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음악’을 들고서 한국에 재도착하는 중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유영: 타악기 현대음악가, 프라이부르크

하리타 | 기사입력 2020/04/18 [20:30]

‘자기만의 음악’을 들고서 한국에 재도착하는 중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유영: 타악기 현대음악가, 프라이부르크

하리타 | 입력 : 2020/04/18 [20:30]

※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유영 이주 이력서

 

이주 8년 차.

2005년 계원예술고등학교 2학년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연주 여행

2007년~2011년 이화여대 음대에서 타악기 전공하며 독일어 공부

2013년~2015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 타악기 전공 석사과정

2015년~2017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 최고연주자 과정(Konzertexsamen/Meisterklasse)

2019년 8월~2020년 1월 한국에서 갑상선암 투병

2017년~현재 프리랜서 연주자 및 타악기 강사로 활동

 

어떤 사물이든 그녀에게는 악기가 될 수 있다

 

유영은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타악기 음악가다. 뮤직테아터(Musiktheater) 작품 속에서 연주와 더불어 연기를 펼치기도 한다. 2014년부터 독일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 폴란드, 이탈리아 등 유럽의 여러 음악제를 다니며 무대 위에 올랐다.

 

내가 관람자로서 직접 만난 유영은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에 맞춰 마림바를 치고, 방수 바지를 입고 호수에 들어가 드럼통을 두드렸으며, 흰 저고리 입고 한국 전통 북으로 살풀이를 했다. 인어의 모습을 하고 공연장 바닥을 철퍼덕거리며 날카로운 고주파 음을 내기도 했다. 악기로 만들어진 사물뿐 아니라, 가죽, 나무, 금속, 유리, 플라스틱 소재의 어떤 부품, 길바닥을 뒹굴던 폐기물, 심지어 자기 몸까지 모든 것이 유영에게는 악기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연주자에게 무한대의 움직임과 소리를 가능케 하고 클래식 음악에 비해 생소하지만 관객의 감각을 야성적으로 파고드는 현대음악. 그리고 인류의 원시 악기로서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 발명되며 현대음악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타악기들. 유영은 이 세계에 어떻게 들어갔을까?

 

▲ 공연 리허설 중인 유영. 익숙한 모습의 퍼커션이나 꽹과리부터 물이든 수조와 각종 잡동사니까지 악기 구성이 다양하다. 유영에게는 모든 사물이 악기가 될 수 있다. 유영의 웹사이트 https://yuyoungjin.com


10살에 입문해 엘리트 코스 밟았지만, 음악 그만둘 뻔

 

유영은 10살 때부터 타악기 연주자로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노래방 프로그램을 음 소거해 틀어놓고 박자에 따라 가사에 색깔이 입혀지는 것을 재미 삼아 볼 정도로, 유영은 리듬에 흥미를 느꼈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엄마가 타악기 레슨을 권유했다. 거주하던 지방의 시립교향악단 공연도 엄마 손을 잡고 빠짐없이 보러 다녔다. 클래식 애호가인 엄마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유영의 음악 활동은 어떻게든 지원해주려 했다.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 전공자들은 어려서부터 지독한 연습 벌레로 길들여진다. 레슨이나 시험에서는 선생님의 곡 해석을 정확히 따르며 화려한 기교를 실수 없이 해내야 훌륭한 학생이다. 유영은 ‘음대 전 학년 통틀어 연습을 제일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즉 교수들의 피드백이나 시험 점수는 최고가 아니라는데 늘 좌절했다. ‘나는 소질이 없고 음악을 못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괴로웠다. 그렇지만 벌써 10년을 넘게 매진해온 음악을 쉽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음악이 싫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만드는 음악에 대한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학부 졸업 후 오케스트라 객원 연주자로 1년여 생활하며 접한 ‘프로 연주자’의 세계는 유영을 더 혼란에 빠뜨렸다. 성차별과 권위주의, 연주자의 개성이나 실력보다는 인맥과 경력관리에 치중된 문화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2012년 무렵) 객원 연주자로 오케스트라 연습에 가면 타악기 파트에 학교 선후배부터 나이든 연주자까지 죽 줄지어 있어요. 자기 서열에 맞게 꾸벅꾸벅 인사를 잘해야 하고 후배들은 일찌감치 출근해서 악기를 다 셋팅해 놓아야 하는 분위기예요. 싸가지 없는 애로 소문나면 연주 의뢰가 더이상 안 들어와요. 연습 끝나고 남자 선배들이 회식을 주도하면 거기도 따라가야 하죠. 거기서 인맥을 잘 관리해야 레슨 일자리도 잡을 수 있고요. 저는 인간관계에 있어 워낙 소극적이고 성격도 예민하고 내향적이라 그런 게 숨이 막혔어요.”

