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업계도 ‘워라밸’ 가능해야죠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혜진: 건축설계사, 베를린

하리타 | 기사입력 2020/06/12 [20:09]

건축업계도 ‘워라밸’ 가능해야죠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혜진: 건축설계사, 베를린

하리타 | 입력 : 2020/06/12 [20:09]

※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혜진 이주 이력서 

 

이주 7년차

2011-2012년 슈투트가르트에서 1년간 건축학과 교환학생

2013-2014년 베를린에서 어학연수 및 대학원 진학 준비

2014-2016년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학 석사과정

2016-2017년 베를린 소재 소규모 설계 사무소에서 근무

2018-현재 350여명 규모 글로벌 건축회사 베를린 지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

 

야근 잦은 한국을 떠나 ‘일과 삶’ 두 마리 토끼 잡으러 독일행

 

혜진은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난다. 일기를 쓰며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발코니 식물들에 물을 준다. 조깅이나 요가, 명상으로 하루를 열기도 한다. 이렇듯 에너지가 많은 아침 시간을 활용해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하고 난 뒤, 회사로 출근한다. ‘좋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니 아침에 가뿐히 일어날 수 있고, 퇴근 후에는 부담없이 편히 쉴 수 있다. 혜진은 강도 높은 정신 노동인 건축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자신만의 ‘워라밸 생활 습관’ 덕분에 큰 스트레스 없이 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야근이 너무나 잦았던 한국 직장을 다닐 때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베를린에서 산책 중인 혜진의 모습. 베를린은 다른 독일 도시에 비해 변화와 다양성에 열려있다. 도시는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벌이는 수많은 실험과 영향력을 받아들이며 매일 변화해간다. 건축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뷰이 제공

 

한국 대학에서 건축과를 다니며 실무 경력도 함께 쌓아가던 혜진은 ‘내가 건축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숱하게 했다. 업계에 야근 문화가 뿌리깊어 오래도록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없는 삶을 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연이은 설계 공모전 참가 때문에 사무실들은 밤낮없이 돌아갔고, 윗사람 눈치 보느라 하는 불필요한 야근도 많았다.

 

인턴인 혜진은 정시에 출근해도 막상 제대로 일할 수 없었다. 작업 지시를 내려줄 상사들이 전날 밤샘 근무 때문에 오전 늦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후 3시가 넘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밤 10시가 되어서야 퇴근하고, 다음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개선할 방법은 없는지, 늘 이럴 수밖에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대다수 업계 사람들은 ‘건축 일이 다 이렇다’는 반응이었다. 건축설계 자체는 적성에 맞고 즐거운 일이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혜진은 외국에 나가 건축대학원에 진학하고, 이후에 현지에서 취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1년간 교환학생으로 가 있었던 독일에는 영감을 주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많았고, 사회 분위기가 한국보다 느리고 여유로워 마음에 들었다. 이주는 시간과 노력 면에서도 효율적인 선택 같았다. 한국에서 취업 후 3~5년 경력을 쌓고 건축사자격시험을 치는 것이나, 독일에서 어학 1년, 대학원 2-3년 후 취업, 실무 2년 끝에 건축사자격발급(신청제)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엇비슷할 것이었다. 혜진은 새로운 경험과 여유로운 삶에 앞날을 걸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싸들고 간 숙제,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건축 

 

혜진은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원서를 넣을 때 사실 건축과만을 지망했다. 다른 이과계열 전공과 달리 예술과 기술, 인문학과 공학 등 다양한 분야가 접목된 학문이라는 점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또 막연히 건축물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첫 학기 때부터 이미 혜진은 공부에 큰 재미를 느꼈고, ‘내가 하고 싶은 건축’ ‘좋은 건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리노베이션(Renovation; 건물 구조체의 변경 없이 시설물의 노후화 억제 및 기능 향상을 위해 외관이나 내부 일부 혹은 전체를 개‧보수하거나 증‧개축하는 것을 의미. 오래된 건축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존 및 개선시키는 것)이 화두로 떠올랐다.

