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습니다. 지금 그리고 코로나 이후, 이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길 바라며 기획하였습니다. [편집자 주]
자기소개를 직업으로 대신하는 사회에서 나는 그냥 아기 엄마이다.
결혼 2년 만에 다니던 회사의 부서가 사라지면서 강제백수가 되었다. 아기 없는 기혼여성으로 본 면접에서는 남편 믿고 쉬는 사람, 곧 임신해서 혜택만 챙기고 퇴사할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받으며 번번이 탈락했다. 취직하면 3년 이상은 임신하지 않을 계획이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고, 그렇게 ‘경단녀’(경력단절여성)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기를 낳고 나 자신을 찾자’는 맹랑한 생각을 하게 됐다.
입덧만 지나가면 계획했던 일들을 할 수 있을 거야
입덧이 그냥 조금 앓고 지나가는 가벼운 감기나 월경통 정도라고 생각했던, 무지했던 과거의 나. 내 몸 속에 자리 잡은 콩알만한 아기집은 발견됨과 동시에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마치 태어나기 전에 연습이라도 시키려는 건지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커피 마시는 남편 옆에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러다 입으로 애가 나오겠다 싶을 정도의 구역질이 두어 달 지속되었고, 눈을 뜨기 두려울 정도로 매 순간이 괴로웠다. 앞으로 몇십 배는 더 커질텐데 얼마나 날 더 힘들게 할까, 과연 임신이 축하받을 일이 맞나. 출산일까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며 태어나 처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덧이 심하면 생강젤리가 도움이 된다기에 찾아봤더니 글쎄, 젤리라 당분이 많아 태아에게 안 좋을 거란다. 물도 못 마시고 구역질만 하는데 태아의 발달을 위해 영양소를 잘 챙겨 먹어야 하고, 어지러워 눈 뜨기조차 힘든데 클래식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정서적인 태교를 하고, 몸을 일으켜 화장실 가기도 버거운데 꾸준한 운동을 해야 한단다.
감기조차 각자 다른 증상을 보이는데,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그야말로 산모마다 천지 차이일 것이다. 임신 후에 알아보는 모든 정보들은 임신 상태에서 어떠한 행동을 해도, 어떤 음식을 먹어도 태아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거라는 식으로 귀결되고 있었고, 이상증세와 불편함의 원인은 임신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니 안심하라며 뭉뚱그려졌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생명을 잉태한 신성한 임산부와는 붙여 쓰이면 안 되는 단어들만 계속 생각했다. 조심스레 모두가 자는 새벽, 초록창에나 뱉어낼 수 있던 것이었다. 그나마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누군가의 글들이 참 안심이 되었다. 행복하기도 하면서 우울하기도 한 양가감정도 임신증상 중의 하나라고 하니, 꾸역꾸역 버텨낼 뿐이었다. 이것만 지나가면, 계획했던 일들을 할 수 있을거야 라는 희망으로.
‘임산부 외출 자제’ 뉴스와 함께 갇혀버린 삶
최초 확진자 발생지역이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웠기 때문일까, TV를 볼 수 있게 되자 내내 나오는 ‘임산부 외출 자제‘라는 자막뉴스가 왜 그렇게 커보이던지.
임산부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은 당연히 취소되었고 지인들과의 만남은 한없이 뒤로 미루어졌다. 엄마조차 임산부인 딸과의 만남을 불안해했다. 함께 사는 남편을 제외한 모든 관계와의 연결고리가 잘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편안하고 안락했던 집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나갈 수도, 누군가 찾아올 수도 없는 공간에서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하며 무기력하게 흘려보냈던 시간들.
와중에 남편은 원거리로 외근을 나가기 시작했다. 버스에 지하철에 기차까지 타는 장장 왕복 6시간의 출퇴근을 내내 해가며 회사에서 지원해준 숙소도 마다하며 여름철까지도 두꺼운 마스크 속에서 출퇴근을 해왔다. 나와 아기를 위해 항상 괜찮다고 말하는 남편이 고맙고 안쓰러워 깜깜한 새벽 5시 30분 남편이 출근한 후 소파에 앉아 엉엉 운 날도 많았다.
