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K-pop)이 세계를 장악했다는 유난스러운 말이 이제 익숙해질 정도로 케이팝의 영향력에 관한 얘기가 많다. 미국에선 팬덤의 규모가 이제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커졌고, 아시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유럽, 남미, 중동 지역 등 세계 각국에 케이팝 팬이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케이팝의 인기를 분석하거나 케이팝 팬덤과 그 영향력에 관한 논의를 할 때 여전히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케이팝과 ‘퀴어함’(Queerness) 그리고 퀴어 팬덤이다.
케이팝과 퀴어의 만남, 퀴어돌로지 1세대의 시작
지금까지 주목 받지 못했던 논의의 포문을 여는 <2020 퀴어돌로지>의 첫 번째 세미나 “케이팝과 퀴어의 만남”이 지난 20일 서울NPO지원센터에서 열렸다. ‘동시대의 퀴어한 감각’을 주제로 전시와 스크리닝, 메일링 등 다양한 온/오프라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아트콜렉티브 서울퀴어세제션이 주최한 행사다.
이 자리에선 퀴어와 케이팝이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역사를 훑고, ‘팬픽레즈’와 ‘디바게이’에 대한 논의도 끄집어 냈다. 현장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의견 공유와 질문이 쉴새없이 올라올 정도로 분위기가 뜨거웠다.
케이팝과 궤도를 함께 해 온 팬코스(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외모와 스타일, 패션뿐만 아니라 말투 및 분위기 또한 모방하는 것), 팬픽(팬들이 쓴 소설로 아이돌 그룹 내 멤버들의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루며 Boy’s Love 코드를 차용함), 커버댄스(팬들이 아이돌의 퍼포먼스/춤을 따라 하는 것), 알페스(Real Person Slash, RPS. 팬픽과 비슷하지만 팬픽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연성’, 창작하는 팬들의 놀이) 등 케이팝 문화 속엔 늘 퀴어가 있었다.
1990년대 수도권 레즈비언의 ‘신공문화’는 케이팝 아이돌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관련 기사: “‘신공’을 아시나요? 그 시절은 정말 흑역사일까”, 일다 2019년 10월 19일자) ‘팬픽이반’이라는 말은 학창 시절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접해본 용어다.
“세대론으로 읽는 케이팝의 퀴어니스”라는 주제로 발제를 한 아이돌로지(idology.kr) 필진 스큅과 마노는 그 역사를 조금 더 세부적으로 탐색했다.
먼저 이들은 퀴어가 케이팝을 좋아하게 되고 빠져들게 된 이유에 대해 “케이팝이 한국 대중문화 내 마초성이 소거된 ‘비남성성’의 지대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애중심의 사고로 본다면, 예쁘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고 무해해 보이는 남성아이돌의 모습이 10대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에게만 어필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여성상’과 ‘전형적인 남성상’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을 대입하기 어려웠던 많은 퀴어여성에게 마초성이 소거된 남성아이돌은 “자기 자신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이미지로 다가갔다”는 해석이다.
그렇게 케이팝과 만난 퀴어들은 1세대 아이돌 시대에 “BL(Boy’s Love) 코드가 차용된 팬픽을 쓰고 읽는 ‘팬픽레즈’와 여성아이돌의 디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디바게이’”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 문화는 2세대 이후 변화를 맞게 된다.
마노는 1세대 팬덤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청소년 퀴어문화로 소비되었던 팬코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2세대부터 시작된 산업 구조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짚는다. “1세대 아이돌과 팬은, 주로 신격화되고 추앙 받는 존재와 그를 열렬히 신봉하는 ‘팔로워’(follower)의 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2세대로 이동하면서 아이돌이 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서는 마케팅 방식을 취하게 되며 팬은 팔로워보다는 ‘소비자’(consumer)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 결과 “신비주의에 가려져 있던 아이돌을 대신하는 존재로서의 ‘준-아이돌’(demi idol) 역할을 했던 팬코스의 코스플레이어 역시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됨”과 더불어 “그들을 배척하거나 괴롭히는 경우까지 나타나게 되자” 팬코스 문화는 점점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팬픽이나 알페스(RPS)도 ‘아이돌의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규제 당하기 시작”한다. 이런 움직임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아이돌팬덤 내부의 퀴어팬덤 배제와도 연결된다.
