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역사는 일본 학생들에게 성교육이자 평화교육이옥선 할머니 반생 그린 만화 『풀』 번역자 쓰즈끼 스미에2017년에 한국에서 출판된 『풀』은 만화가 김금숙 작가가 전 일본군 ‘위안부’ 이옥선 씨와 교류하며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한국에서 유학 중인 쓰즈끼 스미에(都築寿美枝) 씨는 작가와도, 이옥선 씨와도 친분이 있다. 만화가 해외에서 차례로 번역되는 것을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본에서 출판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김금숙 작가에게 이야기하자 “무리하지 마.”라며 완곡히 반대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한 책을 번역하면 쓰즈끼 씨가 우익으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는 일본의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라면 분명 힘들겠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맞서면 어떻게든 될 거야.” 그렇게 각오를 하고, 일본에서 『풀』 번역서를 내기 위한 출판위원회를 결성했다.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명예관장) 씨와 예전에 히로시마의 교직원 조합에서 함께 투쟁했던 오카하라 미치코(岡原美知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 사무국장) 씨에게 제안을 했다.
“두 분 다 뭐든 하려고 하면 어려움에 닥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경험하신 분들이죠. 그러니 나쁜 결과보다는 가치를 우선으로 생각하자고 마음이 합쳐졌습니다.”
전문서는 아니지만, 숫자 하나에도 주의해야 하는 책이기 때문에 오랜 벗인 이령경(대학 강사) 씨가 공동번역자로서 꼼꼼하게 감수해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일본인 남성과 결혼한 식민지조선 여성, 나의 할머니
쓰즈끼 스미에 씨의 인생의 뿌리에는 전쟁과 떼어낼 수 없는 가족의 기억이 있다. “이야기하면 천일야화처럼 긴” 이야기는 시대에 맞서 싸운 조부모로부터 시작된다.
때는 1935년. 일본에서 조선으로 부임한 할아버지는 제천에서 현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 간에 당시 가치관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결혼을, 둘은 가족들과 의절을 각오하고 감행했다.
할머니는 해방 후 일본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일본인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아 갈등하면서도 민족의 자긍심을 지켰다.
손녀인 쓰즈끼 씨 역시 “조선인!”이라고 불리며 모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 할머니는 “조선 사람이 왜 나쁘냐”라고 호통을 쳤다.
쓰즈끼 스미에 씨는 그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생애를 정리하여 올해 1월 <일다>에 기사로 게재하였고, 새로운 여성사 기록으로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관련 기사: “일본남성과 결혼한 식민지 조선여성, 나의 외할머니” http://ildaro.com/8633)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저 역시, 나만 열심히 노력하면 차별 같은 건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장기를 버텼습니다.”
그 생각은 옳지 않다고 쓰즈끼 씨에게 깨우쳐준 사람은 대학에서 만난 남편이었다.
“1970년대 당시, 히로시마 대학에서는 ‘부락해방운동’(부락은 일본에서 천민집단을 일컫는 말로, 전근대 신분제도의 최하층 집단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이 현대에까지 누적되어 왔음)이 왕성했는데요. 사회 구조나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차별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남편이 강의해줬어요.(웃음)”
그의 얘기를 들으며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고민했던 걸까”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쓰즈끼 씨는 대학 졸업 후 후쿠야마시의 피차별부락에 들어가 ‘부재 가정 아동회’(돌봐줄 부모나 가족들이 일하러 나가 아이만 남겨진 가정의 아이들에게 방과 후 활동을 제공하는 모임을 칭하는 행정 용어인데, 실제로는 부락 주민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부락해방운동 진영에서 요구하여 실행된 ‘부락해방 아동회’를 뜻함)의 지도원으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차별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의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자산이 되었다.
보건체육 교사로 ‘전쟁과 성(性)’을 교육하다
“지금 일본에서 성차별이 없는 직업은 공무원뿐. 너는 야무지니까 교사가 적성에 맞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롤모델이 되었던 멋진 체육선생님이 계셨던 덕분에 쓰즈끼씨는 대학을 선택할 때 주저 없이 교육학부의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중학교 보건체육 교사가 된 쓰즈끼 씨는 필생의 사업에 매진한다. 한 가지는 성교육. 때마침 일본에서도 기존의 ‘순결 교육’에서 인권에 근거한 성교육으로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던 때였다.
다른 한 가지는 평화교육.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입은 ‘피해’를 강조하기 쉬운 히로시마의 평화교육에 식민지 지배와 조선인 피폭자 문제 등을 반영하며 ‘가해’도 함께 배울 수 있는 수업을 시작했다.
이 두 가지 노력이 1991년, 전 일본군 ‘위안부’로 이름을 알린 김학순 씨의 뉴스를 접하고 겹쳐지면서 ‘전쟁과 성’이라는 주제로 융합되었다.
학생들은 즉각 반응해주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시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네요”, “저 상냥한 할아버지가 군인이었을 때 과연 위안소에 갔을까요? 그렇게 사람이 변하는 일이 전쟁으로 인해 일어났구나 싶은 복잡한 심경입니다” 등등.
“병사들에게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대가로 단시간에 배설하듯 섹스를, 포상으로 제공한다, 그것이 전쟁의 시스템으로 편입되었다… 그 구조를 더 크게 봤어야 했죠.”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섹스를 할지는 본인의 의사로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 현실(전쟁)이 인간성을 짓밟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일본은 정치 이야기를 마음껏 나눌 수 없는 분위기
쓰즈끼 스미에 씨는 2013년에 퇴직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 위해 한국 서울로 떠났다. 어학부터 시작해 지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자신의 교육 실천을 정리한 박사 논문에 매진하고 있다.
서울에서 느끼는 것은 시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이다. 카페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일본과는 다르다고 한국 친구들에게 얘기했더니 “민주주의는 우리 피의 대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한국의 모든 점이 좋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희생을 치르며 자기 힘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일본 사회도 그런 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주: <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나카무라 토미코 기자가 작성하고 고주영 님이 번역하였습니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일본군위안부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