남편은 발령 전부터 회사에 출산예정일에 대해 끊임없이 어필해왔다. ‘전화 받고 뛰어가도 3시간이 넘게 걸린다. 운 좋게 위급상황이 없더라도 막달엔 언제 출산할지 모른다’고. 출산 두세 달 전이면 무조건 본사로 복귀할 거라고 장담했던 상사들이 점점 ‘애는 와이프가 낳는데 뭐가 문제야? 장모님 계시잖아.’라는 입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배우자 출산휴가를 낸 2주간의 기간에도 휴가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각각의 입장들이 참 달랐다고 한다. 조언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길게 쉬어서 좋겠다. 와이프가 애 보잖아, 술 한 잔 하러 나와.’하는 사람들까지. 출산휴가가 끝나고 출근하자마자 남편이 들은 말은 이거다. “잘 쉬고 왔어?”
정상 근무를 시작하고 남편이 고백했다. “주말에 애 보는 것보다 출퇴근하는 게 덜 힘들어.”
나는 최대한 내 몸이 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출산과 육아 방식을 선택하고 싶었다. 날짜와 시간을 정할 수 있는 제왕절개수술과 나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분유 수유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임신이라는 커다란 신체의 변화와 신비를 느끼며 인위적으로 큰 수술을 하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 자연분만이 다들 좋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바뀌어갔고, 닥치고 결정해도 늦게 않겠다며 결정을 차일피일 미룬 것도 사실이다.
임신 막달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병원도 전원해야 했는데,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진료받은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아기 머리둘레가 많이 큰 건 알고 계시죠? 지금 평균보다 5주 이상 크네요. 초면에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어머님이 자연분만에 꼭 뜻이 없으시다면 위험하니 수술 하시는 게 좋아요. 속상하시더라도 꼭 수술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수유실입니다. 수유하러 오세요.”
수술 3일차 아침 병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어제 오후에 막 소변줄을 뺀 참이었고, 장기가 쏟아지는 느낌에 울면서 벌벌 떨며 침대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굴욕적이게도 남편이 변기에 앉혀주고 일으켜주며 오로(분만 후에 나오는 피 등의 분비물)패드까지 갈아줘야 하는 처지였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3일간 씻지 못한 몸을 물수건으로 닦고 마스크를 쓰고 복대를 차고 링거대에 의지하며 어그적 어그적 걸어 소독제를 온몸에 뿌리고 수유실에 입장했다. “아기만 안아보고 갈게요”, “그럼 일단 단추만 풀고 한번 봐봐요.”하며 갑자기 아기 입을 덥석 물려버렸다. “아유 이렇게 잘 먹는데 무슨 준비가 안돼~ 이따 또 콜 할게요~”
나는 그렇게 홀린 듯이 모유 수유의 길에 들어섰고,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쪽잠을 자가며 수유콜을 받고 유축을 하고 있었다. 출산 이후 내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엄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모유 수유 해주세요.”라는 슬로건이 있었다. 어느덧 나는 완모(모유로만 수유를 하는 것)를 꿈꾸게 되었다.
모성애를 강요받으면서 여성성은 지켜야 하는 아이러니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임산부에게는 ‘어떻게 이렇게 배만 나오셨어요’란 말이, 산모에게는 ‘애 엄만줄 모르겠어요’란 말이 칭찬인 사회. D라인이란, 완벽하게 태아 크기만큼만 나온 배를 뜻하는 걸까? 산전산후 관리는 아름다운 임산부와 산모에게 자신감을 되찾아준다면서 더 높은 가격을 받았고, 복대를 꼭 하고 다니라는 사람들은 장기를 잡아주는 용도보다는 뱃살과 허리라인을 잡아준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나는 막 큰 수술을 받은 환자이고 이제 겨우 혼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다. 건강과 안전을 중요시해야 하는 산모들조차 코르셋 안에 갇혀있는 듯했다.
