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들이 숫자로 불리지 않길 바랍니다

한국사회 구성원인 이주농업노동자들의 얼굴과 목소리②

우춘희 | 기사입력 2021/05/16 [17:11]

이주노동자들이 숫자로 불리지 않길 바랍니다

한국사회 구성원인 이주농업노동자들의 얼굴과 목소리②

우춘희 | 입력 : 2021/05/16 [17:11]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구성원입니다. 한국의 농촌 지역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출신의 노동자들을 만나서,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가시화되지 않았던 이주노동자들의 일상과 꿈, 노동에 관한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 알려지고 당신의 마음에 조금 더 깊이 가 닿길 바랍니다.

 

▲ 허 리다 씨는 충북 충주의 토마토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허 리다: 한국사람들과 촛불시위에 가보았습니다

 

제 이름은 리다이고, 캄보디아 프레이 벵에서 2013년에 한국에 왔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상추와 토마토를 재배하는 일을 4년 10개월 동안 했습니다. 새벽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11시간을 일합니다.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1년 지나고 나서야 차츰 적응이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의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처음에 한국에 와서 외롭고, 캄보디아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월급의 상당 부분은 캄보디아에 보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제 월급을 병원비로 많이 쓰셨어요. 어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베트남에 있는 병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많이 회복되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현재 많이 편찮으시고요.

 

휴일이 별로 없이 일하느라고 서울을 못 가봤어요. 지금은 쉴 기회가 있어서, 친구들과 경복궁에 가보았습니다. 한복도 2시간에 15,000원을 내고 빌려 입고, 사진도 함께 찍고, 페이스북에 사진들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2017년 겨울,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 때, 세종시에서 열린 촛불 시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갔기 때문에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다고 느꼈습니다.

 

▲ 보잉 왓아나 씨는 경기도의 여러 공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보잉 왓아나: 한국에 오기 전, 어린이집 선생님이었습니다

 

제 이름은 왓아나이고, 캄보디아 캄퐁참에서 왔습니다. 한국 오기 전에는 캄보디아에서 대학교를 2년 동안 다닌 후,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일했습니다. 20명 정도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2013년에 한국에 왔을 때 20대 후반이었습니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갑공장에서 2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삼성 핸드폰 만드는 공장에서 부품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거기서 1년 일을 하고, 그 다음엔 마스크를 만드는 공장에서 1년 넘게 일했습니다. 공장 일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일하는 것은 더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지하철 화장실에 갔다가 지갑을 두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지갑에 신분증, 돈, 은행 카드가 있었는데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경찰서에 가서 분실신고를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걸 안 경찰은 저에게 교통비 만원을 주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서 고마웠고,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월급을 캄보디아에 계신 엄마에게 보냅니다. 엄마는 그 돈으로 카사바 농사를 짓는데요, 카사바는 길쭉한 고구마처럼 생겼습니다. 캄보디아에 돌아가면, 엄마와 식당을 열고 싶습니다. 엄마가 요리를 잘 하시거든요. 식당 사장님이 되는 게 희망입니다.

 

▲ 팀 반타이 씨는 경기도 양평의 버섯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팀 반타이: 이주노동자들 모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왔습니다

 

저는 반타이입니다. 캄보디아에 있는 캄퐁 스푸에서 왔어요. 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에 아이들에게 영어를 2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한국에 오기 위해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 모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왔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 15일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소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봅니다. 이력서를 센터에 보내고, 한국 농장주가 그걸 보고 원하는 사람을 센터에 말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한국에 올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처음 외국으로 나가는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은 캄보디아에 비해 굉장히 발전된 국가입니다. 한국의 교육수준이 높은 것 같습니다. 캄보디아는 아직 교육수준이 낮고, 나이든 사람들은 이제야 ‘킬링필드’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캄보디아가 좀 더 정직한 사회가 되고, 국민들이 교육을 많이 받고, 더 발전되면 좋겠습니다.

 

(※킬링필드: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토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았고, 사회주의 국가를 만든다는 미명 하에 지식인과 부유층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또한, 도시인들을 대거 농촌으로 이주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죽은 이들을 한꺼번에 묻은 대량학살지를 “킬링필드”라고 하며, 전국에 800여 곳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찬 빗 씨는 경기도 용인의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찬 빗: 폭설이 내리면 비닐하우스 숙소가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저는 빗입니다. 캄보디아 깜퐁 참이라는 도시에서 왔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오토바이를 고치는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라디오에서 한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어는 너무 어렵습니다. 한국어 시험에서 3번 떨어졌습니다. 한국어 시험을 한 번 보는데 25달러(28,000원)이고, 여권은 170달러(190,000원)를 주고 만들었습니다. 한국에 오기 위해서 캄보디아 은행에서 돈을 빌렸고, 지금도 비싼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습니다.

 

2016년에 한국에 와서 경기도 용인의 농장에서 상추, 청경채, 시금치 재배를 했습니다. 쭈그리고 앉아서 매일 10시간 넘게 일을 해야 해서 허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무거운 스프레이 통을 매고 약을 치면 어깨가 많이 아픕니다. 약 냄새 때문에 머리도 아픕니다.

 

겨울에도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합니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12월에 잡초를 뽑고, 그 다음 해 1월에는 시금치를 심습니다. 겨울에 얼음을 깨기도 합니다. 이렇게 입김이 나는 것이 신기해서 동영상으로 찍어두었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닐하우스 30동 가운데 2동이 무너졌습니다. 저도 비닐하우스에서 자는데, 눈이 오면 무너질까 봐 걱정됩니다.

