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몫』을 선물 받았다. 2018년, 내가 총여학생회장이었을 적에 1년간 함께 학생회를 꾸렸던 집행부원이 줬다. 우리 대학 학생회에서 총여학생회 관련 회칙을 삭제하고 기구를 폐지한다는 안건의 총투표가 가결된 다음이었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계획한 업무를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한 채, 우리는 총여학생회 회원과 회원이 아닌 이들이 손으로 폐지당했다. 그래서 원래는 2019년이 밝을 때 임기를 마치며 받았어야 하는 선물을 2018년도 말 예상보다 빠르게 건네받았다.
막상 이 책을 읽은 건 얼마 전이었다. 내가 채 펴보기도 전에 가족이 먼저 읽겠다며 가져갔으나 그 이후로 다시는 돌려받지 못했다. 선물 받은 실물을 간직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한편으로 그때 당장 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랫동안 2018년도의 나와 내 주변에 대해서 곱씹고 이만큼이라도 소화하지 않았다면, 이 짧은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 덮어버렸을 것이다.
만성의 인력난과, 급하게 총여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나의 준비 부족과,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이닥치는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사건들, 그리고 완벽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칠 수밖에 없었던 ‘내 편 없는’ 나날들. 나는 여전히 학생회장으로 일했던 그해를 온전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천천히 뜯어보면 전부 그려볼 수 있을 테지만, 앞으로의 삶을 버텨나가기 위해서 일부러 기억을 몇 개씩 덜어낸 채 걷고 있다.
나는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해준 집행부원과도, 나의 메이트였던 부회장과도 따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 그해 총여학생회를 같이 꾸렸던 그 누구에게도 “그해 함께 일하면서 어땠어요?”라고 묻지 않았다. 나부터 어땠는지 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다. 그래서 『몫』의 첫 장을 펼치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 궁금했다. 그 집행부원에게 나는 누구였을까. 이 책 속의 정윤이었을까, 희영이었을까, 해진이었을까.
스무 살의 당신은 교지에 실린 선배 정윤의 기사를 보고 바로 이런 글,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교지 선배로서 정윤은 당신과 희영을 잘 이끌었지만, 여성 의제를 중요치 않은 문제로 취급하던 구성원들을 ‘이건 일개 여성 문제가 아니라… 기형적인 권력 구조에 관한 문제’라는 말로 설득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크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동갑내기인 희영은 글을 쓰는 작업을 처음 해 본 당신과는 다르게 면접날부터 익숙하게 글을 썼다. 여성 의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희영은 어느 날 5년 전에 일어난 기지촌 여성 살인 사건을 다루겠다고 했지만, 격앙된 정윤의 제지에 그 주제를 폐기했다. 이후 희영은 정윤을 피했다. 좋아하지만, 힘들다고 했다. 정윤도 그런 희영을 무시했다. 부쩍 바빠진 당신은 두 사람의 관계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읽을 때, 대학생 활동가라는(였다는) 나의 정체성이 계속해서 이야기의 안팎 경계를 흐렸다. 해진의 시선을 따라 풀리는 소설 속 교지 편집실의 이야기는 <A여자대학교에서의 집단 폭력, 일부 학생들의 문제인가>라는 글이 실렸을 무렵의 일이지만, 나의 시선을 따라가면 캠퍼스에 떠돌던 혐오 발언이 막 공론화되던 무렵이나 무수히 많은 A교수의 성폭력이 고발되던 무렵의 학생회실 이야기로 읽혔다. 읽으면서 바깥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질 정도로, 시기와 공간만이 아니라 인물과 그들 간의 관계까지 모두 그랬다.
정윤은 내 전임 회장단 선배들이기도 했고,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이기도 했고, 또 어떤 면은 실제 내 모습이기도 했다. 사명감이나 기대를 가지고 운동에 처음 발을 들였던 해진, 희영에게서 자신의 모습과 가능성을 찾던 정윤, 친구에게 위로와 인정을 받고 싶었던 희영. 또, 중요한 것을 뒤로하고 설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정윤, 기지촌 활동가가 되고도 당사자(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모른다’고 자길 꾸짖던 희영, ‘정말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쓸 줄 모르는’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해진….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최은영 작가의 인터뷰가 소설 뒤편에 짤막하게 실려 있는데, 그 제목은 “생략된 부분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작가 본인이 남긴 인터뷰라서 더 그렇겠지만 필요한 지점을 콕 찌른 말이라고 생각했다. 『몫』에는 세 사람이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이야기와 다시 마주친 순간만 쓰여 있을 뿐 세 사람 각자의 삶은 가려져 있다. 함께 글을 쓰던 해진과 희영과 정윤. 이 세 사람이 어쩌다가 “Fucking USA”를 듣고 희영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해진과, 사회운동을 하며 공허함을 느끼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해진에게 부친 희영과, 그리고 희영의 마지막 인사에 답하지 않은 정윤이 되었는지가. 나는 바로 그 생략된 부분에 세 사람이 서로에게 가졌던 ‘몫’의 존재가 드러난다고 느꼈다.
몫이라는 건 뭘까. 처음 대학 여성주의 활동을 시작했던 2017년에도, 경험 없이 회장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했던 2018년도에 나는 ‘몫’을 이 학교와 사회에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책임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를테면 과제 같은 거였다. 나에게 내 몫의 할 일이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그들 몫의 할 일이 있을 따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게 아닌 ‘관계 문제’로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때는 그 공간, 그 지형에서 그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자체가 그들에 대해 내가 가진 몫이라는 발상을 하지 않았을까. 나부터 그들에게 나의 무언가를 내주고 생각 이상으로 무언가를 받고 있었으면서.
다른 대학을 다니는 친구와 함께 대학 바깥의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결국 가장 중요한 게 인연이고 동료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몫』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이 책을 선물한 동료가 그때 내게 준 편지를 간만에 꺼내 봤다. 부회장이 주었던 편지도. 나는 여전히 내가 이들에게 남기고 간 게 무엇일지 모르고 그들이 당시에 나에게 뭘 주었는지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몫』에 생략된 이야기가 그랬듯이 내가 편지들을 다시 읽고 느낀 복잡한 마음과 흘린 눈물이 이들이 나와 나눠 가졌던 ‘몫’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이미 몇 번 실패한 다짐이긴 하지만 늦은 답장을 써볼까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희영의 존재를 꺼내 보는 정윤과, 그가 기댈 수 있도록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해진처럼.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원정 님은 “문학이 언제나 약자를 대변하길 바라는” 유니브페미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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