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폐쇄된 우주 정거장을 철거하기 위해 찾아온 한 남자에게, 그곳을 지키며 수십 년째 살고 있던 노인 ‘안나’가 던진 말이다.
안나가 학회에서 냉동 수면 기술의 완성을 발표하던 날,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가는 항로는 끊겼다. 가족들이 이주해 살던 슬렌포니아로의 출항이 있을 때까지 안나는 이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우주 정거장’에서 지겹도록 냉동 수면을 반복하고 있었다. 안나는 마치 철거에 응할 것처럼 그를 속인 뒤, 어렵게 연장해온 삶을 걸고 홀로 낡은 셔틀에 오른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없기에 완성될 수 없는 여정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초광속 항법의 패러다임이 계속 변화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항법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남겨지고 잊혀가는 사람들이 과학의 한계로서 등장할 때, 이러한 상황을 가정하는 제목은 그 다음을 질문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약 백일흔 해를 지낸 안나는 마침내 확실한 무언가를 좇는 편을 택한다.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개별적인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과학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여성들이 깨닫게 되는 것과 선택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표제작의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맨 앞에 수록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천재 과학자 디엔에 의해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한 인간배아 시술과 차별 없는 유토피아인 ‘마을’을 형성하는 게 모두 가능해지지만, 그녀의 유전병을 물려받은 딸 올리브는 ‘마을’이 아닌 지구에 남아 ‘분리주의에 맞서는 삶’을 산다. 올리브의 선택은 후대의 데이지에 의해 기록되고 반복된다.
「스펙트럼」에서도 생물학자 희진은 색깔을 언어로 쓰는 외계 지성 생명체 ‘루이’들과 조우하고 교감하지만, 의도적으로 40년 동안이나 우주를 떠돌다 기적적으로 지구에 귀환했을 때 그 행성의 위치만큼은 발설하지 않는다. 세상은 희진을 ‘반쯤 미쳐 버린 노인’으로 취급하지만, 오직 손녀 ‘나’만이 그녀의 진실에 귀를 기울인다.
「관내분실」과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 이르러 과학은 더 넓은 우주와 사후세계로까지 확장되는데, 지민, 은하, 재경, 가윤, 서희라는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겪는 임신, 결혼, 출산, 몸과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문제들은 오히려 현실에 근접해진다.
그래서인지 『82년생 김지영』이 문학이 아니라는 혐의를 감당했던 것처럼 이 작품들에도 ‘과학’소설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첨단의 세상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차별 속에서 과학은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처럼 유용한 도구였다가, 이데올로기이자 차별의 근거였다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도 했다. 미래의 기술 역시 아주 많은 것을 바꾸겠지만 더 많은 것들이 그대로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김초엽의 작품들에서 과학자, 연구자, 우주인, 탐험가, 순례자들은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들을 알게 되거나 확신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정답을 추구하기도, 포기하기도, 바꾸기도 했다. 김초엽의 작품들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과학소설로 납득되고 사랑받는 이유일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 「감정의 물성」과 「공생가설」은 과학소설 범주의 양극에서 상이한 소재를 다루지만, 각각 감정의 원리와 이성의 근원이라는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직업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인물들 나름의 연구의 끝에는, 도무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감정의 물성) 처음부터 인간의 고유한 특질 또는 성취가 아니었다는(공생가설) 결과가 도출된다.
지금보다도 훨씬 앞서 있는 소설 속의 빛나는 미래 과학조차 얼마나 불완전한지, 또 우리는 그럼에도 그것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이 과학소설들은 끝없이 팽창하기보다 바로 그 한계의 자리에서 과학의 전제와 인간 존재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정해져 있지 않은 진실, 무한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낡은 셔틀에 몸을 싣고 수만 년이 걸리는 여행길에 오르는 일이든, 사이보그가 되어 심해를 유영하는 것이든, 유토피아가 아닌 지구에 남아 차별에 맞서는 일이든 간에 각자의 해방을 위해서.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서영 님은 유니브페미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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