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미술계를 떠나버린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미술 작가 문상훈

문상훈 | 기사입력 2020/06/01 [19:51]

이제는 미술계를 떠나버린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미술 작가 문상훈

문상훈 | 입력 : 2020/06/01 [19:51]

※ 2020년 많은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다양한 페미니즘 주제를 예술로 표현하고 있고, 나아가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과 차별, 위계 등에 문제 제기하며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새로운 서사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언니에게,

 

어제는 전시 오프닝이 있었어요. 그날따라 날이 좋기도 했고 많은 선후배, 동기들이 참여한 전시여서 뒤풀이 자리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였어요. 서촌의 노가리집 야외에 테이블을 길게 깔고 앉아 맥주를 한 잔 두 잔 비워가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어요.

 

늘 그렇듯이, 약간의 자기 자랑과 신세 한탄이 섞인 이야기들이 오가던 중, 누가 먼저 꺼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사라진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미술 작가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학교 분위기 탓에 졸업하고 나면 소식이 끊기는 동기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저도 대수롭지 않게 옛이야기를 주고받았죠. 그러다가, 문득 언니의 이름이 들려왔어요.

 

언니, 언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언니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해요. 3학년 학기 말 전시 기간이었고 저는 1층 복도 구석에, 지나가다가도 발견하기 힘든 곳에, 한 해 동안 그린 드로잉을 전시하고 있었어요. 누가 와서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누군가 그곳에 있었고, 그게 언니였어요.

 

언니는 좁은 공간에 설치된 제 작업을 보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몸을 숙이고 한참을 있었어요. 저는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언니를 기다렸는데 다리가 저릴 정도였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요. 제가 기립성 저혈압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언니가 나왔을 때 언니 주변으로 별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해요. 별이 보였던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작업을 누군가 그렇게 공을 들여 봐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기쁘고 힘이 났어요.

 

▲ 문상훈, Sense of Touch, Single-channel video, 6m 58s, 2019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언니를 알기 전까지는 언니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바쁘게 다니는 유명 작가들의 전시 오프닝에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서 또 많은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어떤 소문에도 타협도 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저는 언제나 언니를 이해하기 어려웠죠. 또 선배들은 그런 언니를 뒤에서 ‘개념 없다’고 말했거든요. “남자를 좀 만나 보라”는 교수의 말에 분명한 불쾌함을 표현하는 ‘예의 없는’ 사람, 분위기에 뜬금없이 찬물을 끼얹은 사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언니의 흠을 잡던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개념’의 논리에 맞지 않으면 배제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들로부터 배제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죠. 생각해보면 그 ‘개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건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규율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틀이었는데. 저 또한 스스로 그 안에 갇혀서 틀 밖에 있던 언니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작 틀을 만든 그들은 ‘관리자 놀이’의 대가로 여러 소문을 통제할 수 있었단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지만요. 언니는 그들의 방식에 휘말리지 않으려 싸웠던 거였어요. 그들의 논리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두었고 어떤 식으로도 그들에게 힘을 넘겨주지 않았죠.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래서 언니가 그토록 빛나 보였나 봐요.

 

언니, 돌이켜보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절은 암흑의 시대였던 것 같아요. 학교에 다니고 사회에 진출하기까지의 10년 동안 이명박근혜가 집권했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라는 게 존재하던 때였어요. 어떤 것들은 억압당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많은 것들을 관용했어요.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평하는 수업 시간에 한 선배가 여러 여성의 허벅지를 부감으로 찍은 사진을 가져온 날 기억해요? 우리는 그날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강사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 작품의 미학적인 측면에 대해 1시간이 넘게 떠들었고, 결국 언니는 혼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요.

 

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돌아온 언니는 동성 연인의 서사가 담긴 사진을 보여줬어요. 그러자 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동성애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와 레즈비언에 대한 패티시가 담긴 질문만 쏟아져 나왔고, 언니는 묵묵히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강사는 작품에서 성애적 시선을 빼고 이야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죠. 성애적인 게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지만 그걸 제대로 알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기에 아무도 없었죠. 잘 모르는 소리만 오가고, 모르니까 침묵하고, 그렇게 언니의 발표 시간은 10분 만에 끝났어요.

 

이런 일은 사실 일상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특별하지도 않게 지나갔지만 그런 날은 늘 그냥 넘기기 어려웠어요. 그런 때는 인지하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여성임을 깨닫게 되고, 기록되지 않았지만 전해져오는 불평등의 순간을 마주하게 돼요. 우리는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내가 서럽지 않을 때도 서러웠어요. 그래서 때로는 그런 별거 아닌 수업 시간 하나로 며칠을 우울해했고요. 언니를 작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 시대가 그랬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작업실에 앉아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가끔 언니가 만든 작업을 볼 때마다, 그 작업에 제가 등장하기를 바랄 정도로, 언니 작업을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 언니가 작업을 그만두었다는 게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작업에 대한 고민보다는 동료를 깎아내리기 바빴던 작가들은 지금 큰 갤러리에서 전시도 수십 회 하며 잘살고 있는데 말이에요. 왜 언니에게는 더 많은 전시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요? 어떤 작가들은 몇 달 전 전시가 혹평을 받았음에도 그 후에 또 전시를 하고 있던데.

