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연인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는 소설 『디디의 우산』(황정은 연작소설, 창비, 2019)은 혁명이 도래하고 있는 듯한 광장의 시간을 배경으로 삼는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거리로 나온 김소리와 서수경은 대통령을 향해 “惡女(악녀) OUT”이라고 쓴 피켓을 본다. ‘녀’가 빨간색으로 적혀있던 그 팻말. 이때 작가 황정은은 김소리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 아래, “모두가 좋은 얼굴로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나온 자리에서 분란을 만드는 일을 거리끼는 마음”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퀴어여성인 김소리는 그곳에서 자신이 괜찮지 않았음을 토로한다. 그 팻말을 본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고, 그 앞에 서있었던 “계집”인 김소리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소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했고, 그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될 것만 같다고 느낀다.
이처럼 계급/젠더/세대/지역 등의 차이는 폭력적으로 무화(無化)되어 ‘대통령 하야’와 ‘이게 나라냐’라는 단일한 정치적 목소리로 수렴되곤 했다. 하지만 광장에서의 불편한 침묵들은 이내 분노의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페미니즘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가시화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 갈망이란, 배제의 폭력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집단주의적인 공동체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공동체의 기본 원리라고 믿어왔던 ‘동일성’은 심문에 부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이자 목표로서 ‘여성 내의 동일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평평하다고 믿어왔던 세계 그래서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고 착각했던 세계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될 수밖에 없다. 서울에 거주하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이성애자 여성 A의 시선에 포착된 ‘우리’와, 서울이 아닌 지방에 거주하며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레즈비언 여성 B의 시선에 포착된 ‘우리’의 범주는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전술한 내용만으로 A나 B의 삶이 설명될 수 있을까? A와 B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있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마냥 이어가다 보면, A와 B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다채롭게 펼쳐져 있으리라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그 상상은 동일성을 공유한다는 암묵적인 믿음 아래 형성된 ‘우리’, 그 내부의 삭제된 차이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다면 서로의 차이, 그 낯섦을 껴안은 채 나와 당신은 ‘우리’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때 “흑인, 레즈비언, 여성, 페미니스트, 시인, 엄마, 교사, 암 투병 생존자, 활동가”로 스스로를 설명했던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그것이 가능하며 그래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의 정체성에 가두지 않는다. 그녀를 가로지르는 중층적인 정체성과 수많은 삶의 형태는 지금-여기의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페미니즘 내의 배제와 혐오의 문제를 사유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누가 ‘배제’를 만들어내는가
오드리 로드의 산문집 『시스터 아웃사이더』(후마니타스, 2018)에는 총 17편의 에세이·강연·연설문이 실려 있다. 해당 글들을 통해 그녀는 ‘차이를 지닌 우리’의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차이’를 강조하는 로드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차별과 억압이 덧셈·뺄셈·곱셈·나눗셈과 같은 산술적인 형태로 가늠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흑인은 언제나 남성의 얼굴로, 여성은 언제나 백인의 얼굴로 상상되며 ‘흑인 여성’으로서 발화하려는 순간에도 퀴어의 정체성은 쉽게 지워지고 마는 현실이 그녀의 신체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로드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뼈아프게 지적하는 것은, 소수자 집단 역시 주류 집단이 구사하는 배제의 논리를 체화, 습득함으로써 내부에 또 다른 소수자를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위험성이다.
“가난한 여성, 흑인 여성과 제3세계 여성, 레즈비언 여성들의 중요한 이야기”(174쪽)를 듣지 않는 한 페미니즘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녀는 힘주어 말한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178쪽)라고. 자신이 누구의 도구와 언어로 누구의 위치에서 발화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면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여기 계신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겪는 억압에만 골몰한 나머지 다른 여성의 얼굴에 자기 힐 자국이 찍힌 것조차 보지 못하는 분은 없나요? 여성이 겪는 억압이 자기 검증이라는 찬바람을 피해 정의로운 자들의 대열에 낄 수 있게 해주는 입장권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도대체 그런 입장권이 [다른 여성을 짓밟아도 될 만큼] 그토록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요?”(「분노의 활용」, 227~228쪽)
오드리 로드는 ‘낯설게 여겨지는 여성’을 배제하는 여성들에게 위와 같이 묻는다. 동질성을 기반으로 삼는 일반적인 이분법의 구조 속에는 우열한 것과 열등한 것의 구분이 내재해있다. 그렇기에 위계를 지닌 이분법은 언제나 ‘주인의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이분법의 두 항은 동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위상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서양과 동양, 어른과 아이, 이성과 감성의 대립 구도는 차별을 끊임없이 재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더해지는 문제는 수많은 이분법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있다는 사실이다. 교차하는 무수한 정체성들은 상이한 상황과 각기 다른 효과를 산출함에도 이는 쉽게 은폐된다. 이에 오드리 로드는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백인 여성이 계급적으로는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위치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차이(들)의 연대, ‘주인의 도구’를 버리기 위하여
하지만 ‘여성’을 본질주의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으로는 이와 같은 ‘차이’를 인식할 수 없다. 게다가 오래도록 침묵을 강요받은 여성들이 차이를 지닌 여성들과 연대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로드는 말한다. “우리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침묵”이며, 그렇기에 여성들 사이에 “깨져야 할 침묵은 너무나 많”(53쪽)다고 말이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오드리 로드에게 있어, 눈앞에 산재해 있는 침묵이 깨지는 순간은 곧 차이를 지닌 여성들의 연대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한 까닭이다.
“함께 나아가기 위해 서로가 똑같은 존재가 될 필요는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차이를 가로질러 함께 손을 맞잡을 때, 우리의 다양성이야말로 우리에게 거대한 힘을 준다는 점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83년 워싱턴 행진 연설」, 232쪽)
단수가 아닌 복수로서의 ‘우리’라는 주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를 보존하면서도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연대-연결의 가능성이다. 로드의 글은 ‘우리’를 꿈꾸게 만든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를 ‘우리’로 사유하고 있을까. 나의 ‘우리’는 너의 ‘우리’와 얼마나 정합성을 갖고 있을까. 서로의 차이를 긍정하기 위해서라도 앞선 질문들은 필수적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차이에 기반한 연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로드의 말을 되짚어본다면, 서로의 ‘우리’는 같아질 수도 없거니와 꼭 같을 필요도 없겠다. 수많은 ‘차이’를 혐오로 치환하는데 익숙해진 이 사회에서 오드리 로드의 선언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대한 힘”을 지닌 “우리의 다양성”이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기엔, 너무도 충만한 삶들이 빈곤한 상상력 너머에서 넘실거리고 있으므로.
※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회원들의 글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승희 님은 “퀴어페미니즘의 관점으로 한국문학을 읽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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