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자들 이야기'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선 자리를 지키는 일도, 정해진 장소를 떠나는 일도, 너와 내가 머물 공간을 넓히는 일도, 살아가는 일 자체가 투쟁인 세상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세상이 작다거나, 하찮다거나, 또는 ‘기특하다’고 취급하는 싸움이다. 세상이 존중할 줄 모르는 싸움에 존중의 마음을 담아,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공부하고 노동하는 11명의 필자가 인터뷰를 연재한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여자대학 안에서 투쟁하는 여성들 이야기라고 하면, 외부의 적과의 싸움을 떠올리기 쉽다. 여자대학은 여성들의 공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랜 기간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자대학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를 내며 투쟁하는 여성들이 있다. 바깥에서는 ‘분열’이라는 이름으로 납작하게 얘기될 뿐, 그 싸움 안의 맥락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당사자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포착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여자대학에 대한 대상화와 성역화, 그 경계를 넘어
여자대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며,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와는 달리,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례가 현재에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른 한편, 여자대학이 여학생으로만 채워진 공간이라는 이유로 ‘페미니즘의 성지’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사람은 여자대학을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할까?
연양갱: “(여학생들에게) 기회와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는 공간이죠. 하지만 특정 집단이나 사건이 과잉 대표되는 경향이 있어요. 남녀공학 대학에서 수많은 단톡방 성희롱이나 성폭행 사건들이 일어나도 그게 해당 대학의 꼬리표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근데 우리 학교에서 뭔가 사건이 발생하면 ‘숙대 ㅇㅇ사건’, ‘숙대 페미들 갈등’ 이런 식으로 꼬리표가 돼요.”
지수: “여대 밖의 사람들도, 내부의 사람들도 여대를 단일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봐요. 하지만 여느 공동체가 그러하듯, 여기에도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해요. 예를 들면 학생회장도 여자, 동아리 회장도 여자, 과 탑도 여자이지만 꼴찌도 여자고 수업에 늘 지각하는 사람도 여자죠.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존재들은 쉽게 지워져요. 그냥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공간으로 보는 시선이 있죠.
또 같은 숙대 학생이라고 해도 내국인 학생과 외국인 학생의 생활은 다르고, 학비와 생활비를 가족에게 지원받는 학생과 스스로 돈을 벌어 모든 걸 충당해야 하는 학생의 생활은 다르죠. 무엇보다 여대 내부에도 스스로 여성이라는 성별로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아요.”
연양갱: “‘우리는 같은 여성이니까, 서로를 비판하지 말고 동일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은연중에 있어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배제하고, ‘순수한 진짜 여성’을 가려내려고 하는 분위기도 있죠. 하지만 저는 모든 구성원들이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는 공동체가 안전하고 평등한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동문 정치인의 망언을 규탄한 성명서 발표 후
2019년 2월 8일.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김순례 전 국회의원은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향해 “시체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해 큰 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김순례 전 의원은 ‘2016 올해의 숙명인상’을 수상하기도 한 숙명여대 동문이다.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지수가 속한 51대 총학생회는 중앙운영위원회를 거쳐 김순례 의원 규탄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40일 만인 4월 8일, 해당 성명서는 철회되었다. 학내 반대 여론 때문이다. ‘공학 대학에서는 남성 동문들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큰 문제를 일으켜도 가혹하게 비판하지 않는데, 여성 정치인이 자리잡기 힘든 시스템 속에서 동문을 규탄하는 행위는 여성 네트워크 형성을 저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대 측 논리였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을 통해 더 많은 여성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에 그들의 결점을 부각하지 말고 강하게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그러나 지수는 기득권 층이 아닌 차별 받고 상처 받은 여성들과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는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김순례 의원을 규탄한 것은 단지 한 명의 여성의 행위를 비판한 게 아니라, 혐오와 차별의 피해자인 수많은 여성들과 손잡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지수: “김순례 의원을 규탄하는 공식 입장문을 내는 과정에서는, 크게 논쟁을 하지 않았어요.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족들, 국가폭력으로 아픈 기억을 지닌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잖아요. 우리는 숙대 구성원들이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고 소수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어요. 페미니즘은 기존 가부장제 권력을 빼앗아오는 게 아니라, 가부장제 질서를 깨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더 많은 소수자들과 연결할 수 있는 지점들을 만들고 확장해야 한다고요.”
