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귀촌 아니면 유학…탈서울 위해 국경을 넘다
6년 전 집채만한 이민 가방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 수중엔 1년치 생활비인 1,300만원밖에 없었지만 ‘웬만하면 돌아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대학원 합격증을 손에 쥔 전형적인 유학생이었는데, 사실은 공부보다 더 중요한 목표를 세우고 있는 이주민이었다. 바로 ‘탈서울 녹색전환.’
주거 독립이 절실했지만, 보증금을 모으기 어렵고, ‘서울에 집 놔두고 여자애가 뭣 하러 자취’를 하냐며 가족도 반대해서 20대 중반까지 같은 동네에 꾸역꾸역 살았다. 차선책으로 엉뚱하지만 유학을 시도했다. 장학금을 받는다는 걸 전제로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원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 결과가 안 좋아도 어떻게든 서울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귀농’이나 ‘귀촌’과 비슷하게 청년들이 지방에 내려가 공동체를 꾸리는 실험이 하나 둘 시작될 즈음이었고, 나도 동참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독일에 있는 지방 소도시에서 먼저 기회가 왔다. 서울로 대표되는 한국의 지나친 경쟁, 사람이든 자원이든 너무 많이 소진하면서 유지하는 사회를 벗어나 ‘리셋’해볼 기회. 정해진 길, 못해도 남들만큼은 안정적일 수 있는 길, 가장 효율적인 길로 가야한다는 가족과 주변 집단의 압력에서 멀리 벗어날 기회였다.
앎과 삶이 일치하는 ‘나’로부터 시작된 ‘녹색전환’도 절실한 화두였다. 그 무렵 나는 환경단체에서 일하며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한국에 갓 생긴 녹색당에 가입해서 대안적인 좌파 정치를 고민하고 있었다. 대학 때부터 보아온, 가부장적인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도, 당파싸움으로 갈라진 진보정당도 더 이상 싫었다. 공채나 고시에 매달리기 싫었고, NGO들은 돈이 없다면서 계약직 최저임금으로 초과 노동을 시켰다. 환경운동가들도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며 ‘막내’에게 수저를 놓게 했다.
에어컨을 틀어야 하고, 택배는 주문 다음날 와야 ‘정상’인 내 일상에도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독일 행이 무엇도 자동으로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가진 것도 없이 혼자 길 떠나면 고생할 게 뻔했지만, 작고 여유롭다는 ‘환경도시’에 가면 급진적인 전환이 가능할 것 같았다.
당시 녹색당 정치인이 3선에 성공해 시장을 맡고 있던 인구 20만명 소도시 프라이부르크는 탈서울 이후 나의 삶터로써 흥미로웠다. 이 작은 도시에서는 사업을 하든, 봉사활동을 하든, 정책회의를 하든 ‘환경’이 단연 일관된 화두였다. 녹색당에 투표하는 다수의 선량한 백인 중산층들은 유기농 마트에서 장을 보고 아이를 수레를 태워 자전거로 출퇴근했으며, 한 목소리로 난민을 환영했다.
한편, 석사과정을 시작한 환경대학원에는 십대 때부터 채식을 하고, 비행기를 안 타고 H&M세일 쇼핑을 안하고도 아무 아쉬움 없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과 어울리며 나도 일상을 점점 더 녹색으로 물들여갔다. 학교에서 우리를 ‘글로벌 환경행정가’로 키우겠다며 정부 지원금으로 제네바에 있는 유엔 본부에 견학을 보내거나, 전세계 환경운동가들을 초청하는 컨퍼런스에 자원활동 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좋았지만, 더 귀중한 배움은 그런 일상의 실천가들과 어울릴 때 얻었다.
그러면서 나의 일상과 습관도 바라던 대로 많이 달라졌다. 새 옷 대신 벼룩시장에서 구한 것들을 직접 고쳐 입고, 대도시의 소비자로서 보내던 여가 시간을 시골 집 마당에 텃밭을 일구고 가구를 만드는 데 썼다. 김치를 직접 담가 먹고 자전거로 통학했다. 이 무렵 스스로를 ‘녹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색을 뜻한다.
