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불법’ ‘노동/결혼’ 교차하는 여성의 이주<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산업연수생이었던 필리핀 여성 레이첼*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가 본국으로 되돌아간 <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위라겸 님은 전남여성가족재단 연구원입니다.
한국 이민정책 역사가 담긴 레이첼의 가방
귀환 이주여성 현지 조사를 하기로 결정한 이후 조사팀이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과연 인터뷰에 응할 여성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국내 이주여성 상담소나 쉼터에서 여성들의 귀환을 지원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연락이 닿지 않겠냐는 기대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귀환 이후에도 연락이 지속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연락이 닿았다 하더라도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또는 인터뷰 장소까지 올 돈이 없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 반면 SNS 등 이주여성 커뮤니티를 통해 홍보를 하자, 순식간에 많은 지원자가 몰려 이들 가운데 인터뷰 참여자를 정하느라 고심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는 또 다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리는 일단 현지 여성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인터뷰 참여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우릴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미 대사관에도 찾아가고 변호사를 만나보고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사정을 알아보고, 백방으로 노력해온 여성들도 있었다.
귀환 이주여성의 삶은 단순히 1)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한국에 왔다. 2)한국에서 살다가 무언가 문제가 생겨 본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3)그런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즉 한국 정부와 사회가 지원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이렇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주와 귀환, 또다시 이주,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레이첼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첫 합법 외국인근로자인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오다
레이첼은 1994년 봄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그 나이에 여자 혼자서 외국에 일하러 가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집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언니들은 일찍 결혼해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동생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집안에서 돈 벌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일하러 간 곳은 필리핀에서 다니던 기업의 공장이었다. 필리핀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는 회사, 이른바 해외투자기업에서 일한 것인데 1994년은 이 해외투자기업 근로자가 처음으로 한국에 합법적으로 일하러 올 수 있게 된 해였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근로자’가 아니라 ‘산업연수생’이었다. 실제로는 근로자와 다를 바 없이 일하지만 한국 기업에 ‘연수’를 받으러 온 신분이기 때문에 근로자로 대우해주지 않아도 되는 외국인. 그래서 법에서 정한 노동시간도, 최저임금도, 산업재해 보상도 적용되지 않는, 말 그대로 무법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당시 산업연수생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가 시시때때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들이 최초의 사업장에서 이탈하여 조금이라도 처우가 나은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은 생존을 위한, 그리고 한국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레이첼도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일명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레이첼은 1998년에 임신한 채로 필리핀에 돌아왔다. 미등록 체류 상태로 한국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 아버지는 한국에서 만난 필리핀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녀를 책임질 생각이 없이 떠나갔다.
4년 넘게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왔지만, 필리핀에서의 삶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었다. 여전히 가족들은 지난 4년 동안 그러했듯이 그녀에게 돈 벌 방법이 있을 거라고,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 거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레이첼은 이제 자신의 아이도 키워야 했다. 하지만 필리핀에는 마땅히 일자리가 없었다. 그런 일자리가 있다면 애초에 한국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법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
1994년에 처음 한국에 갈 때와 마찬가지 이유로, 게다가 이제는 자녀 양육 부담까지 않은 채 그녀는 다시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한국에 갈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서 2년 넘게 미등록 상태로 체류했던 전력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시 임신하게 됐을 때는 필리핀에 가지 않기로 했다. 첫째 아이 때처럼 또다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혹은 다른 방법을 찾아 한국에 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둘째 아이의 아버지도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불법 사람끼리 불법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불 보듯 뻔했다.
둘째 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필리핀에 보냈다. 친정에서 지금까지 두 아이를 봐주고 있다.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기에, 레이첼은 더 열심히 일하고 강제추방 당하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살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한국에 있는 필리핀 대사관에 출생신고를 하러 갔는데, 그녀는 레이첼이 아니라 그레이스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둘째 아이의 어머니는 그레이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중에 필리핀에 돌아와 둘째 아이의 출생등록을 정정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문제는 역시나 돈이다. 아이도 이 사실을 알고 가끔 엄마에게 따지곤 한다. 그녀가 한국에 다시 가려고 하는 이유 중에는 아이의 출생등록을 정정하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합법’ 결혼이주자가 되다
둘째를 필리핀에 떠나보내고 5년이 지나서야 레이첼은 필리핀에 돌아왔다. 그렇지만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떠나기 위해 필리핀에 왔다.