 

“오케스트라에 있는 타악기들을 성별로 나눠 맡고 거기서 계급이 생기기도 했어요. 남자 선배가 나서서 어린 여자 후배한테 건반악기를 배정해요. 마림바 같은 악기가 여성스럽다는 거죠. ‘오빠’들은 크고 웅장한 팀파니 같은 것 한 가지씩 맡고요. 1년을 그렇게 살아보니 ‘나는 악기를 곧 그만둘 것 같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늘 원했던 독일 유학을 떠나서 음악을 제대로 하고 싶다, 특히 나에게 자신 있고 재밌는 현대음악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어요.”

 

▲ 10살 때 음악을 처음 시작한 유영은 이제 어느덧 22년 차 음악가가 되었다. 그 동안 음악을 관둘 뻔했던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유영 제공


예고 2학년 때 단기 교환학생으로 처음 가봤던 독일, 새소리가 들리는 학교 연습실과 화성 이론을 짚어가며 가르치는 선생님이 유영의 머릿속에 이상적인 그림으로 늘 남아있었다. 그래서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꾸준히 배웠고 독일문화원에도 다녔다. 더구나 독일은 현대음악이 가장 잘 발달한 곳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이듬해 연습용 고무패드를 싸 들고 만하임으로 날아갔다. 이미 독일에 나와 있는 선후배 지인들이 꽤 있었지만 일절 연락하지 않고 혼자 대학원 입시를 준비했다.

 

독일에 있는 한국 유학생의 절반가량이 음대생일 만큼 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독일에서 유학한다. 좋은 커리어를 쌓는 일환으로 유럽 음대를 지망하고, 그중 대다수는 졸업 후 곧바로 귀국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 이른바 ‘몸값’을 높이기 위해 귀국 연주회를 크게 열고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거나 개인레슨, 대학 강의로 생계를 잇는다. 유영의 유학 동기나 목표는 좀 달랐다. 현대음악을 더 알고 싶고, 자기 잠재력을 더 파고들고 싶은 욕구가 컸다.

 

난생처음 들어본 칭찬과 존중 “네 음악 좋다, 그대로 가라”

 

독일에서 국립음악대학 대학원 과정에 도전하는 외국인 음악가에는 통상 네 번의 입시 기회가 주어진다. 학교마다 연간 2회의 입학시험을 개최하는데, 보통 두 번 떨어진 학교에는 다시 지원할 수 없다.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워킹홀리데이, 어학비자, 유학준비비자를 연달아 받더라도 3년 내외다. 그런데 학교마다 입학 정원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고, 응시생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다. 음대 입학은 이런 까닭에 유독 어렵다.

 

유영의 경우, 2회차 입시에서 프라이부르크 음대 타악기 석사과정에 합격했다. 당시 한 학기에 단 2명만 선발했다. 2년 뒤 동 대학원 최고연주자 과정(콘체아트엑사멘;Konzertexsamen 혹은 마이스터클라스;Meisterklasse라고 지칭)에는 모든 전공을 통틀어 겨우 11명의 합격자 중 하나로 들어갔다. 프라이부르크 음대는 현대음악계에 뛰어난 연주자와 작곡가를 배출한 곳이고, 특히 타악기 전공은 석학인 베른하트 불프 교수(Prof. Dr. h.c. Bernhard Wulff)가 이끌고 있었다. 유영은 4년간 이곳에서 음악가로서 크게 성장했다.

