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둘이 식당에 가면 나는 엉뚱한 곳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본다. 대개는 나와 눈을 제대로 맞추지 않고 그에게 의사를 묻는다. 젊은 외국인 여성인 내가 독일어로 주문을 할 리 없다는 듯이. 계산을 할 때도 당연히 그가 지불할 것을 기대하는 모양새이다. 나는 그들의 선입견을 깨기 위해 ‘주문하고 지불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심지어 더치페이를 할 때도 그에게 미리 돈을 건네받아 함께 낸다. 내가 지갑을 펼치면, 그를 향해 45도 각도로 몸을 돌리고 있던 사람은 아, 하고 미세한 탄성을 내며 내 쪽으로 자세를 고친다. 나는 왜 이런 ‘불필요한 디테일’에 신경 쓰게 되었을까?
둘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귈 때도 언짢은 나의 발견은 되풀이된다. 상대방은 으레 우리의 국적을 묻는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답을 얻고 나면 그 사람은 미국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성심성의껏 어필한다. 미국 정치에 대한 상식이랄지, 그의 고향에 대한 인상, 혹은 자기 영어실력에 대한 사과나 변명. 그러다 보면 어느새 미국인과 미국에 대해 대화하는 자리가 되어있다. 단지 미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관심과 호의를 독차지한다는 게 말이 되나?
모순과 혼란으로 헝클어진, 꼭 내 마음 같은 마음을 만나다
어쩌다 보니 나의 애인은 미국에서 온 백인 남성인데, 이건 사실 연애 처음부터 일종의 치부였다. 백인 남성만은 아니어야 했다. 백인 남성 특권이 작동하는 사회에 반대하고 저항하려는 내 정치적 지향과 모순되니까. 하지만 그 연애는 나의 생존과 안녕에 착실하게 기여하며 지속되어 왔고, 백인 남성, 그리고 그들의 안락과 번영을 떠받치는 사회에 대한 나의 분노와 적대감, 피해의식 또한 지속되었다. 거기에 또 다른 마음들도 있다. 백인 남성상을 무심결에 동경하는 마음, 이런 사회에서라도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마음, 백인 남성의 언어로 주류 문화의 생산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모순이다. 내 안의 이런 모순이 부끄럽거나 죄스럽지는 않다. 불가항력이고 불가피하다. 다만 늘 무거웠고 껄끄러웠다. 내 선택으로 백인 남성 중심 사회로 이주해왔지만 불편함은 생각보다 크다. 생김새와 출신지의 다름을 늘 지적받아야 하는 것, 그 다르게 보는 시선을 견디는 것 말이다. 그래도 포기한 적은 없다. 나 자신으로 ‘나’ ‘내 것’을 놓지 않고 산다는 마음가짐을. 무척 궁금하긴 하다. 시간이 더 흐르면 내 마음이 좀 무뎌질까? 이 사회가 좀 바뀔까?
얼마 전, 그런 나의 ‘이주민의 번민’에 큰 위로와 울림을 주는 에세이 <남은 인생은요?>를 만났다. 한국 태생의 작가 ‘성’의 데뷔작인 이 책은 미국에서 2017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며, 지난 8월 미디어일다에서 번역서가 나왔다. 저자가 미국 이민 1세로 시카고 지역에 살면서 겪은 학대와 폭력, 약물중독과 가족 문제에 대한 회고록이자 ‘현재진행형 트라우마 치유기’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3장에 걸친 열 편의 에세이를 만나볼 수 있다. 작가가 문예창작과를 다니며 여러 해에 걸쳐 하나씩 써낸 것으로 보이는 에세이들은 다채로운 스타일과 정서, 시공간을 넘나든다. 미국 시카고 노동자 계층의 일상적인 풍경과, 학자금 상환을 위해 군복무나 서비스직 일자리를 오가는 저자 주변 인물들을 보여주는 단편들(<그런 개같은 건 없다> <남은 인생은요?>)은 내면에 치우치기보다 사건과 장소를 세심하게 묘사하며 그때 그곳의 장면을 독자 앞에 그려 보인다.
희미한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과 한국 음식에 대한 원초적 애착, 가족에 대한 애증이 드러나는 애잔한 글(<오, 쌀을 넣은 닭고기 수프> <금붕어와 미꾸라지>)에서 저자의 목소리는 느리고 차분하다. 어휘 사전의 형식을 본따 한 단어가 담는 다층적인 개념들과 거기서 연상한 기억들을 서술한 <치유에 대한 몇 가지 메모>는 실험적, 독창적인 언어 사용이 돋보이는 단편이다.
