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만약 남자가 업다면”이라는 책 제목에서 맞춤법이 어색한 건 1929년 2월 1일 잡지 <별건곤>에 실린 여성주의자 허정숙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단발 여성이 열 손가락에 꼽힐 때’ 주세죽, 고명자와 함께 과감히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백주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물놀이를 하던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세상에 남자가 업고 여자만 산다 하야도 우리 생활상에는 하등 문제가 업슬 것이다. 현재 사회제도나 경제조직으로 보면 여성은 남성의 지배와 보호를 밧지 안으면 살지 못할 것 갓지만은 만일 남성이 모도 업서지고 여성만 사는 세상이 된다면 모든 제도와 조직이 자연 여성본위로만 될 터이닛가 각자가 모도 자립자활할 능력이 생겨서 생활상 아모 곤란이 업슬 것이오, 따러서 금일에 세계 여성들이 떠들고 불으짓는 모든 반항운동도 스사로 소멸될 것이다.]
정말 이 세상에 만약 남자가 없다면 어떨까? 여자들끼리 산다고 해서 아무런 갈등이나 격차 없이 모두가 행복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남성연대와 가부장제가 발붙일 땅이라곤 내어주지 않는 사회일 것이라는 점에서, 허정숙의 상상은 그 자체로 즐겁고 온당하다.
오늘날까지도 위협으로 읽히는 이런 상상을, ‘큰 뜻’으로 나서던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 앞에서 펼치기까지 그에게는 어떤 고민과 결심이 있었을까.
아직도 이중 삼중의 억압을 겪는 여성과 소수자의 삶이 나중으로 미뤄지는 시대, 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붉은 책 표지 위에 흰색 한복을 입은 채 어딘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은 남자현이다. 익숙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는 2015년 영화 <암살>(최동훈 감독)에서 배우 전지현 씨가 연기했던 극 중 인물 안옥윤의 실제 모델이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유일한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저자는 표지 속 남자현의 일러스트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총 자체의 힘이 아닌 ‘겨누는’ 힘이라고 했다. 영화 속 모습과 달리 남자현은 62살에 마지막 암살까지 모두 실패하고 감옥에 끌려가 죽게 되지만, 영화에서처럼 “계속 싸우고 있었다고”(극 중 안옥윤의 대사) 말이다. 그는 사는 동안 손가락을 세 번 끊어 혈서를 썼고, 직접 여성을 교육하는 일에 힘썼으며, 만주의 모든 조선인에게 존경을 받았다.
직업도 신분도 뛰어넘어 전개되었던 1919년 3월 만세운동의 한가운데에는 정칠성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8살에 기생이 되어 공부를 시작한 그는 만세운동 이후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의 필진으로 참여하며 ‘사상 기생’으로 불렸다.
그는 1924년 5월에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주장한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의 결성에 참여하며,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관습과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와 이해가 많이 공통되는 군중과 제휴하자!”라며 일찍이 연대의 의지를 밝히던 그는 훗날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해 “조선”, 나아가 “세계 인류 전체”를 향해 분투하자는 강령을 가진 근우회(1927년 5월에 조직된 여성운동 단체. 항일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벌였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1931년에 해산됨)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나혜석, 허정숙과 달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그는 ‘가진 것 없는 여성들이야말로 운동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정칠성은 경제적으로도 성적으로도 억압받고 있는 조선 여성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야만 한다고 믿었다. 가부장제와 결부된 식민지 자본주의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가 곧 우리 자신(여성)의 해방”임을 의심하지 않고, 언제나 더 낮은 이들을 향해 손을 뻗는 운동에 남기를 택했던 여성주의자 정칠성의 모습은 식민지 시기뿐 아니라 지금의 여성운동이 나아갈 방향까지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을밀대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중에서, <동광> 23호, 1931년 7월
강주룡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양의 고무공장에 취직했을 때는 1929년 세계 대공황에 따른 불황 피해를 ‘임금 인하’로 극복하려고 하는 자본가들에 대항해 대규모 노동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식민지 노동자이기 이전에, 식민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착취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1931년, 강주룡은 맨 앞에서 파업을 주도한 뒤 단식투쟁에 나서게 되지만, 자본가가 부른 일제 경찰에 의해 49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모두 정문 밖으로 내쳐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그는 평양에서 제일 높고 경치 좋다는 을밀대(고구려 때 지어진 누각)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죽을 마음을 먹고 나니 제법 용기가 났고, 그대로 십육 미터 고공에 올랐다. 8시간을 버틴, 한국 최초의 고공농성이었다.
88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요구를 하며 고공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13년 만에야 복직할 수 있었던 KTX 해고 승무원들의 지난한 싸움도, 작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지속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의 투쟁도 있었다. 세상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의 체공(滯空, 하늘에 머물러 있는) 시간, 파업 기간은 거꾸로 길어져 왔다. 주로 일터의 관계에서 비롯된 성희롱·성폭력 사건들은 지난 몇 년간 끊이지 않는 미투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강주룡을 가로막았던 현실이 오늘의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그를 기억하는 일이 단지 역사를 돌아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각자의 현장에서 소리치고 있는 이들에게 연대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해 편견 없이 다루고, 무엇보다 남성을 경유해서만 역사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호명했으며, 이들을 다만 ‘의지적 존재’로 그리기보다 그들 역시 삶 속에서 흔들리고 매 순간 좌절하고 고민했던 ‘평범한 존재’였음을 담아낸 책. ‘몇 주년’이라는 숫자보다 그 긴 시간 동안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하자고 이야기하는 『이 세상에 만약 남자가 업다면』에서 나는 그들과 연결됨을 느꼈다.
※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회원들의 글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서영 님은 유니브페미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이 기사 좋아요 3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페미니스트의 책장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