 

▲ 2019년 12월 문상훈 개인전 <우리는 끝없이 불화할 것이다> 전시 전경, 킵인터치서울


저는 작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해의, 그러니까 그때 언니 나이가 되어서야 말이에요. 그전에도 물론 전시도 했고 작업도 했지만, 처음으로 잘 갖춰진 갤러리에서 전시를 한 거였어요. 지금 돌아보면 작년 개인전에 아쉬운 점이 많아요. 하지만 어떻게 처음부터 잘하겠어요? 앞으로 잘하면 되는 건데 그 ‘앞으로’가 저에게 얼마나 찾아올지 잘 모르겠어요.

 

그제야 언니가 당시 제게 했던 말들이 이해됐어요. 작품을 보여준다는 것은 공간을 만들고 맥락을 만드는 것인데, 그건 한순간에 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고 했죠. 그래서 언니는 전시가 끝나면 늘 아쉬웠다고요. 경험이 많아지면 더 잘할 수 있는 것 같고, 또 전시 구성에만 신경 쓰기도 바쁜데 전시에 따르는 부수적인 일들로 인해 힘들다는 말도 했던 것 같아요.

 

언니, 언니가 꽤 이름난 미술관에서 전시 설치를 하고 돌아온 날 있잖아요. 네 캔에 만 원 하는 맥주를 사 와서 별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다 돌아간 그 날, 저는 그날 언니가 조금 부러워서, 언니가 하는 말들을 그냥 투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언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언니는 어쩌면 그날 이후 조금씩 미술을 하겠다는 마음을 접었던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날 만난 큐레이터가 언니에게 또 다른 전시를 약속하며 접근했던 그윽한 손짓과 눈빛. 그건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는데. 그때는 해시태그도 트위터도, 인스타그램도 없었다고 말하기엔 저는 너무 비겁하고 옹졸했어요. 함께 싸워주지 못해 미안해요.

 

나는 그날 우리의 대화가 엇나간 것이 종종 떠올라요. 언니는 얼마나 오랜 기간을 혼자 싸워야 했을까. 그런 생각이 이제야 들어서, 그때로 돌아가 언니와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졸업을 앞두고, 졸업 전시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알았던, 기대에 부풀었고 자신감에 차 있던 저를 보며 당신은 어떤 말들을 삼켰었나요? 저를 보며 짓던 옅은 미소는 과도한 자아를 내뿜던 저에 대한 피로감이었나요, 아니면 후배에 대한 배려였나요? 그것도 아니면, 저의 시대는 다를 것이라고, 그러니 제 앞날은 언니와 다를 것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나요?

 

저는 그 이후 졸업을 했고 회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은 언니가 늘 마주하고 있던 현실을 처음으로 느끼고 도망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미술계의 불공정함에 대해 토로하며 정작 작업은 다시 시작하지 못했어요. 그 이후로도 꽤 오랜 기간 저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우울해하고만 있었어요. 도저히 혼자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한 무리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소개받았어요. 그 친구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세상에 분노하고 있었죠. 하지만 자기연민에 빠진 저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행동하며 목소리를 냈어요. 혼자가 아니라 연대하며 조금씩 세상을 바꿔갔어요.

 

▲ 문상훈, 손, Genitals, Collaboration with variety photographer, Print on tracing paper, 2019


그 친구들을 만난 해에는 그러고 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엔 우리와 함께 암흑기를 버텨온 친구로부터 농구를 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그러다 농구단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공을 빼앗고 몸을 부딪치며 팀으로 함께 하는 구기 스포츠를 경험하면서 그동안 제가 경쟁을 피해왔단 사실을 알게 됐어요. 경쟁의 순간이 오면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알려주면서, 때로는 그에 전력을 다해 경합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구기 종목은 왜 남학생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나요? 저는 이 단순한 걸 알지 못해 너무 많은 순간을 물러서며 살았어요.

 

또 어느 날엔 드랙(drag)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드랙킹(Drag king) 존 존슨’으로 살아보기도 했어요. 드랙을 하면서 제 안에 있던 우상화된 남성성을 버릴 수 있었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짓눌려온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속도를 조절하는 법,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법, 자기연민에 빠져있지 않는 법, 선의의 경쟁을 하는 법, 자기를 먼저 챙기는 법은 모두 페미니스트들에게 배웠어요. 저는 하루하루 동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동료들과 함께하며 시대의 악몽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치유해나가는 것 같아요.

 

저는 생각해보면 계속해서 동료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동료는 지금 함께 하는 존재들일 수도 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언제든 연대할 수 있는 익명의 다수가 될 수도 있어요. 자신의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주는 그들이 있어서 저도 힘이 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수업 시간과 같은 악몽은 이제 없어요. 오히려 이제는 퀴어-페미니즘 서사로 작업을 한다고 하면, 그걸 읽을 수 있는 눈이 너무 많아져서 긴장하고 작업해야 해요. 계속 공부하고, 부족한 게 없는지 살펴야 해요.