강력한 포식자 ‘악어’와 나란히 등장하는 전 애인 ‘폴리’와의 만남부터 관계의 종결까지 회상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꽃은 겁쟁이들에게나 줘라>는 작가와 독자 모두를 처참한 공포와 고통으로 몰아가지만, 마지막 챕터에서는 남편 브라이언과의 불완전하지만 안전하고 따뜻한 일상이 펼쳐진다. 저자는 말미에 여전히 자신을 “인생을 망친 인간”이라 말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누군가를 돌보고 상대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빛에 싸인 것처럼 바라보는 행동”이라고 자신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기도 한다.(<Where is this bitch going> <LOVE BUG>)
①혐오와 애착: 백인 주류 문화와 ‘내 것’에 대한 양가감정들
<남은 인생은요?>에서 가족과 애인, 친구 같은 개별 인물들 외에 자주 호명되는 이름이 있다. 바로 ‘백인 남자’이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인종이나 성별은 따로 밝혀지지 않는 반면, 기명 혹은 무기명의 백인 남성들은 빈번하게 저자의 경멸과 동경 그리고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 나온다. 성은 “전쟁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계속해서 야한 말을 해달라고 조르는”, ”한 번도 나와 같은 류와는 한 적 없다”는 백인 남자애들과 숱하게 섹스를 하고 술을 마셨다. 찰스 부코스키나 레이먼드 카버 같은 백인 남성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들처럼 글을 쓰고 싶다. 그들처럼 읽히고 이해받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이렇듯 자기모순을 되풀이 하는 저자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백인 남자가 기본값인 미국 사회에서 비백인 비남성인 저자는 “보편적으로 황량한 감정적 지형”을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 ‘파리 리뷰’나 ‘아틀란틱’ 같은 문예지가 권장되는 미국 문학계에서 가르치고 비평하는 이들 다수는 여전히 백인 엘리트 계층이며 작가 지망생인 성에게 “남성 인물을 잘 쓴다”는 칭찬을 건넨다.
저자가 한국 문화에 무지하거나 이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음식으로 대표되는 ‘내 것’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자긍심은 주먹밥과 보쌈, 설렁탕, 김치담그기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빛나는 <오, 쌀을 넣은 닭고기 수프> 편에서 여지없지 드러난다. 하지만 영어로 사유하고 표현하도록 훈련받는 문예창작과 수업에서 우리말, 그리고 그 말이 수반하는 정서와 기억을 꺼내놓기는 까다롭기만 하다. ‘Soo-Bin(수빈)’ ‘Ki-Hong(기홍)’ 같은 한국계 이민자들의 사춘기를 그리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할지 가르쳐 줄 사람은 학교에 없다. 결국 “나는 내가 아는, 사랑하는 그리고 나인 사람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전혀 모른다”며 혼란에 빠지고, 한국어는 “라틴 알파벳이라는 틀을 거쳤을 때 납작하게 짓눌려 못나 보”인다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작가들 누구나 그렇듯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인데도 이주민으로서 그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는 비주류 문화는 구구절절한 해설과 번역을 필요로 하고 “독자들이 감정에 녹아들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미국에서 아동기부터 살아온 성에게 백인들은 여전히 묻는다. “한국에서는 다 불교 신자인가요?” 자신 역시 불과 3세대 이전에 건너온 이주민 집안의 후손이어도, 사람들은 성을 한국에 대해 무엇이든 물을 수 있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질문하면서 침입을 중재로, 트라우마를 하찮은 사건으로, 유산을 역사로, 경계심을 적대감으로 치환”한다.
성의 백인 남성 혐오는 전 애인 ‘폴리’와의 일화들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폴리는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참전 군인이며, 스스로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종차별주의자. 여성혐오주의자이다. 전형적인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 모습을 한 그가 성에게 하는 칭찬이라고는 “이민자치고 깨끗한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해로운 관계임을 알면서도 약물중독과 트라우마, 의존 성향 때문에 성은 그를 쉽게 끊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에게 있어 치유, 혹은 자유란 백인 남성을 더 이상 혐오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자기 안의 온갖 모순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용기 내어 말할 수 있는 것, 그 작업 자체가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사회에 던지는 물음표이자 느낌표라는 생각이 든다. 백인 혐오는 얼마쯤 자기혐오로 되돌아올 만큼, 관계 맺는 대상과 ‘나’는 서로 다른 만큼 닮았다. ‘내 것’이 힘없고 초라해 보여서 열등감을 느낄 때에, 그것을 소중히 아끼는 마음 역시 곁에 버티고 서 있다. 거대한 문화 포식자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는 정체성 투쟁, 그 끝없는 긴장과 갈등은 실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해야 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②낭비와 음미: 작가의 감각으로 복원한 약물중독자의 삶
한국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저자의 약물중독과 자기 학대 이야기에 흠칫 놀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보고 들어온,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유혹에 굴하지 않고 주님과 공동체의 도움으로 성공했다는 ‘자랑스런 미국 교포’들의 서사와는 다르다. 이 책을 수많은 트라우마를 겪고 ‘살아남은 몸’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으면 좋겠다.
