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4부(재판장 김양호)가 강제징용 피해자 80여 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 선고하여 파문이 일고 있다. 앞서 지난 4월 21일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5민사부(재판장 민성철)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0인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 선고하였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원고의 주장을 검토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는 ‘기각’과는 달리, 본격적인 검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잇따른 과거사 피해와 관련한 국내 법원의 판단에 대해, 식민주의적 태도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4월 21일 일본군 ‘위안부’ 판결의 핵심적 문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소송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적어도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이자 식민지 조선 시기에 발생한 인권유린 사안에 대해 피고 일본군의 손해배상책임을 묻고 있다. 이미 수많은 증거와 증언이 수집되었고, 유엔의 인권기구들(자유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 고문방지위원회, 여성차별철폐협약위원회, 인권이사회 등)과 국제법률가위원회에서 그 불법성과 일본의 책임을 적극 인정했다.
피해자 대다수는 조선에서 사기와 위력에 의해서 강제 동원되었고, 아시아의 광범한 지역과 태평양상의 군도라는 엄청나게 먼 지역의 전쟁터에까지 끌려가서 일본군의 ‘소유물’과 같이 다루어졌다. 피해자들은 극심한 성폭력을 포함하는 다양하고 참혹한 인권유린을 당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받았을 충격과 공포와 모멸감과 자기부정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도 대다수 피해자들은 일본군의 적진이자, 모국에서 수천 수만 리 떨어진 타국에 방치되었다. 모국에 귀국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 때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사일생 아닌 천사일생(千死一生)으로 살아온 피해자들은 다시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의 방관과 무지로, 침묵과 고통의 삶을 감내해 왔다.
이와 같다면, 재판부는 우선,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피해의 성질과 중대성, 그 맥락 등을 살펴보았어야 한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피해호소를 경청하고 왜 이런 소송에 이르기까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피해와 그 피해에 이르게 된 불법행위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을 시간에 재판부는 국가면제(state immunity)라는 국제관습법을 연구한 것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청구 취지를 제외한 실질적 판결문의 2/3 내지 거의 전부를 국가면제(국내 법원이 타국에 대해서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법리와 판례에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면제가 본 청구를 본안으로 다룰지 여부를 정하는 ‘선결 문제’이므로 각하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함이었다고 일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을 살펴보면, 국가면제론은 단지 선결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차출’ 혹인 ‘성관계’와 같은 용어들은 그간의 국제기구와 국내외의 자료와 증언, 조사내용을 조금이라도 살펴보았다면 사법부가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용어들임을 알 수 있다. 엄격한 법적 증거가 아니더라도, 이미 축적한 자료들은 ‘위안부됨’의 피해란 목숨을 담보로 한 성착취였음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그 동원 과정은 사기와 함께 유괴, 납치, 당국의 묵인 등이 결합된 인신매매적 행위였다.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수개월에서부터 10여 년에 걸쳐서 고통받은 체계적 강간과 협박, 구타, 성병 감염, 상해, 기아 등은 ‘성관계 강요’라는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재판부가 사용한 표현들은 일본 정부가 그동안 일본군 성노예제에 관한 공적 책임을 부정할 때 쓴 표현들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일종의 기시감(déjà-vu)마저 든다. 나아가, 체계적인 성폭력을 ‘성관계 강요’라고 호명하는 것이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법원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인지 자성해야 할 것이다.
국가면제론 앞세워, 일본군 성노예제 범죄를 가볍게 취급
재판부가 그 불법행위의 성격을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피고가 행위 당시 가입하였던 ‘헤이그 육전법규관례에 관한 조약’(1907년) 및 그 부속서 제46조 위반,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금지협약’(1921년) 위반 및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1930년) 위반 등을 놓치기 어려울 것이고, 심지어 일본국 형법(1907년 제정) 제226조 국외이송목적 약취 유인 매매죄 규정 위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명확하고 심각한 실정법(positive law)의 위반에 대해, 국제관습법으로 인정되어 온 국가면제론이 기계적으로 우위에 놓일 수 있는지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게 중대한 불법행위를 고려하였다면 국가면제와 불법행위의 태양을 이익형량(weighing, Gewichtung: 대립되는 가치들의 중요성과 비중을 측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국가면제의 손을 높이 들어줌에 따라 피해자들의 피해와 불법행위의 ‘무게’를 달아보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피해를 매우 가볍게 취급한 셈이다.