 

▲ 연습실에서 수많은 악기에 둘러싸여 연습 중인 유영. 프라이부르크 국립음악대학 대학원에서 4년간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기본기를 새로 다지고 자기만의 색깔도 찾아갔다.   ©인터뷰이 제공


“독일 음대에 다니면서 ‘소질 없다’는 생각에 시달렸던 과거를 달리 보게 됐어요. 한국의 레슨 방식과 평가 방법이 저랑 안 맞았던 거예요. 한국에선 보통 레슨할 때 선생님이 셈여림까지 하나하나 악보 해석을 해와서 학생에게 떠먹이듯 일러줘요. 그걸 그대로 따라 해야 잘하는 거예요. 그런데 독일에서는 연주에 정답이 없고 교수들도 제 음악을 터치 안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연주자 각자의 개성이 있고 레슨은 그걸 바탕으로 더 발전시키는 거죠. 지도 교수님(베른하트 불프)이 입학 후 첫 레슨에서 “네 음악 좋다. 그대로 가라” 하셨어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그런 인정의 말에 굉장히 감동받았어요. 어차피 떨어질 것 같아서 유학 준비도 주변에 비밀로 할 만큼 한국에서는 제가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는데, 여기 와보니까 꼭 그렇지 않더라고요.”

 

다양한 곡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둘 뿐 아니라 기본기를 중시하는 것도 독일 음대 교육의 다른 점이었다. 유영은 말 그대로 ‘스틱 잡는 법’부터 다시 배우고, 연습 방법도 새로 정립해가며 연주하는 몸과 듣는 귀를 단련했다.

 

“선생님들은 다들 소리의 중요성을 계속 일깨워 주셨어요. 어떻게 쳐야 어떤 소리가 난다는 소리의 원인과 결과를 같이 연구했어요. 마림바 연습을 할 때 제가 자꾸 악보에 안 맞는 소리는 내면 ‘네가 몸을 이렇게 틀고 손목을 이런 식으로 쓰니까 그렇다’고 일러주고 자세부터 교정하는 거죠. 구체적인 테크닉이나 기교는 크게 신경을 안 써요. 소리만 좋으면 발로 쳐도 돼요. 곡 해석도 논리를 따져가며 처음부터 같이 해요. 그러고 나서 그에 따라 필요한 테크닉을 연구하는 식이에요.”

 

▲ 유영의 지도교수(베른하트 불트, 가운데)의 은퇴 기념 공연에는 재학생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제자들도 찾아왔다. 가운데 초록색 상의를 입은 사람이 유영. 지도교수는 유영을 기획자, 작곡가로도 훈련시켰다.  출처: https://mh-freiburg.de


유영의 지도교수는 44년 재직 후 얼마 전 은퇴했는데, 일흔이 넘은 지금도 계속 공연을 기획하고 제자들과 협업할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에게 배우면서 유영은 폭넓은 타악기 레퍼토리를 접했고, 자신에게 잘 맞는 것들을 갈무리해나갔다.

 

공연 기획자로서의 역량도 키웠다. 일반적인 연주회장을 벗어난 곳, 예를 들어 음대 연습실이나 지역 호수, 맥주 양조장, 교도소에서 하는 공연도 교수님을 도와 기획부터 연주까지 전 과정에 참여했다. 지도교수는 외국인 학생들에게도 독일어로 프로그램 텍스트를 써오거나, 공연 중 관객들에게 곡 소개를 하게 했다.

 

‘앙상블 로트’ 결성! 아시아 페미니스트의 정체성 드러내다

 

유영은 대학원 졸업 후, 무대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펼치기 위해 동료 타악기 연주자 세 명을 불러모았다. 한국, 일본, 폴란드 출신 여성들로 구성된 현대음악 타악기/뮤직테아터-퍼포먼스 그룹 ‘앙상블 로트’(Ensemble Rot)를 만든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성장해 지금 이곳 ‘서구 독일 사회’에 모인 여성들이 그동안 ‘여성 연주자’로서 받았던 기대나 압박을 벗어던지고 백인 남성 위주의 음악계에 자기들 목소리를 내는 게 목표다.

 

앙상블 로트는 참신한 레퍼토리를 보여주고자 고민한 끝에 공연 타이틀을 ‘자기만의 방’으로 정하기도 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다다이즘 시대의 여성 예술가들 작품을 재해석한 프로그램 “여성 다다이스트들 위하여”(Für die Dadaistinnen)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설치 미술, 무대 의상, 퍼포먼스에서도 과감한 실험을 해왔다.