2010년경 한국에서 알고 지낸 필리핀 동생이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 남자를 소개했다.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번 두번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호감이 생겼다.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가 스무 살 더 많고 전처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셋 있다는 사실도 점차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 또한 레이첼이 한국에 사촌의 신분으로 와서 미등록 체류하고 있다는 점도, 필리핀에 아버지가 다른 자녀가 두 명이 있고 양육비를 보내고 있다는 점도 모두 이해해주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기로 했다. 다만 남편은 그녀가 사촌의 신분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신분으로, 레이첼이라는 이름으로 결혼 절차를 밟자고 했다. 그녀도 불안정한 미등록 상태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남편과 함께 필리핀에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합법적으로’ 한국에 입국할 준비를 했다. 남편이 한 달 동안 필리핀에 머물면서 서류 준비를 도와주었다.
6개월 후 레이첼은 세 번째로, 산업연수생이나 관광객이 아니라 한국인의 배우자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결혼생활은 순탄했다. 작은 아파트에 신혼 집을 차리고 남편과 같이 공장에서 일하면서 차근차근 현재를 살고 미래를 준비했다. 남편은 필리핀에 있는 그녀의 두 아이도 한국에 데려와서 같이 살자고 했다.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한국 남편과 한국 자녀가 없는 ‘결혼’이주자의 자리는?
불행은 언제나 갑자기 닥쳐온다. 언젠가부터 남편이 점점 기운 없어 하고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순 가까운 나이에 공장 일이 힘에 부쳐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 근처 병원에 다녀오더니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충남에 있는 소도시에서 살고 있던 터였다. 남편은 큰딸이 돌봐주기로 했다면서 혼자 서울에 갔다. 레이첼은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지만 남편을 따라 나설 수 없었다.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그 며칠마저도 공장을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편도 이 사정을 잘 알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과는 계속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얼마 후, 시어머니가 수술을 받게 됐다는 문자가 오더니 그 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애가 탔지만, 남편 가족 중에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한 달이 지나서야 남편의 막내딸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남편이 암에 걸렸었다고, 수술을 받았는데 차도가 없어 재수술을 하게 됐고, 그 와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얼떨떨했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간다고 집을 나선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병원에서는 배우자인 그녀에게 남편이 수술 받는다는 사실도, 그리고 사망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고인의 아내인데,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남편의 자녀들이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린 채 모든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이때가 결혼한 지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은 2014년이었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 후, 남편의 큰딸과 막내딸을 만났다. 남편과 전처와의 사이에 세 명의 자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연락하고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둘이 남편이 묻힌 산소에 데려다 주었다. 처음 가보는 남편의 고향이었다. 남편과는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재산이 얼마간 있었는데 유산 정리는 자녀들이 한 것 같다고 한다. 함께 산소에 갔을 때 큰딸이 이것저것 서류를 내밀면서 사인하라고 했는데,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확인도 못 하고 사인을 했다. ‘왜 이렇게 서류가 많냐’고 물었더니 자녀 셋이 한 장씩 나눠가져야 해서 그렇다고 했다. ‘나도 한 장 달라’고 해서 그녀가 받은 것이 인터뷰할 때 그녀가 챙겨온 서류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녀 앞에 유산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래도 막내딸이 남편이 넣은 국민연금에서 유족연금을 받게 도와주었다.
레이첼은 ‘배우자의 사망으로 인한 결혼비자’라는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유지한 채 한국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남편과 사별하기 전처럼 공장에서 일하고 돈을 벌어서 필리핀에 있는 가족과 두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남편과 이야기했던 것처럼 필리핀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와서 입양 절차를 마쳤더라면 아이들과 한국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겠지만,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단지 계획으로만 끝나버렸다.