‘트라우마, 가족, 중독, 몸에 관한 기록’이라는 부재가 드러내듯이, 가족은 성의 트라우마 경험 속에서 가해자 혹은 목격자로 빈번히 등장하고, 진통제가 필요한 몸은 중독으로 이어졌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불가피한 폭력을 겪고 귀가하는 자녀의 치유를 도울 의무가 있지만, 이주민 부모는 그 과제 앞에서 한층 무능할 때가 많다. 그 자신들 역시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화적 혼란과 존재의 모멸 속에 살기 때문이다. 성의 부모도 그랬다. 위로하고 공감하기보다, 침묵하고 비난하고 처벌했다. ‘술을 마시고 숨는 법을 배운’ 아버지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틀어놓고 매실주를 마시며 “백인 남자라면 이런 슬픔을 연주하지 않지”라고, 에둘러 말할 뿐이고, 엄마는 ‘자기혐오의 연장선’인 딸에게 멍자국을 남겼다.
아이를 ‘사랑했지만 제대로 사랑하는 데는 실패한’ 부모와 단절되어, 성은 방문을 닫아걸고 말문도 걸어 잠근 채 점점 자란다. 자기혐오와 학대를 되풀이하는 그는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누군가의 온기와 관심이 절실해 밖으로 떠돈다. 심리상담실과, 낯선 남자들의 침대, 정신병원, 서비스직 아르바이트, 문예창작과 강의실, 참전 군인 친구들이 모인 하우스파티에서 성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죠’와 ‘정말 미안해요’를 오가며 ‘멀쩡하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그 시간 내내 그의 몸은 인종 차별을 받는 몸, 성 착취와 학대를 견디는 몸, 약 성분을 해독하고 자해로부터 회복되는, 그런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몸은 어찌되었건 살아남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관찰하며, 기억을 운반하고 숙성해 다른 이가 독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내는 몸으로도 기능해왔다.
그리 편안한 독서는 아니지만 초반의 충격과 껄끄러움을 극복하면, 독자들은 예상치 못했던 이해에 도달할 것이다. ‘약물중독자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항정신성 약물에 대한 금기와 통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약물중독은 대개 혐오와 편견의 대상이지만, 저자는 섬세한 묘사와 감각의 복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너무 많이 느껴져서 괴로웠다고, 그걸 무디게 해줄 뭔가가 필요했다고. 너무 무겁고 어두웠다고, 거길 따뜻하게 밝혀줄 뭔가를 먹었다고.
나의 독서는 저자의 중독 문제를 독해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남은 인생은요?”라는 질문이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정신 수양을 통해 “낭비를 최소화한 삶, 뚜렷한 목표와 책임으로 이뤄진 삶”이 가능해졌다며 성에게 “지금은 매일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괜찮겠지만” 남은 인생은 어쩔 거냐고 개과천선을(49쪽) 촉구하는 지인 바스티앙은 저자가 한껏 음미하는 시간 역시 살아가고 있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다.
오후까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을 할일 목록에 넣어야하며, 한껏 약에 취하지 않고서는 차마 들어갈 수 없는 너저분한 집으로 대표되는 ‘게으른 생활’은 저자가 자기혐오를 계속하는 동력이 되고 이는 곧 삶은 낭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은 어떤 순간들은 영겁의 시간처럼 살고 있다.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들, 정신 병원에서 마주치는 비참한 얼굴들, 어린 시절 도시락 반찬 위로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던 학급 친구까지, 저자는 많은 삶의 시간을 넘치도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종이 위에 풍부하게 되살려 다른 사람과 나눈다. 그건 삶을 음미하는 것 아닌가. 무엇이 낭비인지 남의 인생을 감히 누가 재단한다는 건지. 그리고 인생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법은 또 어디 있는지.