 

▲ 앙상블 로트의 최근 공연 모습. 이 사회에 좀 더 많은 가슴이 드러나야 한다는 의미로 머리에 가슴 모자를 쓰고 신나게 연주하고 있다.  ©촬영: Daniela Wolf


유영은 멤버들과 함께 공연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레퍼토리를 고른다. 때로는 연습실에서 다 같이 놀듯, 연습하듯 유쾌하게 주고받던 음과 리듬을 바탕으로 직접 곡을 쓰기도 한다. 프로그램 기획안이 나오면 시청 예술과나 시민극장, 지역 음악위원회, 시민단체 등에 지원금 및 후원, 대관 요청을 한다. 지원금에는 연주비뿐 아니라 교통비, 식대, 연습 임금도 포함된다.

 

유영에게 앙상블 로트 활동은 엄청난 해방감을 준다. 연주자뿐 아니라 작곡가, 기획자, 퍼포먼스 행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데다, 페미니스트로 무대에서 당당히 커밍아웃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갑상선암의 경고, “오히려 좋은 일 같아요”

 

대학원 박사과정에 해당하는 최고연주자 과정을 심사위원 만장일치 최고점수로 졸업할 만큼 유영은 뛰어난 연주자로 성장했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 잘하는 음악도 성공적으로 잘 찾았다. 그럼에도 외국인 예술가들이 흔히 마주하는 불안정한 체류와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는 피할 수 없었다.

 

멤버로 활동하는 앙상블과 듀오에서 준비하는 공연들, 그리고 객원으로 의뢰받은 연주까지 반년 치 일정을 줄지어 잡아놓고 비자청을 찾아가도, 고정된 수입원이 없다는 이유로 담당자는 난색을 표했다. 피고용인이 되어 월급을 받고 일정한 세금을 내는 것이 공무원들이 내거는 비자 연장의 기준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채용에 응시하거나 이른바 ‘보따리 강사’가 되어 전일제 강사를 뛰어볼 수 있었지만, 유영은 어렵게 찾은 ‘하고 싶은 음악’을 생계와 쉽게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 굶어죽겠다’는 걱정을 할 때쯤, 프라이부르크시 인근 마을의 비영리 음악교육단체에 타악기 강사 자리를 소개받았다. 초등학생들에게 놀듯이 타악기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주 1회 정원 10인 내외 수업의 강사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순 없었지만, 순수한 아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독일 부모나 교사들과 소통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졸업 후 2년 동안 생계와 음악 고민에 쉼 없이 지내느라 번아웃(burn out, 기력 소진)이 온 것 같아 휴식차 한국에 들렀는데, 정기건강검진에서 갑상선암이 발견된 것이다. 급하게 수술을 받고 회복기를 갖느라 한국에 ‘발이 묶였다.’ 평생 연습 벌레로 살아온 유영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잡힌 공연을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억지를 부리고, 불과 몇 달 뒤에 독일로 복귀할 생각에 집착했다. 하지만 아픈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암은 결국 유영에게 지나친 완벽주의와 통제 욕구를 내려놓으라는 따끔한 경고와도 같았다. 암 수술을 전후로 우울증과 불안증도 심해져 갑상선 치료와 함께 정신과 상담도 받아야 했다. 그동안 소원했던 가족들과 티격태격 한집에서 지내며 조금씩 회복하는 동안 친척들이나 오랜 친구들과도 모처럼 연락이 닿았다. 유영은 그토록 싫어하던 ‘주변에 민폐’를 끼쳐가며 간호를 받고, 예정된 앙상블 공연도 못 하겠다고 알렸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내가 자신을 온전히 돌볼 수 있을까?’ ‘내 주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구나.’ 좋은 연주를 하겠다고 늘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세우며 몸은 그저 필요한 도구로만 홀대하던 유영의 생각에 변화가 일었다. 세상이 달리 보이고 일상의 질이 높아졌다. “암이 온 게 오히려 좋은 일 같아요.”

