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의류매장 청소부였다. 나, 옥이 언니, 현이 언니는 이름하여 클리닝부서에서 일했는데 현이 언니는 십 년 된 고참, 옥이 언니는 2년 된 고수였다. 우리는 새벽 6시 15분부터 오전 10시 15분까지, 건물 지하에서 4층 옥상을 오가며 부지런히 청소했다.
『여름의 잠수』(사라 스트리츠베리 글, 사라 룬드베리 그림, 이유진 옮김, 위고)를 보니 그 시절의 내 여름이 떠오른다. 나는 언니들 덕분에 그 여름을 지나올 수 있었다.
슬픔에 빠져버린 사람들
『여름의 잠수』의 주인공 아이 소이는 아빠를 잃은 기분이다. 소이에게 아빠는 테니스의 왕이고 파티를 좋아하는 멋쟁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소이가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져버렸다.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깊어졌고, 소이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병원으로 떠났다.
“왜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을까? 개가 있고 나비가 있고 하늘이 있는데. 어떻게 아빠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들까? 내가 세상에 있는데.”
아빠는 소이와 엄마가 면회를 가도 무표정하다. 병실 문을 잠근 채 혼자 울기도 한다. 그런 날 아빠는 간신히 쪽지로만 말한다. “안녕?” 아빠의 안간힘은 소이에게 새로운 슬픔을 낳는다. “어떻게 나를 잊을 수 있지?”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소이는 혼자 병원에 가보기도 하고 아빠를 기다리기도 한다. 기다리다 보면 무언가 달라지기도 하는 걸까? 그랬다. 사비나가 나타났다. “안녕, 쥐방울?”
바다가 없는 병원에서도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비나, 가운 안에 수영복을 입은 사비나, 언젠가 태평양을 헤엄쳐 건널 거라는 사비나, 여자는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비나! 둘은 여름 내내 나무 아래서 수영을 한다. 병원 계단을 달리고 정원에서 낮잠을 자고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본다.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됐고 함께 소이의 아빠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즈음 소이는 느낀다. 사비나도 아빠처럼 가끔씩 슬퍼진다는 것과 다른 세상에 잠겨든다는 걸 말이다. 소이는 무섭지 않았을까? 사비나마저 닿을 수 없게 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소이도 이제 아는 것 같은데…. 고통에 빠진 이의 곁에 있다는 건,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을 만들기도 한다는 걸 말이다.
나는 몇 달 뒤 농촌으로 이주할 계획에 들뜬 채, 새벽 청소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출판기획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곧 이주할 사람이 몇 년이 걸릴 일을 기획한다는 게 불편해서 기획일은 거의 멈추고, 남은 일들을 마무리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이주계획에 큰 영향을 주고받았던 농촌 마을 지인과의 약속이 깨졌다. 관계가 끊어졌고 계획이 사라졌다. 앞으로 먹고사는 일도 막막했지만, 갑자기 급변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더 힘이 들었다. 잠을 잘 수 없게 됐고, 먹거나 걷거나 가만히 있는 것마저 잘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청소일이 너무 고역이었다. 먼지를 마시거나 힘쓰는 건 참으면 되는데, 걸레를 밀 때나 거울을 닦을 때나 머릿속을 항상 기억이란 놈이 휘젓고 다녔다. 기억의 공격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이…뭐랄까, 이런 게 지옥이 아닐까 싶었다. 그걸 견디기 위해 간신히 찾은 방법은 헤드폰을 끼는 거였다. 강의나 뉴스를 들으면서 청소를 했고, 어떤 기억이나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도록 신경을 다른 데 분산시키려고 애썼다.
내겐 나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언니들은 처음엔 방실방실하던 애가 며칠 만에 헤드폰을 끼고 무표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기가 찼던 것 같다. 그래서 언니들은 나를 불러 혼내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헤드폰을 쓰느냐 마느냐부터 출근 체크를 누가 할지, 에어컨 필터를 닦을지 털지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는 중에도 우리는 첫차도 놓친 술 취한 사람들이 휘청거리는 거리를 함께 쓸었고, 그때 올라오는 짜증과 성취감의 이중성을 공유했다. 혼자라면 어쩐지 움츠러들었겠지만, 언니들과 함께여서 쓰레기봉투를 어깨에 짊어진 채 당당히 거리를 걸었다. 그때 흥얼거리는 언니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새벽 공기가 꽤 상쾌했다.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동시에 대걸레를 빠는 비법을 나눌 때는 환호했다. 시간이 흘렀고, 그러면서 저절로 이해하게 됐다. 우리는 저마다 사정이 있다는 걸.
우리는 서로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았지만 꽤 공감하는 사이가 됐다. 나는 언니들의 움직임에 전이되어서 기운을 차려갔다. 힘들거나 말거나, 고통스럽거나 말거나 말이다. 새벽에 일을 하고 밥을 챙겨먹고 잠을 자면서 내 몸을 챙기는 일의 위대함을 언니들에게 배웠다. 언니들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를 하라면서 헤드폰을 쓰고 일하게 해줬다.
나는 아직 데면데면했지만 언니들의 휴가는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싶었고, 먼지를 잔뜩 마신 날은 견과류와 건강음료를 나눠먹었다. 남자 매니저가 선을 넘는 친절을 보일 때면 함께 경계했고 무례하게 행동할 때는 함께 맞섰다. 그러는 사이 내게 찾아온 겨울의 고통이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는 조금 덜 뾰족하게 바뀌어 있었다.
어떤 기다림은 다시 태어나는 투쟁이 된다
그때의 나는 소이 같았던 걸까, 소이의 아빠 같았던 걸까? 사비나 같았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어땠는지 지금은 어떤지 아직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오랜 친구들이 내 곁을 지키는 게 힘들어 보이긴 했다. 어렴풋하게 내 사정을 알던 친구들은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줬지만, 고통에 모난 내 마음을 보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내겐 적절한 거리에 언니들이 있었다. 고통에 침잠한 시절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재미난 일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아름다운 것들이 발견됐다.
그리고, 아직 이 상관관계의 신비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언니들이 이해가 되면서 내가 고통스러웠던 지점의 문제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졌다. 그건 소이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사비나를 통해 소이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것들, 아빠의 슬픔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언제나 기다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어떤 기다림은 분명 다시 태어나는 투쟁이 된다.
나는 사비나를 통해 고통받았던 이의 위대함을 엿보기도 한다. 사비나는 어떤 통증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러하기에 좀 더 빨리 소이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자신의 아픔이 있기에, 소이와의 적절한 거리를 잘 찾고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지금 슬픔에 사로잡혀있다고 해서 언제나 모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고통에 갇혔던 경험은 때로 다른 이의 고통을 먼저 알아보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열쇠를 찾아주는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름의 잠수』는 어쩌면 해피엔딩이고 어쩌면 새드엔딩이다. 해석은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우리 모두 괜찮아졌다고 말하고 싶다. 소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사비나와 함께 헤엄쳤던 여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건 소이에게 또 찾아올지 모르는 어떤 고통 앞에서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게 하고, 해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될 거라 믿는다.
지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부디 질문과 기다림을 멈추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계절은 결국 흐르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괜찮은 일들이 다시 시작되리라 믿는다. 당신이 부디 힘을 내면 좋겠다.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 2018)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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