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많은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다양한 페미니즘 주제를 예술로 표현하고,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과 차별, 위계 등에 문제 제기하며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새로운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올해 초 트랜스젠더 여성 신입생의 여대 입학을 둘러싸고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를 절망과 무력감의 늪에 빠지게 했다. ‘오픈리 퀴어’(커밍아웃한 성소수자)이자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공개한 채로 활동하는 나로선 트랜스젠더들을 향해 쏟아지는 날것의 혐오 발언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와 동시에 나를 지치게 했던 건 온 세상이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황에 맞서 싸울 수도, 현실에서 눈을 뗄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모든 것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친구들과 서로를 보듬고 때론 분노하면서 일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논바이너리 젠더퀴어다
나는 지금 논바이너리(Non-binary,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젠더퀴어(Genderqueer, 이분법적 성별 정체성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로 정체화한 상태다.
처음부터 이렇게 명확한 단어로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여성인 친구에게 연애 감정을 느꼈던 청소년 시절부터 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는 못했다. 막연히 ‘나는 여자도 남자도 다 좋아할 수 있나 보다’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는 주위에 관련 지식을 알려줄 수 있을 만한 장소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내가 알고 있던 퀴어 용어라곤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가 전부였다.
나는 성장기에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 성별 위화감)를 분명히 느끼고 가족들에게 내 몸이 좀 징그러워서 보기 싫다, 가슴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뭔가 묘하고 이상한 느낌을 꽤 오래 겪었지만, 어른들이 사춘기와 2차 성징 때문이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괜찮아질 거라고 하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만 왔다.
대학에 와서야 처음 퀴어 커뮤니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다. 비-시스젠더(non-cisgender, 생물학적 성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로 정체화한 친구들은 내게 어릴 적에 느꼈던 이질감이 ‘젠더 디스포리아’일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꽤 오랜 시간 정보를 찾아보고 고민한 끝에, 나는 여성도 남성도 아니며 이분법적인 성별 분류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게 이제 2년이 다 되어 간다.
사진계 내 성폭력에 지쳐서…
사실 나는 사진을 찍는 것보다 사진에 찍히는 일을 먼저 접했다.
식이장애로 살이 15kg가 넘게 빠졌을 때, 우연히 SNS에서 스냅 모델을 구한다는 사람을 알게 되어 취미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취미생활은 그야말로 매력적이었다. 촬영본을 업로드할 때마다 좋든 나쁘든 관심을 받는 게 즐거웠다.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특히 취미 모델로 활동하는 여성들과 친했는데, 우리는 만날 때마다 공공연한 사진계 남성들의 블랙리스트를 공유하곤 했다. 어느 포토그래퍼가 자꾸 성추행을 하니까 조심해라, 유명한 누구가 술자리에서 성적인 행위를 요구하더라….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 중에는 나와 친밀했던 사람도 있었고, 연예인 화보 촬영을 하는 스튜디오 실장도 있었다.
다들 사진계 내에 성폭력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가해자들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업계에서 권력을 점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문제가 공론화되어도 잠시뿐, 가해자들은 몇 주 입 다물고 살다가 돌아와서 잘 먹고 잘 사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런 일들을 참고 또 참다가 어느 날 나는 폭발해서 차라리 내가 사진을 찍겠다고 선언했다. 우리의 피해를 계속 견디기만 할 바에, 사진을 배워서 우리끼리 안전하게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처음엔 분노에 차서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던 사진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걸 보면,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일 같다.
논바이너리 포트레이트, 우리 존재가 지워지지 않도록
인물 사진 작업을 계속하다가, 젠더퀴어(Genderqueer)로 재정체화하면서 <논바이너리 포트레이트>(Non-binary Portrait)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작업은 자신을 논바이너리(여성이나 남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로 정체화한 이들의 초상을 촬영하고 이미지와 인터뷰를 아카이빙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논바이너리 포트레이트> 작업은 이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나는 예전에도 퀴어였는데 왜 이제 와서 다시 한번 타자화되어야 하나? 시스젠더(생물학적 성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였던 나와 그렇지 않은 지금의 나는 무슨 차이가 있나? 퀴어 커뮤니티에서조차 시스젠더가 아닌 퀴어들은 너무나도 쉽게 지워진다.
