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다양한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일을 포기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해보기로
대중음악계에서 일하며 동료들에게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밝혔을 때의 반응이 생생히 기억난다. 한 남성 동료는 여성 연예인인 친구가 본인을 여배우라고 부르지 말라며, 본인은 페미니스트로서 성별의 구분 없이 직업인으로 불리고 싶어한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게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요청인지에 대한 뒷담화를 했다. 내가 그게 뭐 어때서 그러냐며 나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자 그는 어물쩍 대답 없이 대화를 종료시켰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점점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때로는 이 진로를 택한 내 스스로가 싫었고, 나에게 이러한 고민을 안기는 남성 동료들이 미워졌다. 내가 가장 잘 한다고 믿어온 일이 나를 배신했다는 생각과, 나의 능력이 어디에도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이 커갔다. 하지만 이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무대 위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내 본 모습을 숨기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무대 아래의 성소수자들 그리고 앨라이(ally,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을 때의 기분은 (다소 자본주의적 비교이나) 처음 8자리 숫자의 저작권료가 정산되었을 때보다 더욱 기쁜 것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퀴어들이 목소리 내는 일
이후로도 나는 퀴어와 트랜스젠더, 젠더퀴어를 상대로 한 개인레슨과 그룹 워크샵 형식의 음악 창작의 교육과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덕분에 혼자 음악을 연주하고 만들고 있었던, 다양한 정체성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음악은 나 혼자만 하는 줄 알았다’며 외로웠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 센터인 ‘띵동’이 기획한 행사로, 트랜스젠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직업 멘토’가 된 경험도 있다. 나의 ‘멘티’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라서 직업에 대해 희망을 가지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나를 보면서 스스로 원하는 젠더 표현을 하며 남들과 일하는 사람을 보니 신기하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넘어, 그들이 정체성만큼 다양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에는 나와 같은 성인 퀴어들이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갈 수 있게 목소리 내는 일들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이성애자 중심의 대중음악계에 변화를!
지금의 파트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공동체의 힘이라는 것, 사람들의 힘이라는 것 따위를 믿지 않고 벽장 속에서 ‘이성애자인 척'하며 그냥 좀 털털한 여자애 정도의 이름표에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일을 하며 경험한 갖가지 혐오와 차별에도 ‘나서봤자 변화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의 나는, 파트너가 알려 준 오드리 로드의 말 ‘침묵은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를 믿는다. 때로는 부드러운 방법으로, 때로는 단호하게 동료들의 여성혐오 발언과 성소수자 혐오 발언, 장애인 혐오 발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차단하려 하고 있다.
물론, 언제나 나의 말이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쟤 앞에선 이런 얘기하면 재미없어’ 정도가 되어도 좋겠다. 그래서 그런 발언을 아예 듣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어느 날 그 남성 동료들이 길을 걷다, 샤워를 하다, 밥을 먹다 문득 ‘근데 쟤한테는 왜 그런 얘기들이 재미가 없지?’ 하는 생각으로 발전시키게 되길 바란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조금씩 하면 안되는 농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농담은 농담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업계에도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길 바란다.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시선으로 그려낸 음악들이 줄어들고, 누구나 당연히 시스젠더(cisgende) 이성애자이길 추측하는 음악들이 줄어들고, 특별하고 아름다운 세계관이 그려진 음악들이 제각기 개성을 가진 아티스트들에 의해 불려질수 있길 바란다. 그렇게 만들어 진 음악들은 분명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또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도 자본주의적 상품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빛나는 예술로 오랫동안 가슴에 남게 될 것 같다.
나에게 페미니스트란, 아마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아무리 크게 목소리를 내려 해도 무시당하기 쉬운 장애인, 아동, 노인,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 해외입양인, 결혼이주여성, 성노동자, 난민 등등의 사람들과 일상에서, 행사에서 마음과 행동으로 함께 하는 것. 내 목소리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지우지 않고, 앨라이라고 먼저 이름 붙이지 않으며, 책임감을 가지고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 당사자들이 인권에 대해 교육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들이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겪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는 것. 넘겨짚지 않는 것.
이러한 연대를 해 나갈 수 있을 때, 나는 그냥 작곡가가 아닌 페미니스트 작곡가로서 나의 경험에 대해 더욱 풍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미래의 내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힘을 믿으며 앞으로 한발 나아가려 한다.
[필자 소개] 개2퀴2. 파트너와 함께 강아지 두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는 코로나19가 안겨준 험난한 창작 생활 속에 버텨나가고 있는 대중음악 작곡가. 대학원에 다니는 파트너를 위한 각국의 요리를 수준급으로 해내며 '대박곡'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용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려 하는 사람. 언젠가 나타날 퀴어아이돌 프로듀싱의 날만을 손꼽아 기대하고 있는 실력파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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