 

▲ 퐁 스룬 씨는 경기도 안성의 양계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퐁 스룬: 사장님이 많이 때렸지만, 경찰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룬입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보레이에서 왔습니다. 한국에 가서 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은행에서 돈을 많이 빌렸는데 갚지 못했습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2011년 4월, 경기도 양평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사장님이 술을 마시고 저와 다른 노동자들을 많이 때렸고, 위협했습니다. 경찰에 도움을 청했지만, 경찰은 우리에게 맞은 증거나 증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스마트폰도 없어서 증거를 촬영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경기도 안성에 있는 양계장에서 일했습니다. 닭 6만 마리가 6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냄새가 많이 나고 시끄럽기 때문에, 마스크와 귀마개를 항상 써야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일터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양계장에서 일을 많이 배우진 못했습니다. 닭이 아프면 어떤 주사를 놓는지, 어떤 약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이런 일은 의사들이 와서 했습니다. 저는 물, 사료, 전기선을 확인하고, 죽은 닭이 없는지 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그 때 당시 우리 농장에 조류독감은 없었습니다. 사장님이 조류독감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서, 저희들을 농장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음식을 사장님이 사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3개월 동안 농장 안에만 지냈습니다. 농장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 꼼 소피읍 씨는 경기도 양평의 버섯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꼼 소피읍: 사장 아들이 저에게 욕을 섞어서 말합니다

 

캄보디아의 바탐방에서 온 소피읍입니다. 저는 시엠립 앙코르 와트에 있는 한 호텔에서 2년 동안 미국 음식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2015년 4월에 한국에 왔습니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비닐하우스 채소 작물을 키우는 곳에서 베트남 노동자 2명, 캄보디아 노동자 2명과 함께 일했습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어요. 여름에는 정말 덥고 땀도 많이 흘리고, 금방 지칩니다.

 

힘들어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야채 포장농장에서 일했습니다. 포장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힘들고, 덥지 않아요. 한국 노동자 1명, 한국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여성 1명과 같이 일했어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더 오랜 시간 일하는데도, 한국노동자가 월급을 더 많이 받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저 혼자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너무 외롭고 무서워서 사업장을 바꾸었습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버섯 농장에 갔습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운반하면서, 허리와 어깨가 계속 아팠습니다. 사장 아들은 저에게 꾸중을 할 때 욕을 섞어서 말합니다. 그 사람은 제가 한국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천천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기분도 나쁘고,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 토은 비라붓 씨는 충북 증평의 버섯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토은 비라붓: 숙소가 불에 타서 없어져버렸습니다

 

저는 비라붓입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2015년에 한국으로 와서, 포천에 있는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알타리, 시금치, 열무를 재배했는데, 처음에 도착하고 나서 월급도 받지 않아서 매일 시든 알타리, 시금치와 열무를 먹었습니다. 4개월 동안 힘들게 일을 했는데 여전히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장님은 우리에게 돈이 없다고 하면서 집도 사고, 땅을 삽니다. 이상합니다. 안산에 있는 단체 도움을 받아서 사장님을 신고했고, 밀린 월급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 일한 곳은 충청북도 증평에 있는 버섯농장입니다.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 쉽니다. 거기서도 월급을 제 때,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밤중에 자고 있다가 이상한 냄새가 나서 일어나보니, 비닐하우스 숙소가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캄보디아 노동자들 10명을 깨워 무사히 빠져 나왔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었어요. 그러나 여권, 신분증, 돈, 핸드폰, 옷 등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숙소도 불에 타서 정말 속상합니다.

 

위험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차별이 없는 사회로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와 같은 “임시주거시설”에 1인당 집세를 내며 살도록 허가를 내줍니다. 이주노동자와 사업주가 맺는 표준근로계약서에는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이라고 적혀있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고용센터에서 이주농업노동자들이 10시간 일을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지만, 현장에서 모두들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정부의 “인력수급안정화 방안”이라는 틀에서, 숫자로 불립니다. 인력이 부족한 공간에 언제든 채워 넣을 수 있는 부품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은 언론에 잘 보도되지도 않을 뿐더러, 자세한 통계조차 나와있지 않습니다.

 

2018년 5월 한 달 간, 이주노조와 이주민 지원 단체가 함께한 “이주노동자의 빼앗긴 권리를 찾으러 떠나는 투쟁투어버스(투투버스)”가 전국 곳곳을 누볐습니다. 문제가 있는 사업장에 찾아가 시위를 하였습니다. 투투버스는 5월 마지막 날,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서 발언한 한 이주민단체 활동가의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위험한 세상에 함께 산다는 이유로, 함께 살자는 가치로, 모두 함께 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도 이주노동자들은 죽음으로 기억되고, 숫자로 불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이 불러지고, 이들의 삶이 이야기될 수 있도록,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까지 함께 연대하겠습니다. 투투버스가 누렸던 그 도로마다, 거리마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하는 염원이 새겨졌기를 바랍니다.”

 

(※2018년에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당시 이주노동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2018년 8월, 사회건강연구소가 주최하고 서울시 하자센터와 지구인의 정류장의 도움으로 개최한 전시회 <이주하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에 담겼습니다.)

 

[필자 소개: 우춘희.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 중에 있다. 캄보디아와 한국에서 현장 연구를 했다. 지금은 한국으로 이주한 캄보디아 이주농업노동자들에 관해서 논문을 쓰고 있다. 먹거리, 이주, 젠더에 관심이 있다. 2018년 사진전 <이주하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을 열었고, 2020년 <HYPHEN-NATION> 전시에 참여했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내고 싶고, 그 이야기의 힘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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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리 2021/05/25 [12:12] 수정 | 삭제
  • 이주노동자가 우리사회 구성원이라는 말이 참 좋다!
  • bli 2021/05/17 [14:12] 수정 | 삭제
  • 인터뷰정말 고맙네요. 한국사람들이 다들 자기가 외국으로 노동을 하러 간다고 생각을 해본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