 

“한국은 건물의 생애 주기가 너무 짧아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건축물이 담고 있는 가치가 큰데, 저평가되어 있어요. 서울에서 나고 자라면서 아직 더 쓰일 가능성이 있는 건물들도 재개발로 다 없어지는 것을 많이 목격했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하지?’ ‘이런 문화가 바뀔 수는 없을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죠. 오래 지녀온 것을 보존하고 오히려 부각시키는 건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잘하고 있거든요. 우리는 무조건 빨리, 싸게 건물을 지어 올려 수익을 내려다 보니 허물고 새로 짓는 경우가 많고 ‘한국 건축’만의 정체성이 없다는 지적도 많아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학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수업들을 골라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로 ‘Stahlversuchshaus’ 프로젝트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리패브리케이션(Pre-Fabrication; 공장에서 골조를 생산하고, 현장에서는 조립만 하는 공법)으로 지은 건물에 대한 리노베이션 안을 만드는 과제였다.

 

본래 설계자는 ‘거주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입면 변경이 가능한, 거주자의 개성을 반영하는 집’을 의도했지만, 대규모 아파트 같은 획일적인 공간이 보편화된 지금은 그런 건축물이 좀 다른 맥락으로 읽힌다. 혜진은 과거 모더니즘의 산물인 그 건물의 구조와 기본 요소들은 보존하고 내부 공간을 오늘날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바꿔서 프리패브리케이션을 둘러싼 시대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다. 화장실과 부엌 등 기본 공간을 유지하되, 거주자가 이웃과 소통하고 자기 삶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 공간을 추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 혜진이 석사 1학기 때 직접 만든 Stalversuchshaus 프로젝트 모델 사진


엔지니어와 건축주 사이, 독일과 한국 사이에서 다리 역할

 

혜진은 한국에서 쌓은 실무 경력을 활용해 석사 재학 중에 이미 베를린 소재 소규모 건축설계사에서 학생 인턴(Werkstudent)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3일은 학교, 3일 회사를 다녔고, 졸업 후에 그 곳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제안 받기도 했다. 현재 근무하는 곳은 2018년에 이직한 두 번째 직장이다. 뮌헨, 베이징, 베를린 3곳에 지사를 둔 총 350여명 규모의 건축회사인데, 사무실, 대학 연구실, 병원 등의 업무 공간 프로젝트를 주로 진행하며 기초 설계부터 완공 후 사후관리까지 폭넓게 담당하는 큰 규모의 조직이다. 체계화된 시스템과 넓은 업무 스펙트럼 덕분에 작은 설계사무소에서는 얻지 못했던 배움을 많이 쌓는 중이다.

 

혜진의 업무는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실시 설계 담당으로써 기본설계도면을 기술적 요소가 들어간 실시 도면으로 구축하는 일을 한다. 엔지니어들이 건물에 적합한 배관이나 배선 등 기능적인 부분을 제시하면 혜진은 여기에 아름답고 조화로운 디자인을 덧입히는 것이다. 엔지니어 및 다른 설계사들과 수시로 회의하며 최적의 안을 찾아내고,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ling) 소프트웨어 등을 사용해 설계도면을 수정 보완해 나간다. 건축주에게 변경 내용을 알리고 최종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도 해야 한다.

 

두 번째로, 회사가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건축설계사 및 코디네이터로 활동한다. 혜진이 소속된 독일 회사는 한국 건축사 자격(대한건축사협회가 주관하는 국가 자격)이 없어 우리나라에서 단독으로는 건축물을 지을 수 없다. 따라서 주로 현상설계 공모전에 참가하고, 당선될 경우 한국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현지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알아야 공모전에서 유리하고, 파트너십 프로젝트를 할 때는 문화 차이로 인해 한-독 기업 간 오해와 갈등의 소지가 많다는 점에서 두 나라의 법제도와 문화,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혜진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2년 전 저희 회사의 도시재생 프로젝트 마스터플랜이 당선되었는데, 아직까지 한국인 직원은 저 뿐이라서 한-독 회사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 정말 많은데, 일이 잘 안 돌아갈 수록 대화가 더 많이 필요해서 저의 일이 늘어나요. 중간 입장이라 고충이 많습니다. 양쪽에서 오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듣고 각 측에 다시 부드럽게 전달해야 하니까요. 감정 소모도 많아요. 통제가 어려운 건축주와 갈등이 생길 때 특히 난감한데, 우리나라는 계약 상 ‘갑’의 추가적인 요구가 많은 편이고 철저히 원칙대로 움직이는 독일 회사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독일인 동료들이 한국 문화를 비판하면 어쩔 수 없이 속상한 마음이 듭니다.”