당연히 예술계도 마찬가지다. 업계 종사자들에게 당장 오픈리 게이 작가 중 기억나는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면 최소 몇 명은 나오겠지만,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 예술인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보다 당사자인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시스젠더의 정체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논바이너리 퀴어 모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보통 생활 반경 내의 익숙한 장소를 많이 선택한다) 원하는 모습으로 촬영에 임한다. 사복을 입어도 되고 평소엔 절대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드레스도 괜찮다. 이 작업에서는 최대한 눈앞에 보이는 순간 그대로를 촬영하기 위해 디렉팅을 거의 하지 않는다.
다만 촬영에 들어가기 전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름의 조건이다. 다들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조차 어색해하지만, 한창 대화를 하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해서 “이렇게 담기고 싶다”는 마음을 툭툭 이야기하곤 한다. 나는 이 과정을 찍고, 촬영 후 간단한 질문을 작성하여 텍스트로 답변을 받는다.
작업에 참여하는 논바이너리 퀴어들의 생애사는 각각 다르지만 많은 모델들이 인터뷰에서 “내 모습 그대로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가능한 한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논바이너리 퀴어들의 삶을 기록하면서 우리의 행복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싶다.
이미지 속의 나는 집 안에서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다. 베란다, 욕실, 부엌 식탁 위 등의 평범한 장소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나의 몸이 집으로부터의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현장이 된다. 가부장제와 성별 이분법을 상징하는 공간인 집에서 논바이너리의 신체를 자연스럽게 촬영하여 삶을 지속하기 위해 나름의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 정체성과 공간이 충돌하고 공존하는 모습, 그리고 집의 양가적 의미를 퀴어 정체성에 기반해 풀어냈다.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를 찾고 싶어
나의 작업은 대부분 사회와 불화하고 충돌하는 소수자 정체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렇다 보니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잦은 편이다. 특히 사진업계는 사실상 시스젠더 남성 작가들이 대부분이고, 아직까지 소수자 담론을 다루는 작업이 주목받는 필드가 아니다. 그러니 소위 ‘고인물’들의 입장에서는 사진계 내의 썩어버린 혐오들을 공론화하고 비판하는 우리의 행보가 썩 탐탁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이런 노골적인 혐오들을 한 귀로 듣고 흘리려 하지만, 소수자 정체성을 주제로 창작 활동을 한다는 건 커밍아웃 여부와 관계없이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새로운 동료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다.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들은 주류 예술계에서 너무 쉽게 고립되고 공격당한다. 그럴 때 무엇이 에어백 역할을 해 줄 것인가? 개인보다 여럿이 모였을 때 우리는 더 넓은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공통의 경험으로부터 직접적인 움직임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동료 시각예술인들을 만나 만든 ‘오버라인’
Overline(오버라인)은 이런 지점을 끊임없이 고민해 온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퀴어 페미니스트 시각예술인 모임이다. 사진, 영상, 미술, 조소,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섯 명의 작업자로 구성되어 있다.
논바이너리 젠더퀴어로 재정체화 이후 인간관계와 작업에 어려움을 겪을 때 나는 무척 무기력한 상태였다. 너무 지쳐서 작업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이 예술을 기반으로 한 소수자들의 커뮤니티였다. 서로의 삶과 작업을 존중하고, 연대를 통해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서 안전하게 작업하고 싶었다. 그런 나의 욕망(?)을 바탕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버라인을 만들었다.
우리는 팀의 정체성을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선을 넘나드는, 선을 긋고 지우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하고 있다. 2019년에 독립출판으로 제작한 <overline; o.verline>은 각자의 ‘선’에 대한 오버라인 멤버들의 작업을 엮은 책이다. 곧 온라인, 오프라인 독립서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버라인의 작업과 지향점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꼭 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이것이 삶을 지속시키고 작업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의 작은 기록 하나가 만드는 파동이 언젠가 변화의 시작이 되기를 기다리자.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언어로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끝없는 지지와 연대를 보내며.
*오버라인 인스타그램 @overline_kr 트위터 @Overline_kr
[필자 소개] 김지혜.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포토그래퍼.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비주류’로 호명되는 신체와 정체성에 관한 이미지 작업을 하고 있다. 퀴어 페미니스트 시각예술인 모임 Overline의 멤버로, 사람을 모으고 새로운 일을 기획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2018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사진을 찍었고, 표면적인 몸을 감각하는 과정에 대한 작업 <Surface name call>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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