 

▲ 문래예술공장 대관 공모에 당선되어 작년 크리스마스에 올린 단독 공연 "이방인의 일기장" 한 장면. 이 공연은 ‘버려진 것들과 최승자 시인의 시 그리고 전자음악 작곡가 윤지영과의 협업’을 보여준다.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산 지난 7년여 시간을 정리하는 의미로 혼신을 다해 공연했다.  ©촬영: 손정천

 

예술가는 역시 작품으로 자기 삶을 말한다. 유영의 암투병기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올린 단독 공연에 고스란히 담겨 관객들을 울렸다. <이방인의 일기장>이라는 타이틀로 구성한 2부짜리 공연에서 유영은 발을 구르며 절규하고 쓰레기를 자기 몸 삼아 쓰다듬으며 수술 후 갈라진 목소리로 ‘살고 싶은가 봐, 살고 싶었나 봐’를 속삭인다.

 

“어느 날 우울한 마음으로 연습실에 가다가 길바닥에 뒹구는 쓰레기들을 보며 꼭 ‘나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그리고 쓰레기들을 붙잡고 서로 부비면 어떤 소리가 날지 절로 상상이 되더라고요. 주워와서 그걸로 곡을 썼어요. 여러 쓰레기를 비비고 쓰다듬다가 마지막으로 고생한 저의 몸을 발부터 수술 자국이 남은 목까지 만져주는 구성이에요. 앞으로도 쓰레기로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쓰레기 소리 수집가’라고 이름도 정했어요. 도처에 뒹구는 쓰레기가 이제는 너무 궁금하고 예뻐 보여요.”

 

‘쓰레기 소리 수집가’로 한국에서 음악 세계 펼칠 것

 

코로나-19 사태로 유영은 요즘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상반기에 예정되어 있던 공연들이 모두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하반기나 내년 공연을 위해 예술가 지원 공모에 지원하면서 틈나는 대로 ‘유럽 생활 정리 일기’를 쓰기도 한다. 유영은 올여름, 활동 거점을 한국으로 옮기기로 했다.

 

“올 초에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됐다 싶어서 독일 집으로 돌아왔는데, 제 가치관이 달라졌어도 제가 처한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여전히 비자 연장은 어려울 것이고, 늘 애를 써도 겨우 최소한의 안정이 보장될까 말까 한 거예요. 전에는 그걸 기어코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기고 버텼다면, 암을 경험하고 난 지금은 타고난 성향이 예민하고 불안한 나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요.”

 

▲ 유영의 주도로 활동 중인 여성 타악기 ‘앙상블 로트’의 데뷔 공연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유영.   ©촬영: Mark Doradzillo


유영은 요즘 한국에 다시 도착하는 중이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음악가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편협한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 한 가지 정답만 강요하는 음악계에서 작지만 분명하게 자기 자리를 고집할 만큼 유영은 강해진 것 같다. 어느 샌가 ‘나는 재능이 없다’고 자책하기를 멈추었다. 더 좋은 연주를 위해 자기 소리를 의심하되 부정하지는 않는 귀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 단 스무 명이 찾아오더라도 앞으로 유영은 자신이 꼭 내고 싶은 소리만을 들려줄 것이다. 유영의 새로운 비전은 아직 현대음악 불모지인 한국에 다양한 타악기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것이다. 작년 말 단독 공연에서 수는 적지만 젊고 진지한 관객들과 가까이 소통하며 큰 희망을 느꼈다. 해외 음악제에도 꾸준히 출품하고 공연을 하러 다니고 싶다. 특히 앙상블 로트의 이름으로는 적어도 2년에 한 번 꼭 무대에 설 계획이다. 생계유지를 위해 타악기 레슨을 한다면 할머니들이나 여자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

 

한국으로의 재도착은 앞서 용기 있는 떠남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그녀나 나,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주여성들은 집을 떠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새로운 도착지를 낯설게 바라보며, 유영은 숨을 고른다. 이젠 전처럼 쫓기듯 마냥 뛰지 않을 것이다. 내면의 리듬에 맞춰 때로는 빨리 걷고 때로는 멈춰 서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지키고 확장할 것이다.

