격증도 따서 바로 취업할 수 있는 ‘직업교육’(Ausbildung)으로 눈을 돌렸다.
슬은 자신이 근래에 탐색한 두 가지 진로, 즉 인지학 기반의 발도르프(Waldorf) 교육과 장애인 돌봄이 접목된 프로그램을 찾아냈다. 바로 ‘장애인 교육돌봄사’(Heilerziehungspfleger)다. ‘Heilerziehung’은 치유교육라는 뜻으로,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과 유사한 개념 직업교육 과정 중 하나였다. 슬은 남자친구가 대학을 다니고 있는 드레스덴 지역의 한 특수학교에서 직업훈련생(Auszubildende)으로 3년 동안 월급(600~750유로 선)을 받으며 일하게 되었다.
학교와 직장을 병행하는 ‘듀알레 아우스빌둥’(Duale Ausbildung) 과정을 택했기에 한 달에 1주일 정도는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로 출석했다. 학교 수업의 비중이 크지 않으니 이론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현장에서 적용할 만한 내용, 졸업 즈음엔 자격증 시험 대비가 주를 이뤘다. 학구열이 높은 슬에겐 직업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다. 대신 직장인 학교에서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훈련생으로서 수행해야 할 프로젝트 과제가 종종 있었어요. 수업을 직접 진행해본다거나, 한 달 동안 한 아이와 붙어서 해야 하는 활동 등. 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기획하고 과정을 기록하고 마지막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형식이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책도 능동적으로 찾아보며 깨달은 게 많았어요. 멘토 역할을 한 선생님들도 도움을 많이 줬어요.”
외국인으로서 언어적, 문화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슬은 3년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취직을 수월하게 하고자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했다. 슬이 취득한 국가공인자격증으로 취업할 수 있는 곳은 광범위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같은 보육 시설, 특수학교 및 장애인 시설, 청소년 센터, 아동병원 등에서 일할 수 있었고, 일자리도 많았다. 독일에서 수요 대비 공급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직군이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슬은 남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1시간여 떨어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했다. 발도르프 학교와 장애 아동·청소년 생활관, 마을의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는 농장과 가게들이 모여있는 한 대안 생활공동체(Lebensgemeinschaft)에 남편과 슬 모두 일자리를 얻었다.
Tip. 독일의 유아교육. 장애인 돌봄 분야에서 일하려면
자격증 종류에 따라 ‘유치원교사,’ ‘어린이집교사’ ‘특수교사’ ‘장애인 활동보조사’ 등이 명확히 나뉘는 우리나라에 비해 독일에서는 유아교육·보육·돌봄 관련 교육과정과 직업 명칭(Erzieher, Kindergärtner, Kinderpfleger, Heilerziehungspfleger)이 매우 다양하고 서로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슬이 장애인 교육돌봄 전공자로서 영유아부터 성인까지 담당할 수 있고, 근무지도 특수학교, 유치원, 생활관을 넘나들 수 있는 배경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3~5년간 직업교육 및 실습을 거쳐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최근 들어서는 유아교육학(kindheitspädagogik) 학사과정도 생겨났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유치원이나 보육 시설에 취직하는 경우도 있다.
유아교육 및 돌봄 관련 직군은 취업 전망이 밝다. 긴 교육 기간에 비해 임금이 낮아 (초임의 경우 세전 월 2,400유로 선) 새로운 교육생 유입이 적지만 현장을 떠나는 은퇴자는 계속 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실습과 학교를 병행하는 프로그램을 더 늘려 교육 기간을 2~3년으로 줄이고, 교육비 전면 무료화 및 훈련생 임금 인상, 다른 EU 국가로 공인자격 확대 등을 통해 인력을 더 확보하려 노력 중이다.
훈련생(Ausbildende; Azubi)은 납세자인 동시에 학생 신분으로 대중교통 요금이나 입장료 할인 혜택을 받는다. 외국인들은 대개 추가로 어학 능력(B1~B2)을 증명해 직업교육 과정에 입학한다. 인력 부족 직군이므로 비자를 받기 상대적으로 쉽다.