③우울과 환희: ‘너무 지쳐 있지만’ 계속 쓸 수밖에
삶의 모순과 혼란을 음미하는 이주민의 글쓰기, 이제는 이 책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성의 용기 있는 작업에 힘입어 나도 미뤄온 나의 글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정말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근래에 발견, 혹은 발병한 정신질환이 나의 일상과 존재를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지에 관한 글이다. 물론 마음을 먹었다고,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이 든다고 일이 술술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프게 된 나는 “제가 회복되었거나 심지어는 회복되는 중이라고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성의 자기 불신과 “문제가 계속 나타났다가 잠잠해지길 반복하고 그걸 억제해보려고 하지만 때때로 엉망이 될 것”같은 확신에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거나(19쪽),” 무심코 저녁거리를 썰던 식칼을 자기 팔뚝에 내리꽂고 싶은 온 사방으로 뻗는 분노와 적의, 정신 차리고 보면 뭔가를 부수고 내던져버린 뒤 자기혐오와 자책에 시달리는 것. 주기적으로 극심한 공허와 피로에 절어 어제까지 해온 일들이 전부 부질없으며 결코 완성할 수 없다고 납득하고 마는 것. 그 기진맥진한 날들이 지나가면 또 뭔가를 써보고 싶어지지만 사실 그 정도의 힘은 없음에 한참 비관하다가 이빨 대신 잇몸, 어눌해져 버린 언어를 내려놓고 사진기를 들고, 수공예를 하는 것. 나는 이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런 내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이야기를 가치 있게 보지 않는 것” 같다는 성 덕분에 내 삶의 가치를 본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음 문턱에 갔던 성은 퇴원을 했고, 악의나 폭력 없이 온전한 사랑만을 나눌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났으니까. 무사히 데뷔작을 출간해내고 대학원에도 진학했으니까. 무엇보다 위악과 모순, 혐오가 공공연한 데다가 약하고 변덕스러운 성의 이야기에 또다른 수많은 성들이 독자의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그걸 보면서 나도 살아 보기로 한다. 그 서서히 소용돌이치는 느리고 거대한 치유의 에너지, 그 품에서 계속 살아 보기로 한다.
‘클레어’나 ‘조안’ 말고, 성의 글을 계속 읽고 싶다
성에게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두려워 말라고. 당신이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 백인 남자는 느낄 수 없는 감각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독자 눈에는 빤하다고. 파키스탄계 이주민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비숙련 서비스 노동을 제공하는 비백인 이주민) 앞에 차를 세운 엄마에게 “네가 우리 가족을 망쳤어”라는 비난을 들으며(이주민 가족의 세대갈등), 눈으로는 샘플만 잔뜩 맛보고 돌아가는 백인 아이들을(미국의 가장 큰 소비집단) 쫒는 성이 ‘이것보다 더 미국적인 풍경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쓴 것. 이를테면 그런 관찰.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는 건강한 동네로 잡지에 오르내리는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성이 느낀 불편함. 이제껏 만난 백인들 중 가장 백인스러운 사람들, 개들에겐 한없이 친절하지만 유색인종에게는 차가운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히피 가게로 잠시 도피하지만, 머릿속으론 이내 친절한 백인 아주머니들이 외면한 불공정 무역의 현실을 상기하는 것. 그것에 대해 신랄하게 쓰는 성의 글쓰기. 나는 그의 글을 계속 읽고 싶다.
그리고 원고를 독촉하는 편집자의 격려 같은 이런 말들은 내가 나에게도 해주고 싶다. 독일인 지인들이 한국어로만 글을 발표하는 나에게 마치 아주 손쉬운 일이라는 듯이 독일어로도 번역해서 출판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박탈감에 젖는다. 한국계 이민자의 글에 누가 주목할까? 독일 언론에선 띄엄띄엄 북한 소식이나 발효식품 김치의 우수성을 떠드는 기사가 나올 뿐인데. 내가 영어로 글쓰는 사람이었더라면 나의 글이 같은 내용이라도 더 멀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았을 텐데. 아, 아마도 같은 내용일 수 없겠지.
박탈감 끝에는 체념 같은 다짐이 찾아온다. 이국적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공감 받는 이야기의 화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긍정하자고. ‘클레어’나 ‘조안’같은 필명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백인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함’을 ‘속하지 않음’으로 바꿔 말하자고. 이주민의 동화나 통합은 판타지라고.
<남은 인생은요?>의 추천사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새로운, 정착되지 않는 미국을 흡수하고 기록했다”고 썼다. 칭찬이긴 하지만 틀린 말 같다. 전혀 새롭지 않다. 이주민들로 구성된, 200년 이주 역사로 만들어진 나라 미국은 정착한 적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정착은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이주민들이 언제나 거기서 살아왔다. 그 목소리가 이제야 레닌 한센 같은 사람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TV 다큐 성공시대를 보며 휴일을 보내고, IMF 금융위기 이후 아메리칸 드림 반짝 부흥기를 지났으며, 탈조선 드림 속에 원어민 전화 영어나 해외 취업 수기를 검색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까? 몹시 궁금하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현재 독일 프라이부르크 거주. 그 동안 일다에서 <29살, 섹슈얼리티 중간 정산>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독일 여성 난민들의 말하기> <하리타의 월경/만남>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를 연재했다. 최근에는 사진과 수공예 작업을 하는 브랜드 ‘Harita Moonrider Arts’를 시작했다. 자기 안에 모순과 결핍에서 출발하는 진솔하고 뜨거운 글쓰기를 지향한다. haritamoonrid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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