‘퀴어함’을 차용하기 시작한 2.5세대부터 현재까지
1세대에서 2.5세대 이전까지 케이팝와 퀴어의 만남은 사실상 퀴어팬덤이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팬들이 아이돌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끄집어 내서, 그걸 가지고 노는 거였다면 2.5세대부턴 그 양상이 조금 달라진다. 케이팝 자체에서 ‘퀴어함’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스큅은 그 계기가 “당시 케이팝이 참고했던 북미 팝 시장에서의 레이디 가가를 비롯한 브리트니 스피어스, 케이티 페리, 케샤 등 백인 팝 디바의 득세”라고 설명한다. 특히 레이디 가가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의) 특유의 콘셉추얼한 미학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케이팝에도 영향을 미치며 케이팝 내 퀴어미학(Queer Aesthetic)의 등장으로 이끌었다. 그 퀴어미학을 활용한 “상징적 아티스트는 YG엔터테인먼트의 지드래곤과 2NE1, 그리고 SM엔터테인먼트의 샤이니와 f(x)”다.
“당시 영향력이 있었다는 점을 짚어야 하기에 YG엔터테인먼트를 언급하는 걸 양해해 달라”고 말하며, 스큅은 “2009년 솔로로 데뷔한 지드래곤은 젠더 규범을 벗어난 스타일링을, 2NE1은 오픈리 게이인 패션 디자이너 제레미 스캇과의 협업”하며 기존과 다른 미학을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또한 “샤이니는 기존의 남성아이돌과 다르게 ‘어리고 유약한 소년 이미지’를 보여줬고, f(x)는 중성적인 스타일링의 엠버를 등장시켰다.”
3세대부터는 좀 더 나아가, 퀴어문화 자체를 차용하는 모습도 나온다. 남성아이돌 2AM의 조권이 솔로 데뷔를 하면서 발매한 노래 ‘애니멀’(Animal)에서 “드랙을 연상시키는 메이크업과 코스튬을 입고 하이힐을 신고 퍼포먼스를 선보인 일, 신화가 ‘This Love’으로 보깅 댄스를 춘 일, 이효리가 ‘미스코리아’ 뮤직비디오에 드랙퀸을 등장시킨 일 등”이다.
케이팝 산업이 이렇게 변화하는 사이, 팬덤도 변화해 왔다. 팔로워에서 소비자로 변화한 팬덤은, 투표 조작이 밝혀져 그 의미가 상실되긴 했지만 “엠넷의 ‘프로듀스’ 시리즈 이후 ‘프로슈머’(단지 소비자에 그치지 않고 아이돌을 제작하는 기획자라는 의식) 담론”을 만들어 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엔 아이돌에게 젠더감수성과 인권의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낼 뿐만 아니라, SNS에서 해시태그 총공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정치적 이슈에도 활발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케이팝 산업은 비로소 팬덤의 목소리에 기민하게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다 퀴어친화적이며, 젠더 경계를 넘나들면서 흐릿하게 만들고, 팬덤의 요구를 의식했음이 드러나는 결과물이 나오고 있는 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퀴어팬덤 또한 변화해 오고 있다. 여성 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마마무의 퀴어팬덤은 ‘무지개무무’라는 이름으로 퀴어문화축제를 후원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후 ‘NCT QUEER’, ‘QURAT’, ‘무지개아미단’, ‘EXOL-Q’ 등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퀴어문화축제에 깃발을 들고 참가하고 후원을 하는 등 조금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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