물론, 국제관습법의 무게가 가볍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관습법의 성질상, 성문법과 달리 명백한 개정과 폐지를 하기 어렵고, 국제법원에서 간헐적으로만 판단을 받음으로써 그 시대와 사회에 부합하는 대세적 관습 즉 ‘법적 확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법사회학적으로 볼 때, 중대한 인권유린의 사실관계 및 아직도 처벌받지 않은 젠더범죄에 관한 피해자의 ‘사법부 접근권’(right to justice)이라는 피해자 권리 규범에 의거해 국가면제를 적용할지 여부와 그 한계에 대해 재판부가 논리를 구성해야 할 일이지, 이처럼 형식적으로 답습할 일은 아니다.
피해자뿐 아니라 인류공동체 위한 ‘대세적 의무’ 저버린 것
우리는 전 인류에게 ‘대세적 의무’(obligations erga omnes)를 부과하는 제노사이드(인종, 민족, 종교 집단에게 자행된 학살), 노예제도, 인종차별의 범죄에 관하여 알고 있다. 국제법에서 대세적 의무란 ‘국제공동체 전체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뜻하므로, 그 이행에 모든 국가가 법적 이익을 갖는 의무를 가리킨다. ‘모두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라틴어 ‘erga omnes’는 각국이 국제공동체 전체에 대하여 부담하는 의무를 언급할 때 사용된다. 제노사이드 등과 같은 국제법상 강행규범(jus cogens, 국제법상의 절대적 규범으로 어떤 국가도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다)을 위반한 경우에 모든 국가가 대세적 의무를 준수함에 따라 국제공동체 전체가 그 법적 보호로부터 이익을 받는다는 국제법 규범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인도에 반하는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에 관해 알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는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박해)라는 광범위하게 자행된 전대미문의 불법행위를 목도하고, 뉘른베르크 법정에서는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최초로 적용하여 책임자를 처벌하였다. 이로써 기존의 국가중심적 국제법 사유에서 벗어나서 책임 있는 개인들에게 해당 범죄 책임을 묻게 되었고, 국제법상 면책이었던 국가지도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에 반하는 범죄 개념을 도입하고 적용하는 것을 연합국 측이 주도한 면이 있지만, 이 범죄의 개념에는 시간과 공간 관할을 넘어서 인류 모두가 분노해야 할 죄라는 보편성에 기초함으로써 인류 평화와 국제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판결은 국가면제론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따르는 것이 품격있는 사법부가 가져야 할 태도라는 듯한 법형식주의에 빠짐으로써 중대한 부정의 상태를 오히려 도외시하였다. 이로 인해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심각한 인권유린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는 우(愚)를 범하였고, 대한민국 사법부가 단지 소송을 제기한 한국인 피해자뿐 아니라 인류공동체를 위한 ‘대세적 의무’를 이행할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재판부의 판결은 군계일학과 같다. 해당 재판부는 일본 국왕을 비롯하여 일본국과 일본군의 당시 최고지도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을 뿐 아니라 일본 정부에 대해 피해자에 대한 여러 구제조치를 권고하였다. 더 나아가 과거 연합국에게 ‘위안부’ 제도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도쿄재판소에서 이것이 소추되지 않았던 이유에 관한 군대 및 정부 기록을 모두 즉시 기밀해제할 것 등을, 유엔과 모든 회원국들에게는 일본 정부가 피해생존자 등에게 완전한 배상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 등을 권고하였다,
나아가 전쟁, 과도기 및 식민지 기간에 범해진 성에 기초한 범죄에 대해 역사적 기록을 작성하기 위한 ’진실과 화해위원회‘ 설립을 검토하는 것을 권고하였으니, 이런 판결이야말로 여성의 고통을 치유하면서 이루어지는 회복적 사법의 비전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보편적 인류애에 입각하면서도 아시아의 역사에 천착했던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의의에 대해, 오늘 다시 곱씹어보아야 한다.
[참고 자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편역, 『2000년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판결문, 히로히토 유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07 박병도 “국제법상 대세적 의무에 관한 연구”, 『일감법학』, 건국대 법학연구소, 40호, 97-127면, 2018
[필자 소개]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젠더 법학과 법사회학을 가르치고 연구해 왔다. 호주제 폐지와 한국 가족법의 ‘전통문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공권력 피해자의 증언 재현과 피해 회복,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권 시스템 마련 등 페미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와 법의 접점에서 다양한 연구 거점들을 만들어 왔다. 대표 저서로 『한국 가족법 읽기, 전통, 식민지성, 젠더의 교차로에서』(창비, 2011)가 있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