 

▲ 회사에서 설계 도면과 모델을 앞에 두고 프레젠테이션하는 혜진의 모습  ©인터뷰이 제공


혜진의 다문화 역량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지만, 외국인으로서 아직 낯설고 어려운 점들도 많다. 특히 독일인들이 공유하는 상식을 잘 몰라서 의사소통에 지장이 생길 때 당혹스럽다. 가령, 상사가 칭찬을 하면 혜진은 한국에서 으레 하듯이 ‘아, 아니에요. 앞으로 더 나아져야죠’라고 답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영 석연치 않았다. 나중에 독일 친구와 대화하다가 알게 된 바로는, 독일 사람들에게는 그런 대답이 상대방의 칭찬이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다소 거만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혜진이 의도한 겸손함의 표현이 정반대로 읽힌 셈이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은 뒤에는 의사소통을 할 때 자기검열을 거치게 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도 문화적 맥락을 읽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회사 조직에서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는 이른바 ‘멘토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처음엔 낯설었다. 아직 경력이 부족한 직원에게 업무내용이나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물론, 조직과 업계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독일인들은 상사라 하더라도 직원의 업무능력이나 성과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나 조언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 혜진의 경험이다. 개인의 방식과 업무영역을 존중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아직 경험이 적은 젊은 직원으로서 자기 능력과 경험치를 파악할 기회가 적어 막막하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동료나 상사와 피드백을 주고 받고 지적 받은 부분을 디펜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독일에서는 그런 성장이 오롯이 혼자만의 과제가 되는 것 같아요. 더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매사 너무 엄격하면 그것도 피곤하고요.”

 


[독일의 건축 단계 9가지와 혜진이 본 독일 건축의 장단점] 

 

혜진은 독일과 한국의 건축 시스템의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로 ‘건축사의 시공 및 감리 참여 여부’를 꼽았다. 완성된 도면을 시공사에 넘기는 것으로 보통 역할이 끝나는 한국의 설계(회)사들과 달리, 독일에서는 설계사무소가 시공과 감리(공사현장 관리감독)에도 대부분 긴밀히 관여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바닥재나 창틀, 문고리에 이르기까지 설계사의 의도와 감각이 일관되게 반영되어 결과적으로 건물의 미적 구조적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 혜진이 좋게 평가하는 부분이다.

 

‘건축사 및 엔지니어 비용 책정을 위한 건축 서비스 단계’(Leistungsphasen nach der Honorarordnung für Architekten und Ingenieure)에 독일 건축의 이런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8번을 시공업체가 별도로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1. 기본결정 -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규모 검토

2. 사전계획 - 1번 규모 검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 방향 및 컨셉 결정

3. 기본설계 - 컨셉 설계를 바탕으로 실제 법규에 맞는 건물 설계

4. 승인계획 – 허가 기준에 맞는 도면 및 서류 작성

5. 실시설계 – 허가 내용을 바탕으로 시공 설계  

6. 시공준비 - 시공 준비 및 자재 조달

7. 협력업체 선정 - 6을 바탕으로 시공 업체 선정 및 세부 계약

8. 건축현장 감리 - 시공 및 현장 감리

9. 건축물 관리 - 준공/완공 후 사후 관리

 

혜진은 독일 건축 시스템의 단점도 언급했다. 건물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질 때가 많다. 어떤 프로젝트의 경우, 한국에서는 2~3년이면 끝날 일들이 10-20년에 걸쳐 진행된다고 한다. 그러면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건축사들은 수십년을 활동해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해보지 못하고 담당한 소수에만 시간과 노력을 쏟다가 은퇴 시기를 맞게 된다.