거슬러올라가면 대학교 1학년 말에 ‘생활자치도서관’이라는, 운동권을 안 좋아하는 운동권 집단에 발을 들일 때부터 ‘페미니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이름표였고, 롤모델을 정하거나 친한 친구가 생기는 계기였다. 페미니즘 덕분에 자존감을 파괴할 것 같은 연애나 비뚤어진 욕망을 품은 남성 권력자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섹스가 아니면 할 필요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리고 또 일찌감치 깨달은 것은, 나에게 성폭력 트라우마가 있고 그게 나를 부자유스럽게, 꺼림칙하게, 화가 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전한 환경에서 심리치료를 꼭 받아보고 싶었다. 독일에서 가입한, 학생을 위한 공보험을 통하면 따로 돈 내지 않고 심리치료를 1년이고 2년이고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독일 이주 2년차였다.
나는 성폭력 트라우마 심리치료를 받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고, 그 기록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싶어서 가장 안전한 공간으로 보였던 이곳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연재를 제안했다. 그렇게 1년 간 격주로 써 보낸 것이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이다.
연재를 시작한 지 몇 달 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계기로 ‘성난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여성의 서사,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갑자기 많은 미디어가 실어 나르기 시작했고, 출판업계도 열심이었다. 내게 칼럼을 책으로 묶어 내자는 ‘출간 제안’이 왔다. 지극히 개인적인, 거기다 섹스가 잘 되니 안 되니 하는 내밀한 일반인의 이야기를 중견 출판사에서 책으로 만들자고 한 건, ‘개인적인 것인 정치적인 것’이라는 테제가 나 개인의 삶에서 증명된 셈이었다. 이듬해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동녁, 2017)라는 책이 나왔다.
‘소명’이라 말했지만, 시작은 그리 거창하고 기꺼운 것이 아니었다. 불편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도 자신감과 존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일이었다. 혼자 거리를 걷다 낯선 남자들이 심심풀이로 ‘니하오’라며 추파를 던질 때 받아칠까, 모른 척할까 매번 고민하는 일. 낯선 이들이 멀리서 걸어오면 나도 모르게 회피하는 시선을 다시 똑바로 되돌리는 일. 회사 면접 시험에서 1등을 했지만 탈락하고 그 자리에 곧 백인 남자가 출근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동안’ 때문에 어딜 가나 아직 경험치 부족한 학생으로 오해 받는 일. 서비스센터에서 불만을 제기하면 ‘잘못 아신 것’이라고 태연하게 나를 탓하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내 말에 귀 기울일 때까지 화난 것처럼 가장하는 일. 그런 일들 끝에 나의 ‘월경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내 목소리를 어떻게 낼 것인가? 나의 목소리가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겪은 부당한 일들을 어떻게 누구에게 알릴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이곳에서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여성, 퀴어, 시민 활동가들을 만나 대화하고 기록하며, 또 거리로 나선다.
사실 나는 처음 떠나올 때만 해도 이럴 줄 몰랐다. 남이 보는 ‘나의 모습’으로 인해 누군가의 섣부른 판단과 차별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어린시절부터 서구 유럽문화를 소비했고, 영어를 오래 공부하며 영미권에 잠시 머물기도 했지만 ‘백인 주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관념과 감각이 어떤 것인지까지는 미처 몰랐다. 또, 아들과 딸을 비교적 차별 없이 키우는 시대에 남학생들을 뛰어넘는 성취를 하며 전문직 엘리트에 도전하는 ‘알파걸’ 세대로서, 타고난 인종과 출신, 문화 같은 것이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겪기 전까진 못 믿은 것도 같다.
독일에 살아도 ‘나’는 여전히 ‘나’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 생활에 점점 자신감이 붙는데도, 낯선 타인은 언제고 나를 막 여기 도착한 사람, 포르노나 영화에서 본 이국적인 여자를 대하는 그 끔찍한 괴리를 제때 해소하지 않으면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나도 그 일상적이고 집요한 스트레스 때문에 아직도 집에 오면 녹초가 되곤 한다.
지난 해 가을 시작한 인터뷰 시리즈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는 나에게 또 하나의 치열한 ‘월경 프로젝트’였다. 한 달에 한 번씩, 긴 호흡의 인터뷰 기사를 쓰기 위해 친구, 친구의 친구, 또 그들의 지인, 모르는 블로거까지 네트워크를 뻗어보며 8명의 이주 여성들을 만났다.