만약 그녀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한국 국적의 자녀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출입국정책, 다문화가족 지원정책은 결혼이주자가 한국인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한국 국적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을 때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국 국적의 자녀가 한국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남편 없는 결혼이주자가 한국 국적의 자녀도 없이 한국에 사는 것은 마치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처럼 매도된다. ‘한국 국적인 남녀’로 구성된 가족에게는 더 이상 들이대지 않는 가부장적 가족 관념과 가족 제도를 결혼이주자에게는 쉽게 강요하는 것은 차별일 뿐이다.
하루아침에 추방당하다
레이첼이 한국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 건 언젠가는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서든, 필리핀에서든, 혹은 다른 어떤 곳에서든 더 나은 삶을 살 거라는 기대였다. 특히 두 아이가 학업을 마치고 직업을 갖게 되면 20년 넘게 이어져 온 그녀의 외국 생활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큰아이는 필리핀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아슬아슬하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겪어 온 이주의 경험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7년 어느 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레이스, 안에 있어?” 순간 ‘이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레이스로 10년 동안 살았던 삶은 2010년 남편과 결혼하면서 정리했고, 당시는 레이첼이라는 진짜 이름으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가지고 5년 넘게 살고 있을 때였다. ‘도대체 왜 온 거지? 그레이스는 어떻게 알았지? 뭐가 문제지?’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길로 수갑을 찬 채 외국인보호소로 이송되었다.
묻고 싶은 것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녀에게는 딱 한 번 외부에 전화할 기회만 주어졌다. 어차피 필리핀에 가야만 한다면, 배우자 비자로 한국에 온 이후 6년간의 생활과 신변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한국 정부가 방치해온, 혹은 묵인해온(한국 정부가 정치적, 경제적 사유로 ‘불법체류자’를 양산하기도 하고, 단속하기도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7년 전까지의 삶 때문에 레이첼은 인도적 사유로 주어질 수 있는 단 며칠도 허용 받지 못했다.
필리핀으로 돌아온 그녀는 한국에 갈 방법을 찾아 수개월째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있다. 필리핀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민원을 넣기도 하고, 이주 에이전시를 찾아가기도 하고,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해 방법을 알아보기도 하고, 한국과 연관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보고 있다. 그녀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귀환 이주여성’ 인터뷰에 응한 것도 그 한 방편이었다.
레이첼은 왜 다시 한국에 가려는 것일까? 두 번의 ‘불법체류’ 전력 때문에 비자를 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노력을 멈추지 않을까? 그녀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그리고 이제 곧 대학에 가야 할 두 아이의 교육비가 가장 걱정이라고 한다. 여전히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친정 가족들도 외면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가족들의 생계비와 자녀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을 일자리를 거의 찾을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갈 수만 있다면 그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일자리를 찾고 생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녀가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며 필리핀으로 돈을 보냈고, 지금은 매달 유족연금을 받고 있는데 돈이 없어서 심지어 아이 출생등록 바꾸는 것조차 못하는 게 말이 되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모아둔 돈이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레이첼이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벌었던 돈, 때로는 불법체류자로, 때로는 다른 사람 명의로, 때로는 한국인의 배우자로 한국에서 살면서 벌었던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도 그녀가 가장 답답하고 억울할 것이다.
그녀가 꼬박꼬박 송금한 돈은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와 두 자녀의 교육비로 쓰였다. 부모님과 동생, 그녀의 자녀들, 이렇게 다섯 명이 그녀가 보낸 돈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사실 이주자의 송금으로 온 가족이 생활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 번 이주를 떠난 사람이 반복해서 이주하는 모습은 레이첼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한국으로 이주해온 아시아 여성뿐 아니라 홍콩에서, 중동에서, 유럽에서 가사노동자로, 공장노동자로, 유흥산업 종사자로 일하는 많은 아시아 여성들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여성의 이주에 기대어 가족생활이, 지역사회가, 국가경제가 지탱되는 이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가난한 여성들의 자발적/비자발적, 합법/불법 이주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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