 

장소와 시스템에 구애 받지 않는 전문가 되고자 ‘건축사’ 희망

 

혜진은 앞으로 한국과 독일 등지를 오가면서 활동하는 건축가로 성장하고 싶다. 학업과 취업을 무사히 해냈음에도, 지난 몇 년간 한국과 독일 중 영구적인 주거지를 택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혜진을 괴롭게 했다. 직업적 성장과 여유로운 일상, 두 가지가 다 가능한 독일 생활이 흡족하긴 하지만, 그런 삶의 만족과 행복을 함께 누리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게 아쉬웠다. 그렇다고 귀국해서 한국의 속도와 리듬에 다시 적응하기엔 이제 ‘너무 멀리 온 것’ 같았다.

 

“미래에는 공간과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살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일 수 있어야 하겠죠. 그 시작점은 건축사 자격을 얻는 거예요. 그 다음에 개인 사무실을 내고 한국의 건축사 파트너들과 다양한 협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독일에서 건축사 자격 발급은 각 주 건축가협회가 주관하는데, 실무 2년 경험, 협회에서 제공하는 세미나 70시간 이수와 같은 자격요건이 몇가지 있다. 작년에 혜진은 ‘건설 현장 관리’에 대한 교육과정 등 총 9개의 세미나에 참석해 72시간을 이수했다. 그 밖에도 회사에 소속된 건축설계사는 연회비 250유로를 내면 다양한 유/무료 워크숍과 네트워킹 이벤트 등에도 참여할 수 있어 커리어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건축은 엄격한 인허가를 받는 분야인 만큼 설계사로서 새로 바뀌는 법규나 정책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혜진이 다니는 회사는 규모가 커서 자체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매주 금요일 아침 건축 업계 현황에 대해 알리는 세미나가 열린다.

 

영감의 원천은 ‘사람’, 호스피스 자원활동하며 발견한 것

 

작은 점.선.면과 기호들에서 출발해 오류가 허용되지 않는 치밀한 수치 작업까지 동반되는 건축 설계 일은 비전문가의 눈에는 복잡하고 난해해 보인다. 그런데, 혜진에게 어디서 어떻게 일에 대한 영감을 얻는지 물었을 때 의외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나 자신의 습관 같은 사소한 곳에서 찾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해요. 예를 들어, 독일로 온 직후 1년간 어학원을 다닐 때 호스피스 자원 봉사를 했는데, 좋은 자극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회 각계각층에서 봉사자들이 찾아왔더라고요. 저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 달랐어요. 호스피스 병원이라는 같은 공간을 두고 각자 인식하고 느끼는 바에 차이가 났어요.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게 정말 흥미로웠어요. 유럽에 아름다운 도시나 고풍스런 건축물도 좋지만, 저는 평소에 주변인들의 개인사를 들으면서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공간, 필요한 공간을 머리 속에 떠올리곤 해요.” 

 

▲ 혜진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건축물로 꼽은 베를린 중심부 티어가르텐(Tiergarten; 동물정원) 내 공동 주책. 건축가 프라이 오토(Frei Otto)의 작품 ‘Ökohäuser.’ 골조와 내부 시설을 완성하고 파사드 등 나머지 요소는 입주자들이 의견에 따라 지었다. 집 안에 자연을 최대한 담아내고 건축물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은 최소화하는 것이 기본 컨셉이었다.   ©출처: solidar-architekten.de


“얼마 전에 난생 처음으로 침대를 방 모서리에 바짝 붙여놓는 방식에서 벗어나 봤어요. 침대 한 쪽에 요가매트를 상시 깔아두고 싶어서 벽에서 떼어 본 것인데, 그게 방 분위기는 물론 익숙했던 제 동선까지 바꾸더라고요. 아, 내가 건축을 그동안 뭔가 거창한 일로 대했구나.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차이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구나. 그런 깨달음이 왔어요.” 