직장 근무와 병행하거나 휴직/퇴직 중에 추가로 인접 영역의 다른 온/오프라인 교육을 받아 자격을 넓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고려하면, 계발할 수 있는 진로는 무궁무진하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예술 치료사, 사회복지사, 아동발달·심리검사자 과정을 추가로 이수하고 더욱 다양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첫 직장: 마을공동체 내 발도르프 장애아동 생활보조교사
슬은 6~19세 장애 아동·청소년들이 6~8명이 모여 사는 숙소에서 생활보조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집을 떠나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역할로, 아침에 깨워 학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생필품이나 옷을 같이 사러 가고, 목욕을 같이 하는 등 아주 개인적인 일들도 함께하기에 아이들과 ‘심적인 거리가 매우 가까운’ 일이었다.
일상생활을 돕는 역할이라 수업을 직접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곳곳에서 그간 배운 인지학 기반의 발도르프 교육을 적용할 기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감수성 향상을 위해서 절기나 기독교 기념일에 맞춰 그림 그리기 활동을 하고 공동 공간에 장식 테이블을 놓는 일을 했는데, 평소 영성에 관심이 있고 손으로 뭔가 만들기 좋아하는 슬에게 즐거운 작업이었다.
“저는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을 전부 신봉하진 않아요. 문제적 발언도 많거든요. 그럼에도 발도르프 교육이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믿게 됐어요. 예를 들어 오이리트미(Eurythmy;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리듬이라는 뜻. 언어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이 어우러지는 소리와 율동)를 하는 아이들 내면에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음악·미술·연극·수공예 등 예술 활동으로 신체와 정서 발달을 돕는 게 발도르프 교육의 특징이에요.”
하지만 일견 평화로운 대안 교육 현장에도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있어서 슬은 2년 반 만에 이곳을 그만두었다. 당직을 포함해 교사 4~6명의 4교대(오전, 오후, 저녁 3교대+야간 교대 근무)로 운영되는 시설이어서 기본적으로 업무 강도가 셌다. 기본 3교대 중간 중간엔 2시간 가량 휴식이 주어졌지만, 토막 난 시간으로는 온전히 쉴 수가 없어 결국 새벽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연이어 근무하는 것 같았다. 교사 한 명이라도 병가를 내면 다른 이들에게 초과 근무의 부담이 감에도 이에 대한 보상이 부족했다.
봉사와 헌신, 요즘 말로 ‘열정 노동’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에서 일하며 번아웃(burnout) 됐다. 젊은 세대 교사들은 대개 오래 근속하지 못하고 떠났다. 슬도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그만두고 6개월가량 한의원에 다니며 쉬어야 했다.
두 번째 직장: 대도시의, 노동조합이 있는 유치원
소규모 대안 공동체의 맹점을 깨닫고, 또 시골 생활에도 갑갑함을 느낀 슬은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인근 대도시인 프랑크푸르트로 출퇴근하면서 유치원교사로 일하기로 한 것이다. 번아웃 경험을 상기해 주 30시간짜리 시간제 근무(Teilzeit)를 택하기도 했다. 월요일 포함, 3일 휴일 체제로 일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이곳은 장애·비장애 유아가 같이 다니는 통합유치원으로, 3개 반의 각 15명 정원 중 5명이 장애아동인데 ‘통합이 필요한 아동’(Integrationskinder)이라고 부른다. 의학적 장애 판정이 아니라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한가’가 기준이다. 생활보조교사로 일했던 지난번과 유치원교사인 지금, 업무 내용에 차이가 있다.
“유치원은 교육의 공간으로, 아이들이 지금 그 나이에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을 제공하는 곳이에요. 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살피면서 특정 부분에서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면 교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계획하고 실행해요.”