출산 후 잊고 있던 산후검진을 뒤늦게 다녀왔다. 검진표에 이상증세를 상세하게 작성하라기에 굵직한 것들만 대충 써넣었다. 관절 시큰, 이명, 수술 부위 욱신. 시력감퇴. 의사가 쓱 보더니 “뭐 특별한 이상은 없는 거죠? 출산하고 다 있는 거 말고.”라고 말했다. 출산 후의 여성의 몸도 ‘아기 낳으면 다 그래.’라고 뭉뚱그려지는 걸까.
남편이 코로나19 검사를 받다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진열대에 탐스럽게 쌓아올려진 빵들은 단일 포장되지 않은 상태에선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레 식당에 자리 잡자마자 열었던 수저함은 비위생적인 판도라의 상자로 느껴졌다. 병원이라도 다녀온 날엔 아기가 울어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난 후에야 안아줄 수 있었다.
출산한 지 5개월이 접어들던 어느 날, 갑자기 휴대폰을 떨어뜨려 박살이 났다. 남편도 휴무였기에 급하게 근처 대형마트로 향했다. 아기에게는 마스크 대신 유모차 방풍커버를 단단히 씌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아기와 병원 이외의 첫 외출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한적했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긴장하며 화장실 한 번 들르지 못했다.
가게마다 정갈하게 디스플레이 된 모습들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애써 빠르게 지나쳤다. 헤매면서 QR체크인을 하고 커피를 한 잔 사들고 나왔다. 카페에서 들리는 캐롤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그날 밤 나는 쇼핑몰에 다시 가는 꿈을 꿨고 일주일 내내 그 여운을 느끼며 회상했다. 나는 집순이라서, 아기가 예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연했던 일상을 잠시 마주한 것만으로 꿈을 꾼 듯했다.
“나 검사 받으러 가.”
가슴이 철렁했다. 회사 직원의 가족이 코로나 양성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아기가 칭얼댔다. 이번엔 응가 폭탄. ‘아 기저귀가 작아진 건가.’ 또 옷을 갈아입혀 씻기고, 급하게 기저귀를 주문했다. 세탁기까지 돌리고 나니 무정하게도 아쉬운 생각부터 들고 말았다. ‘이제 막 이유식도 시작해서 손이 더 많이 가는데 나 혼자 어떻게 하지.’ 밀접접촉자의 간접접촉자이기에,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마스크를 끼고 분리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폭풍 성장하는 아기의 몸무게는 출산 후 약해진 관절들에 더 무리가 갔고, 치약 짜는 일, 그릇을 드는 일, 머리를 말리는 모든 필수적인 일상들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시기였다. 유독 엄마를 찾고 힘이 세지고 몸부림이 격렬해진 10kg의 건강한 아기에게 조금 더 천천히 자라도 되는데, 라는 야속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아닌 걸 알면서도 그냥 남편이 아기 좀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증상이 없는 검사자였기에 다음날 오전이나 되어야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간절하게 음성판정을 바라면서 잠이 들었고, 새벽에 몇 번씩 깨며 혹시 보건소에서 문자가 와 있진 않을까 기대했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회사 직원 모두가 음성판정을 받았단다. 남편은 바로 마스크를 벗었고 우리는 함께 식사하며 아기를 돌볼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의 코로나 음성판정과 혼자만의 돌봄노동에서 해방됐다는 것을 동시에 다행스럽게 여겼다는 것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아마 아기 낳기 전 과거의 나라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여동생이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선물해준 책이 한 권 있다.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우아영 저, 휴머니스트, 2019)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을 과학적 사실을 근거해 풀어준 매우 이로운 책이다. 이 글을 쓰며 동생에게 물어봤다. “나는 비교적 수월하게 임신출산을 겪은 편인데, 다들 당연하게 겪는 건데 나만 징징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당연한 이야기들을 좀 더 해야지. 그게 아직 당연한지 모르잖아.”
[필자 소개: 한여름. 이유식 공부 중인 6개월 차 아기엄마. 아기는 더없이 소중하지만 여동생에겐 임신과 출산을 권하고 싶지 않은 사람. 워킹맘이 되어 아빠와 다녔던 여행지들을 아기에게 보여주고 싶은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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