 

‘내 욕망에 솔직한 집’ 가꾸기는 건축가 역할과도 맞닿아 있어

 

혜진은 한국에서 내내 부모님과 한 집에 살았고, 독일에 와서는 쉐어하우스들을 오갔다. 오는 6월 말, 처음으로 1인 가구가 되어 자기만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 건축 설계사는 자기 집을 어떻게 고르고, 어떤 마음으로 가꿀지 궁금해서 ‘혜진스러운 집’을 만드는 원칙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고 있어요. 요즘 트렌드인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방을 꾸며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 자체는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그렇게 두고 생활하기는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자주 쓰는 물건들을 여기저기  늘어놓고 있었어요. 저한테는 미니멀리즘이 안 맞는 거죠. 그래서 편리함, 그리고 내 욕망에 솔직한 것, 이렇게 두 가지를 중요한 원칙으로 세웠어요. 고객을 위해 집을 지을 때도 비슷해요. 건축주들이 원하는 건물을 얘기할 때 자기 성향이 아닌 취향을 기준으로 하곤 해요. 그 말대로 지으면 보기엔 마음에 들어도 들어가 살기엔 좋지 않을 수 있어요. 건축주가 자기 진짜 성향과 욕구를 들여다보게 돕는 것도 건축사의 중요한 역할 같아요.”

 

▲ 혜진이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 설계한 단독 주택. 부부와 세 자녀의 집으로, 건축주와 신뢰를 쌓고 대화한 끝에 ‘소통을 촉진하는 열린 공간’과 ‘대청마루’를 핵심 요소로 넣어 지었다.


독일의 집들은 작은 아파트이든 주택이든 그 안에 주방이 설치 안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선 흔한 빌트인 가구도 없다. 텅텅 빈 집 내부를 입주자가 직접 채워 넣어야 한다. 혜진도 이번에 새 집에 맞춰넣을 주방을 고르며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발품을 팔아가며 1인 가구로 독립하는 이 과정이 혜진을 더 좋은 건축설계사로 성장시켜줄 게 분명하다. ‘힘든 시기에도 나를 지탱해준 존재’였던 발코니 식물들도 혜진과 함께 새 집으로 이사한다. 과묵한 녹색 반려자들은 혜진이 집 밖에서 자잘한 상처를 입고 돌아올 때마다 늘 그 자리에서 다정한 치유의 숨결을 보내줄 것이다.

 


[독일에서도 녹록지 않은 여성 건축가로 살아남기]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건축 분야는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육체 노동으로 돌아가는 건설 현장은 물론, 현장 인력을 관리하고 역시 남초업계인 건축 자재 및 시공업자들과 협업해야하는 설계도 아직까지 ‘남성적인 일’이라는 인식이 우세하다. 통계는 이를 확증한다. 독일에서 건축학과 졸업생 남녀 비율은 비슷하지만 건축사협회 등록자 중 1/3만이 여성이다. 연방건축사협회 통계에 따르면, 10인 이상 건축 사업장 중 1%가량만 여성 대표가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 건축사 중 여성 비율은 단 8.8%이다.(출처: 2014년 건축잡지 WIDE AR발표 자료)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1979년 제정)은 현재까지 40명이 넘는 건축가에게 수여됐지만, 그 중 여성 수상자는 단 5 명(2004년 자하 하디드, 2010년 세지마 가즈요, 2017년 카르메 피젬, 2020년 이본파렐,셸리 맥나마라)에 불과했다. 건축 비평 분야도 남성들의 시각에서 남성들이 주축이 되어 굴러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혜진은 여성들이 건축계에서 오래 살아남기 힘든 주된 요인으로 1)잦은 야근 및 격무로 인해 일-가정 양립이 어렵고 2)젠더 감수성이 부재한 건설 현장에서 성차별 및 폭력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을 꼽았다.