아이들은 또래 관계에서 배우고 자란다는 독일 교육 철학이 반영돼, 전형적인 ‘수업’보다는 야외에서 아이들끼리 뛰노는 시간이 많다. 9시 반은 아침 식사 시간인데, 아이들이 아침을 먹을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 선택한다. 11시 반까지는 자유 놀이 시간. 원하는 아이는 선생님과 장을 보러 가거나 빵을 구울 수도 있다. 발도르프 대안 교육과 비교해서 예술 활동의 비중이 좀 적지만 전문 파견교사가 와서 진행하는 생활치료, 물리치료, 놀이운동 교육, 조기 특수교육 시간이 있다.
직장인으로서 느끼는 유치원 노동환경에 대해 물으니, 처음에 적응이 안 될 만큼 이전 직장과는 정반대였다고 한다. 교사들은 불과 1~2분 초과 노동도 일지에 철저히 적고, 그렇게 초과 노동시간이 쌓이면 부담 없이 대체 휴가를 쓴다. 또, 분기마다 이 유치원이 소속된 교육재단 직원 총회가 열리는데, 그때 노동조합 간부들이 나와 새로 바뀌는 재단 제도에 대해 상세히 알려준다고 한다. 평직원들의 건의사항을 접수해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빠른 편. 외부 전문가를 초빙하는 등 교사들에게 재교육 기회도 많이 준다.
직무에 대한 저평가, ‘외국인 교사’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슬은 유아 교육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고 노동 강도나 전문성에 비해 임금이 턱없이 적은 현실이 못마땅하면서도, 자기 일에 사명감을 갖고 또한 즐긴다.
“본질적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관계를 맺는 일인데, 그걸 실감하는 순간에 교사로서 희열을 느껴요. 아이라는 존재는 정말 신기하고 특이해요. 온갖 인간군상을 매일 마주하는 셈이죠. 부담감, 책임감도 많이 느껴요. 사람에게 만 3~6세는 중요한 시기인데, 그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내’가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니까요.”
이렇게 직업적 만족감을 말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다. ‘외국인임이 분명한 외모’로 인해 슬을 불신하는 학부모들이나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들 앞에서 남들보다 더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임해야 ‘보통의 교사’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독일인 동료들은 슬이 느끼는 이질감과 선입견에 공감하지 못했다. 지금보다 독일어가 더 유창해지고 시간이 흘러도 외국인 교사로서 슬의 ‘자기 증명’ 과제는 계속될 것이다.
슬은 장애인돌봄사 그리고 유아교육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보다 확고해지면, 앞으로 발도르프 교육가 자격을 추가로 갖추고 싶다. 독일에 온 이래, 늘 생계를 걱정하고 부족한 독일어로 실전에 나서느라 이론적 학문적 기초를 잘 쌓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밖에 재난·분쟁 지역에서 유아 교사로 활동할 수 있는 ‘긴급 파견 교육’(Notfall Pädagogik) 과정에도 관심이 간다. 애초 국제구호협력 분야로 나가고자 했던 슬은 다른 진로를 밟았지만 언젠가 처음 그 지점에 다시 서게 될지 모른다.
아직도 독일에 도착하는 중
남을 돌보는 일, 자신이 가진 힘과 사랑을 다른 이와 나누는 일을 하느라 “매일 퇴근할 때 ‘내’가 없어진 듯하고 다 빼주고 텅 빈 상태”가 되어 여가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슬은 요즘 들어서야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주 1회 명상센터를 다니고, 또 독일에 온 뒤 놓았던 펜을 다시 잡아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써본다.
외국에 산다는 건 불가피하게 많은 불편과 불이익, 차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주장하고 넓혀가는 힘겨운 작업이기에, 그 와중에 다른 사람까지 돌볼 여유는 없게 마련이다. 이주 여성으로서 자신의 업을 고민하고 탐색한 끝에 돌봄 노동자가 된 슬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울림이 있다.
