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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알려진 이후, 디지털 성범죄와 더불어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를 막을 대책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영향으로 지난 4월 말, 사이버 성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n번방 방지법’(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형법 개정안,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이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그 중엔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만13세 미만에서 만16세 미만으로 상향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19세 이상의 성인이 만16세 미만인 사람과 성관계 등을 할 경우,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처벌된다.
이번 형법 개정으로, 만 16세 미만 청소년 대상 성범죄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용이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회가 강간죄 판단 기준을 폭행, 협박 등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꿔야 한다는 반성폭력 운동 진영의 강력한 요구에는 응답하지 않은 채,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강간죄가 성립하는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버린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
‘연령’만이 위계인가? 성적 위계만이 문제인가?
의제강간은 성폭력이 성립하는지 여부에서 당사자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해당 연령 기준에 속하는 이들에겐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양지혜 공동대표는 “청소년이 어떤 방식으로 성과 연애를 경험하는지, 그 과정에서 위험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식의 권리 보장이 필요한지에 관한 이야기 없이, ‘성범죄가 심각하다’, ‘엄벌해야 한다’는 방식으로만 귀결되는 거 같아서 아쉬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양지혜 대표는 “여성 청소년이 (성적으로) 무지하고 순결하다는 이미지가 오히려 여성 청소년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근간”이라고 지적했다. “여성 청소년은 ‘안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배우고 성을 멀리해야 할 것으로 교육 받지만, 지속적으로 성적 대상화와 착취를 경험한다”는 것. 여성 청소년은 그렇게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정작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 보거나 표출하는 것에는 제한을 받는다.
“청소년이 자원을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그냥 ‘너희는 자원이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판단하고 동의할 수 있고, 청소년 관점에서 성적 실천이 해석될 수 있는지 고민의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양지혜 대표는 의제강간 관련 논의가 연령에 머물지 말고 확장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연령만이 위계를 만드는 요인이 아닐뿐더러, 성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많은 관계에서 청소년들은 비청소년과의 위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위계를 어떻게 다루고 협상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
여성의 의사(동의)가 존중되지 않는 사회
우리 사회는 미성년자가 아니더라도 여성의 의사(동의)를 존중하지 않는다.
“사실 성관계에서 ‘동의’라는 게 너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그동안 성폭력과 관련해 동의 여부를 현행법 체계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고, 여전히 반영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나영 대표는 “지금 성폭력은 폭행 또는 협박을 기준으로 두고 있고, 그걸 피해자가 입증해야 성립된다. 그러니까 지금 법은 피해자의 위치보다는 가해자의 행위를 중심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짚었다.
나영 대표는 ‘동의’를 기준으로 성폭력 문제를 판단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피해자를 누군가에 의해 소유된 사람, 누군가에 의해 소속된 사람 혹은 누군가의 보호와 통제 하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율성을 지닌 한 개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 가해자의 행위를 기준으로 두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맥락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3) 음란행위를 처벌하는 ‘국가-개인’의 구도에서, 개인에게 행해진 폭력의 맥락과 사회적 조건을 문제로 삼는 ‘국가-가해자-피해자’의 구도로 바꿔야 한다. 4) 폭력의 개념을 폭행이나 협박인 아니라, 개인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다뤄야 한다. 5) 보호를 받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선 안 되며,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적 권리를 침해 당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나영 대표는 “성적 권리란 성과 몸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권리, 노동하고 자립할 수 있는 권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권리가 보장되는 조건 하에서야 ‘동의’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누가 동의할 수 있는가?’라며 개인을 중심으로 동의 역량의 기준을 따졌다면, 이제 우리는 ‘동의의 조건을 만드는 게 무엇인지, 이를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을 요구해야 한다.”
장애여성에게 동의란?
미성년자가 아님에도 항상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다. 장애여성이 그들이다. 형법상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은 폭행, 협박이 없어도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인한 ‘항거 불능’ 상태가 입증되면 상대방을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이 법은 장애여성을 성폭력 범죄로부터 ‘보호’하고 있을까?
폭행, 협박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다고 되어있으므로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이 수월할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 어려운 쟁점을 규명해야 한다.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의 민들레 활동가는 “우선 피해자가 장애로 인해 ‘항거 불능’ 또는 ‘항거 곤란’ 상태에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게 어떤 상태인지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피해자는 ‘전형적인 피해자상’에 맞춰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며, 그것이 충분하지 않을 때는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 “가해자가 (피해자의) 장애로 인해 항거 불능, 항거 곤란 상태를 이용했음을 검사가 입증”해야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장애를 몰랐다고 하거나, 서로 합의된 성관계였음을 일관되게 주장하면” 처벌이 어려워진다. 결국 “장애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인정 받으려면, 누구나 장애인이라고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의 장애를 인정받아야 하고, 어떠한 저항도 할 능력이 없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원래 이 법의 취지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면, 폭행 협박이 없었더라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성행위라면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법정에서는 장애인 피해자가 자신이 ‘항거 불능’ 또는 ‘항거 곤란’한 상태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그 상황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증명해야 하고,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가해자는 처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력한 존재’임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은 결국, 장애여성의 성적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장애여성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권리가 있는지, 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디에 도움을 요청하는지 배울 기회에서 배제된 경우도 많다. 제한적이고 통제된 사회 관계 속에서, 장애인이 경험하는 폭력은 장기간 은폐된다. 거기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유일한 물적, 인적 자원일 경우에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을 호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들레 활동가는 “실제로 ‘동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동의 능력이 있는가 여부가 아니라, ‘동의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과 조건이 필요함에도, 이런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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