인터뷰이를 선정하는 공식적인 기준은 1)밀레니얼 세대의 이주 형태를 대변할 것 2)서로 겹치지 않는 직군 및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는데, 나는 내심 ‘성공스토리’를 쓰지 말자는 기준도 세웠다. ‘탈조선’을 선망하고 실제로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고,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인 정보나 현실적인 독일 직업세계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 것인가, 독일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페미니즘 팟캐스트를 녹음하고, 사내 인종차별에 문제 제기하는 다현(디자이너, http://ildaro.com/8667), “일할 때는 능력과 맡은 역할로 인정 받고 싶지, ‘아시아인’ ‘한국인’ ‘젊은 여성’ 같은 정체성의 해시태그는 떼고 싶다”면서도 <해시태그>라는 제목의 단편 다큐멘터리에 동료 여성들의 캣콜링 경험을 담는 태선(IT코디네이터, http://ildaro.com/8627)은 우리가 자기 자리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개인의 정체성 투쟁을 더 많은 이와 연대하는 액티비즘으로 확장했다.
다국적 페미니스트 앙상블을 만들어 점잖은 백인 남성 관객들을 도발하는 유영(현대음악가, http://ildaro.com/8704)도 마찬가지다. 그녀에 따르면, 외국에서 여자 혼자 독립하기란 암에 걸릴 만큼 고생스럽지만, 저마다 ‘자기만의 음악’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전해볼 만한 모험이다.
소박하고 조용한 집을 짓고 가꾸며 명상과 마음챙김으로 깊은 차원의 ‘나’를 찾아가는 슬(유아교육자, http://ildaro.com/8574)과 혜진(건축가)의 이야기는 ‘녹색전환’이 중요했던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직 남아있는 사회문화적 차별에 지지않을 과제를 안고 전문직 커리어를 차근차근 밟고 있는 수빈(수련의, http://ildaro.com/8601)과 다영(회계사, http://ildaro.com/8729)도 열렬히 응원하게 된다. 초등학교 영재반에서 출발해 독일우주항공센터로 이동하는 승희(항공공학자, http://ildaro.com/8646)의 궤적은 의외의 지점에서 정점을 찍었다. 바로 평생 몸을 움츠리고 살아온 ‘플러스 사이즈’ 승희를 몸매평가 없이 그저 사랑스럽게만 본다는 독일인 남편과 가족들 이야기였다.
한국 여성들의 새로운 독일 이주 트렌드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근래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국 여성들의 독일 이주 양상을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독일의 전통적인 직종이나 고용 형태가 아닌 방식으로 독일에 체류하며 생계를 잇는 여성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먼저, 입학이나 취업처럼 현지에 소속을 두고 독일에 장기간 체류할 계획으로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년 살기’ ‘3개월 살기’ 같은 컨셉으로 오는 이들이 늘고있다. 다양성이 높고 외국인에게 보다 열려있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이들은 따로 또 같이 도시를 마음껏 유영한다. 목돈을 모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에서 받은 자격증이나 경력증명서를 바탕으로 요가 강사, 타투이스트, 유튜브 편집자, 웹 디자이너, 아로마 테라피스트 등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체류가 길어지면 프리랜서 형태로 작업장을 빌리거나 재택근무를 하며 한인 커뮤니티에서 시작한 고객층을 넓혀간다. 독일에서도 비교적 새로운 직종이라서 국가공인자격이나 학위가 필수적인 다른 직종과 달리 경제활동이 자유로운 편이다.