다른 외모와 말씨를 이유로 한 주변의 편견을 견디면서도, 슬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춰 대화하며 작은 아이일지라도 온전한 한 사람으로 대하려고 늘 애써왔다. 인터뷰 내내 한결같이 ‘장애아’라는, 간편하나 단정적인 말 대신 ‘장애를 가진 아이’라는 표현을 썼다. ‘장애아’를 돌볼 때 특별히 다른 점이 있냐는 나의 우문에는 단호히 답했다.
“아이들을 장애-비장애로 구분하기엔 아이들 개개인이 가진 특성과 기질이 너무도 다양해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어려운 점이 없는 건 아니고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장애를 가지지 않은 아이들이 덜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이 말을 듣고서 나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다음과 같은 말들로 바꾸어 써보고 싶었다.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사람’, ‘외국에서 온 사람’, ‘몸집이 작고 머리카락이 까만 여성’ 등등… 그러면 아시아 이주 여성, 즉 나와 슬 같은 사람을 보듬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이 나의 제2의 고향이라는 말은 할 수 없어요. 이곳에서의 삶이 아주 편안하다고 할만한 시기는 아직도 오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슬은 자신이 아직 독일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독일 사회는 ‘여전히 집 밖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의 돌봄 노동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 돌봄을 받고 자라난 아이들은 이 세상의 무수한 ‘차이’에 대한 감수성이 좀 다르길 바란다, 아니, 다를 것이다.
[독일 유치원교사의 젠더 불균형과 젠더 교육]
독일 사회에도 ‘아이 돌봄=여성의 일’이라는 고정된 젠더 역할이 뚜렷하다. 남성 유치원교사나 보육교사가 해마다 늘고 있지만 아직 수치상으로 차이가 크다. 수도 베를린 시를 둘러싼 지역인 브란덴부르크 주의 경우,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남성 교사가 2007년 139명에 불과했으나, 10년 사이 8배 이상 늘어 1천 명을 넘어섰다.(브란덴부르크 통계청, 2017년 기준). 연방 차원에서 보면 남성 유아교사가 2016년 기준 3만5백여 명으로 5.2% 비율이고, 대도시 함부르크의 경우 10%가 넘지만 보수적인 분위기의 남부 바이에른 주에선 3.6%에 그치는 지역 차이도 보인다.(연방통계청)
성비 불균형이 나타나는 주된 원인으로는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뿐 아니라 유아교육 분야의 낮은 임금수준이 지목된다. 남성들이 가정에서 주된 생계부양자가 되는 여전한 세태 속에서 남성 청소년들은 관련 직업교육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는 것. 반면 성별 임금 격차는 이 업종에도 존재한다. 여성 유아교육자의 45%가 시간제 일자리에 있는 반면, 남성은 75% 내외가 전일제 일자리에서 7%가량 많은 수입을 얻고 있다.
인터뷰에서 슬은 “만 3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도 ‘나는 파란색 옷 싫어. 그건 남자애 옷이야’ 와 같은 말을 하고, 여자도 파란색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짚어주어도 웃어넘겨 버린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유치원에서 이루어지는 젠더 교육은 기존의 성교육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 참고할만한 커리큘럼이나 모델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상시적으로 젠더 교육을 실시하는 유치원 사례도 아직 없다. 다만 필요성은 공론화되고 있다. 슬이 소속된 교육재단에서는 각 유치원마다 대표 교사가 참가하는 연례 세미나의 주제로 올해 ‘젠더 다양성’을 선정하고, 연구 프로젝트와 토론 자리를 마련한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현재 독일 라이프치히 거주. 그동안 일다에서 <29살, 섹슈얼리티 중간 정산>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독일 여성 난민들의 말하기> <하리타의 월경만남>을 연재했으며, 저서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동녘, 2017)가 있다. ‘이주’라는 삶의 모험을 함께하고 있는 이웃 여성들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이 이번 연재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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