 

유영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 반 고흐의 말은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의 이웃 창작자로 살며 매일 밤 ‘이방인의 일기’를 쓰는 나의 가슴 또한 울린다. 둥둥 두두둥. 낮게, 다정하게, 오래 울린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빈센트 반 고흐)

 


[독일 클래식 음악계 젠더 불균형과 여성음악가 지원 정책]

 

오늘날 클래식 음악으로 일컫는 예술사조는 여성 인권이 열악했던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작곡가의 절대 다수가 남성이고, 여성들은 연주 능력이 있어도 집안을 벗어나 대중 앞에서 공연하거나 전문 교육기관에 다니기 어려웠다. 그러한 젠더 불균형의 유산은 페미니스트 앙상블을 만든 유영의 행보처럼, 현대음악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성차별 및 젠더 불균형의 잔재는 아직 뚜렷하다. 유럽의 유수 오케스트라단에는 남성 비중이 훨씬 높으며, 악기와 역할에 따라 여성에게 아직도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가 많다. 지휘나 타악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터뷰이 유영은 “유럽 아이들은 보통 방과 후 음악학교를 다니거나 레슨을 통해 클래식 악기를 한두 가지씩 배우는데, 타악기는 남성적이라는 편견 때문에 여학생을 만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남학생들을 통솔하는데 남성 강사가 적합하다는 또 다른 편견으로 인해 취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경험을 들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계에서 의사결정권 및 리더십을 가진 고위직에는 여성 비율이 적다. 독일 국립 음악대학교를 예로 들면, 학생 비율에서는 여성이 50%를 웃돌지만, 강사와 교수직에서는 25%로 낮아진다. (출처: Leibniz-Institut fur Sozialwissenschaften Kompetenzzentrum Frauen in Wissenschaft und Forschung)

 

이러한 성비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바덴-뷔르템부르크 주 정부는 지난 2015년 고등교육법 개정안에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를 도입했다. 또 연방 교육부가 운영하는 여성 교수 양성 프로그램 ’Das Professorinnenprogramm’에는 현재까지 두 단계에 걸쳐 총 15억 유로를 투입해 136개 대학과 협력했다.(출처: http://bmbf.de)

 

가령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은 연방 교육부의 재정 지원을 활용해 여성 음악가의 진출이 낮은 분야, 혹은 여성 교수 비중이 적은 과목에 여성 장학금 프로그램(FrauenFörderStipendium Musik)을 운영하고 있다. 장학생들에게 두 학기 동안 매달 400유로를 지급하고 워크숍이나 코칭 참여 기회를 부여한다. 2019-2020학기에는 서울 출신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김진희(Jinhee Kim)가 장학생(최고연주자 과정 재학 중)으로 선발되었다.

 

개별 음악대학은 그 밖에도 입학심사위원회에 남녀위원 비중을 동일하게 구성하거나, 교수 임용 시 여성 후보를 일정 비율 이상 선정하도록 방침을 정하는 등 젠더평등 정책을 실시한다. 임신, 출산을 겪으며 음악가로서 기량과 커리어에도 힘쓰는 여성 음악가들을 위해 일-가정/학업-가정의 양립 지원책을 마련한 곳도 있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현재 독일 프라이부르크 거주. 그동안 일다에서 <29살, 섹슈얼리티 중간 정산>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 독일 여성 난민들의 말하기> <하리타의 월경만남>을 연재했으며, 저서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동녘, 2017)>가 있다. ‘이주’라는 삶의 모험을 함께하고 있는 이웃 여성들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이 이번 연재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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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나노~ 2020/05/01 [12:17] 수정 | 삭제
  • 우와... 감사합니다. 유영님 홈페이지 방문해서 이방인의 일기장 공연 영상 봤어요. 너무 멋있고 좋았습니다. 직접 본 사람들은 얼마나 황홀했을까! 저도 팬이 된 것 같아요~
  • ㅁㅁ 2020/04/30 [19:33] 수정 | 삭제
  • 팬입니다. rami님 yuyoungjin.com 유영님 홈페이지 가시면 공연영상 링크 있더라구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유영님 공연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영님도 하리타님도 화이팅입니다!
  • rami 2020/04/29 [16:57] 수정 | 삭제
  • 유영님 음악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타악기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직접 공연에서 본다면 특별한 경험일텐데.. 타악기에 대한 선입견을 깨주실 듯.
  • 사미 2020/04/21 [11:45] 수정 | 삭제
  • 독일에서 성장의 기회를 크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참 부럽습니다. 한국은 교육열도 높은데 교육의 수준은 왜 떨어지는 걸까 한숨이 나오네요. 권위주의 성차별 인맥 위주 못버려서겠죠. 한국에서 연주 계속 하신다는 얘기가 개인적으로는 반갑네요. 제가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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