 

혜진은 ‘웬만큼 기가 세지 않으면 버티기 어렵다’는 업계에서 좀 다르게 일하는 여성들을 눈 여겨 본다고 했다. 현장 감독을 할 때 설계사들이 으레 위계질서에 따른 권위를 사용해 건설 노동자들을 ‘부리듯’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들은 경청하고 돌보는 방식, 보다 수평적인 소통을 통해 역할을 수행하는 경향이 보인다. 소위 ‘부드러운 카리스마’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공격적인 논쟁을 통해 일을 진행시키는 설계 사무실에서도 여성들은 감수성을 발휘해 격앙된 감정으로 인한 분쟁을 방지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노동자의 권리와 조직의 필요가 충돌할 때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편에 서는 것도 일-가정 이중의 압박을 겪어본 여성 관리자일 때가 많다고 한다.

 

물론 섣불리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일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돌봄과 소통, 평등이 여성성’이라는 도식화도 위험하다. 다만 뒤늦게 이 분야에 진입한 여성들이 현장에서 무엇을 불편하고 불리하게 느끼는지, 나름의 역할 수행 과정에서 조직과 시스템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면밀히 기록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은 집단의 소수자로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여성들이 함께 모여야 가능할 것이다.

 

▲ 독일의 건축잡지 Baumeister의 B8/17호(2017년 7월) 표지 이미지. 4명의 저명한 여성 건축가들과 여성들이 설계한 5개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 건축가에게는 어떠한 전략들이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다뤘다.


그런 사례는 지난 20년간 꾸준히 늘어왔다. 독일에는 지역마다 여성 건축인(도시계획가, 엔지니어, 조경사, 건축설계사 등) 네트워크가 조직되어 다양한 교육과 교류가 이어지는 추세이다. 베를린 지역의 ‘n-ails’, 북부 지역 ‘pia e.V’, 중부지역에는 ‘architektinnen-initiative’ 등이 있다. 각 주의 건축사협회들도 하나 둘 씩 젠더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설하고 있다.

 

한편, 유럽연합의 대표적인 교육지원 프로그램인 ‘Erasmus +’는 건축 및 건설 현장에서 젠더 평등 인식을 제고하고 우수사례를 공유하고자 ‘YesWePlan!’이라는 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다. 개별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부터 정책입안자들을 위한 분석도구, 전문가를 위한 커리어계발지원까지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주도로 슬로베니아, 스페인, 프랑스와 독일이 협력해 2021년 10월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이후 결과보고서를 발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무렵부터 한층 역동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 여성 건축가가 쓴 책 <우리는 여성, 건축가입니다>(Where Are the Women Architects? 눌와, 2018)가 번역 출간되었고, 여성 건축인 집단 ‘여집합’은 ‘빌딩롤모델즈’(Building Role Models) 프로젝트를 통해 16명의 여성 건축인과 대담을 진행하고 이를 엮은 책 <빌딩롤모델즈-여성이 말하는 건축>을 출간했다.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현재 독일 프라이부르크 거주. 그 동안 일다에서 <29살, 섹슈얼리티 중간 정산><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 독일 여성 난민들의 말하기><하리타의 월경만남>을 연재했으며, 저서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동녘, 2017)>가 있다. ‘이주’라는 삶의 모험을 함께하고 있는 이웃 여성들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이 이번 연재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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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기맛 2020/06/19 [18:03] 수정 | 삭제
  • 오, 멋져요! 프로젝트 사진도 보여주시고~~ 기사에 소개된 티어가르텐도 검색해보았어요. 흥미로운 건축들이 많네요.
  • 독자 2020/06/16 [17:10] 수정 | 삭제
  • 맞아요 윗사람에게 칭찬받으면 아니에요, 소리가 절로 나오죠. 기쁘게 고맙다하면 될 것을 왜 그런 겸손을 떨게 체득한 걸까요. 독일에선 오만한 걸로 보인다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 ANNA 2020/06/14 [11:25] 수정 | 삭제
  • 건축학과 간 친구(여자) 생각이 나네요. 저도 관심이 있었는데 건축 분야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된 건물이 없다는 거. 안그래도 한국은 전쟁통에 역사적인 건축유산이 거의 사라졌는데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무너뜨리고 새로 짓는 게 너무 당연하게 되어버린 것 같아요. 건축폐기물 문제도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새집증후군이 무서워서 우리 가족은 일부러 오래된 건물을 선호하는데요... 시간이 담긴 건축에 대한 얘기가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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