 

며칠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동료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난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여자아이’만 나온다며 좋아했는데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그 아이가 스스로 정체화할 때까지는 모르는 거잖아요”라고 말해서 다시 한번 저의 부족함을 발견했어요. 예전에 언니는 퀴어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너무 낮은 단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해서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못 해서 힘들다는 말을 했죠. 이제는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걸 읽어줄 수 있는 관객도 많아졌어요. 우리는 이제 너무 기울어져서 오를 수도 없는 판 위에 있지 않아요. 언젠가는 평평해질 판 위에서 제대로 경쟁해야 해요. 그 판을 평평하게 만들어 준 건 모두 수많은 연대들이겠죠. 이젠 시대의 탓만을 할 수 없어요.

 

언니, 어느 날 페미니즘 미술 수업이 끝나고 왜 한국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작가가 없는지에 대해 한탄했잖아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잘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어쩌면 미술계라는 세계에 갇혀 오히려 바깥을 볼 줄 몰랐던 게 아니었을까요? 레즈비언 미술은 퀴어 인권의 역사만큼 수많은 활동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그걸 몰랐던 이유는 미술 학교 안에서 유명 미술관, 갤러리 전시만 다니고 권력이 있는 미술 잡지만 읽었기 때문이었겠죠.

 

간혹 퀴어문화축제에서 그들의 작품을 만나더라도 머릿속에서 은연중에 아마추어의 작업으로 폄하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활동가 중에는 예술 전공자도 많았고 익명의 활동명을 쓰는 작가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누구보다 진보적인 작품으로 세상에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목소리를 냈죠. 저는 뒤늦게나마 그들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작년 <레즈비언!> 전시를 열었어요. 전시 서문을 100장씩 4번이나 출력해두었는데 그 종이가 다 사라질 정도로, 불과 열흘 동안 많은 관객이 다녀갔어요. 이제 우리는 그들의 빛나는 활동을 기억하고 더 많은 작품이 나오도록 지지해줘야 해요.

 

▲ 2019년 서울 마포구 별관에서 열린 <레즈비언!> 전시 전경. (사진: 문상훈)


이런 걸 보면,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낸 시절보다는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아요. 여고생 팬티를 이야기하던 그 선생님이 시대를 모르고 피해자를 탓하는 말을 썼을 때, 이제는 침묵하지 않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언니,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퀴어-페미니스트 친구들과 연대들, 저를 지지해줬던 선생님, 동료들 덕분이었어요. 그리고 변화를 만들어준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에요.

 

지금도 먼저 목소리를 내준 사람들 덕분에 저는 앞으로도 작업할 힘을 얻어요. 그들이 예술계를 변화시켰고 또 그 변화 덕분에 저의 기획도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도 제 작업을 봐주지 않았을 때 들여다 봐준 언니가 있어서 계속 작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저의 이야기를 보고 들어주는 많은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저는 이제 더는 시대의 탓을 하지 않고 힘내서 작업해보려고요. 그때 언니가 저에게 힘을 주었던 것처럼, 저의 이야기를 보고 어딘가에 있을 언니도 힘을 내기를 바라요.

 

가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마다 언니가 떠올라요. 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지금은 연락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언니, 언니는 미술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제가 봐온 어떤 사람보다 빛났던 사람. 언제 어디서라도 이 편지를 받아본다면 이제는 당신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그리고 지지해줄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으면 해요. 이제 다시 나와 우리와 연대해요. 그리고 당신이 빛내 만들던 걸 다시 보고 싶어요.

 

-2020년 5월, S로부터.

 

※ 편지 속 화자와 언니는 실존 인물이 아니며, 미술계에서 필자가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토대로 내용을 재구성하여 편지 형식의 글을 작성한 것입니다.

 

[필자 소개] 문상훈. 미술 작가. 가끔 기획도 한다. <레즈비언!>, <실패전>을 기획했으며 개인전 <우리는 끝없이 불화할 것이다> 외에 <퀴어락 QueerArch>, <씨 뿌리는 여자들> 등의 전시를 했다. 드랙킹콘테스트 1,2회에 참여하다가 2019년에는 <DRAGx여성국극>의 기획 및 각색팀으로 일했다. 정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매번 새롭게 만들어가며 경계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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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0/06/10 [11:11] 수정 | 삭제
  • 되게 감동받게 되네요. 몇번을 더 읽게되네요.
  • 단무지 2020/06/04 [18:41] 수정 | 삭제
  • 감동적인 글이네요~
  • 우여 2020/06/03 [21:05] 수정 | 삭제
  • 마음이 쿡쿡 쑤시고 물렁하게 되는
  • 기억 2020/06/02 [00:15] 수정 | 삭제
  • 편지가 정말 리얼하네요. 고구마 백개 먹고 사이다 못 마신 것 같았던 시간들이 떠올라 잠시 묵념(?)을 올렸습니다. 희망적인 얘기로 끝내주셔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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