섹슈얼리티 자유를 위해 독일에 오는 레즈비언 커플들도 종종 보았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독일에서는 둘 중 한 사람만 체류권이 있어도 ‘파트너 비자’를 받아 함께 지낼 수 있다. 외국인이 독일에서 혼인신고를 하는 일이 간단치는 않다. 한국 관공서에서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고 번역은 물론 공증, 아포스티유까지 받아야 하며, 독일 법원에서 서류를 심사해 혼인신고일자를 받기까지 최소한 서너 달 걸린다. 한국에선 법적으로 불가능하고, 커밍아웃도 위험한 동성 커플들에게 이 정도 번거로움은 감수할 만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엔(n)잡러가 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동시에 수행하며 여러가지 소득원과 전문성으로 돈을 벌고 자아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보수적인 독일 관청에서 반기지는 않지만, 적절한 증빙서류가 있다면 두 가지 이상 직업으로 노동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가령 내가 2018년부터 소지하고 있는 프리랜서 노동비자에는 세 가지 직업이 적혀있다. 저널리스트, 통번역가 그리고 이벤트 매니저. 처음부터 엔잡러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환경대학원을 다닐 때 시작한 통번역 일은 졸업 이후에 더 늘어서 환경 연수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해외여행 성수기/비수기에 영향을 받아 일거리가 들쑥날쑥했다. 자연히 다른 일도 병행하게 됐다.
‘월경 프로젝트’을 벌여 젠더와 이주를 주제로 글 쓰고 활동하는 일은 ‘저널리스트’라는 타이틀로 요약되었다. 한국에서 했던 문화기획 경험을 살려 지역 청년들과 축제를 열거나, 문화공간에서 전시회와 공연을 운영하는 일은 크게 돈이 되지는 않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사회에 참여하면서 생동감과 유대감을 주기 때문에 계속하고 싶다. 비자담당 공무원은 나의 설명을 듣고는 ‘이벤트 매니저’라고 적었다.
한동안 나는 ‘엔잡러’로 살아가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여전히 전문가가 대우받는 사회에서 뭔가 부족하고 애매한 위치인 것 같아 정규직 일자리를 잡으려고 애쓴 적도 있다. 한 가지에 매진하지 못하는 것을 게으름이나 과욕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은 종종 서로 영감과 자극을 주면서 시너지를 내기도 하고, 일의 가치는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나 이력서 문구만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여러가지 얼굴로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게 되었다. 장애인 활동보조인을 하면서 일렉 기타를 수리하는 필릭스, 시청 시간제 공무원으로 일하며 밴드 공연으로도 수입을 얻고, 선거 때는 당직자로 뛰는 미하엘. X-Ray 촬영기사로 직업훈련을 받으면서 집 근처 바에서도 즐겁게 일하는 친구 나디아처럼 말이다.
엔잡러는 이주민의 특정한 생활방식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늘고 있는 직업 트렌드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국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정규직 채용이 점점 줄어들고, 석박사까지 공부해도 취직이 어렵다. 사람들은 점점 더, 월급만큼이나 번 돈을 쓸 수 있는 양질의 여가 시간을 중요시한다. 유튜브나 인터넷 강의로 뭐든 쉽게 배울 수 있어서 새로운 직업에 대한 진입장벽도 낮아졌다. 엔잡러는 풀타임 고용인의 복지 대상에서 제외되어 수입이나 혜택이 적은 게 단점이지만, 대신 남들은 돈을 쓰는 취미활동으로 돈을 벌고 하고 싶은 일들을 두루 실현하며 뿌듯하게 산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보편적 숙제는 사실 이런 것 아닐까.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의 탐구하고 정의하며, 그에 따라 삶을 혁신하는 과정. 자신의 욕구, 성향, 한계에 따라 가장 나은 것을 택하고 그 선택에 따른 이익이나 불이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독일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아니다. 집을 용기 있게 떠난 26살의 나와, 새로운 삶터에서 만난 선하고 악한 사람 모두, 그리고 밖으로 흐르지 못한 그 모든 눈물이 가르쳐 준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스스로의 발걸음을 긍정하고 서로를 축복해야만 내일도 힘낼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 게다가 뭘 해도 자기 확신을 갖기 어려운 혼란스런 시대에 살고 있다. 경계는 국경뿐이 아니다. 오늘이라는 경계를 무사히 넘어가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까 너무 재지 말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자. 단 일주일이라도. 새로운 곳에 도착해야,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사회가 혼자 떠나는 여성들을 응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떠남을 응원하니까.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현재 독일 프라이부르크 거주. 그 동안 일다에서 <29살, 섹슈얼리티 중간 정산>,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독일 여성 난민들의 말하기>, <하리타의 월경만남>을 연재했으며, 저서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동녘, 2017)가 있다. ‘이주’라는 삶의 모험을 함께하고 있는 이웃 여성들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이 이번 연재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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