2020년 1월, 언론을 통해 트랜스젠더 여성 A씨가 정시모집을 통해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A씨는 법적 성별정정 절차를 마쳤고 신입학전형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정성별(출생 시 해석된 성별을 의미하며, 성기에 따른 성별 지정이 갖는 모호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용어) 남성이 여자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여론이 숙명여대 안팎에서 거세게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A씨가 입학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연양갱: “2019년 9월,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일부 대표자들이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의 일종이다’라는 혐오발언을 한 적이 있어요.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있을 수도 있는 공식 회의 자리에서요. 학교 안에서 지속적으로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왔어요. 우리는 그 과정에서도 계속 싸워왔죠. 2020년 1월에 ‘트랜스젠더 여성, 숙명여대 법학부 합격’ 이 기사 제목을 보고서 ‘아, 에브리타임에 글 엄청 올라오겠구나’ 했죠.” (에브리타임은 대학별로 개설된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로, 학교생활 정보와 다양한 일상 글을 나누는 공간이지만 혐오표현이나 온라인 상의 괴롭힘에 대한 별도의 제재가 없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가 활동하던 숙명여대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는 앞장서서 A씨의 입학을 환영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재학생들, 그리고 1970~1980년대 학번인 동문 선배들도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혐오의 목소리가 그 이상으로 높았다.
연양갱: “우리 학교에 남성들이 들어와서 학생들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한 사건들이 거의 매년 있어요. 사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경험이 있기도 하죠. 여성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은 당연히 필요해요. 저도 필요로 하고요. 하지만,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고 혐오한다고 해서 안전한 공간이 확보되는 게 아니잖아요.
A씨를 대상으로 하는 아주 구체적인 괴롭힘 논의들이 있었어요. 말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요. 하지만,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인지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신입생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학생에게 위해를 가할 거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명백한 혐오죠. 지금도 여자대학에 MTF, FTM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가 있는데, 왜 지금까지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걸까요?”
연양갱: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가늘고 털이 많지 않고 흰 손목’을 가졌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남성과는 다른) ‘여성다운 목소리’를 가졌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낮고 굵은 목소리, 털이 많고 두꺼운 손목을 가진 여성은 배제의 감각을 느꼈을 거예요.”
숙명여대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안전하고 평등한 공동체는 배제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가? 단일한 구성원들의 정체성이 곧 안전으로 이어지는가? ‘안전한 여성 공간’이라는 허구의 경계에,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연양갱은 말한다. 배제가 아니라, 더 많은 여성들과 함께하는 것이 안전하고 평등한 여성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여성들이 살아갈 장소는 견고한 울타리 안이 아니라 더욱 넓은 세상이기에.
‘다시 만난 세계’, 공간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기
공동체 안에서의 싸움은 쉽지 않은 법이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대립하는 사람과 조별과제를 함께하고, 옆 자리에서 수업을 듣고, 학생식당의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게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페미니즘을 함께 외치고 ‘낙태죄’ 폐지와 불법촬영 근절을 요구했던 ‘동지’들의 변화를 목격한 순간을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로 꼽았다. 페미니스트이면서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여성들과 반목했던 시간들이 자신들을 가장 지치게 만들었다고 했다.
지수: “어쩌다가 이렇게 살게 된 거지? 싶을 때가 있어요. 저에게 대학은 애증의 공간이에요. 정을 다 떼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대학에서 만난 동지들이 있고, 앞으로도 고군분투할 사람들이 남아있을 곳이어서요.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바꾸고 싶었어요. 누구도 소외 받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공간이 되길 바랐어요. 공간에 대한 애정은 공동체에 대한 애정에서 나오잖아요. 결국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게 투쟁이죠. 보편적인 인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요. 미약할지라도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 우리 싸움이 의미 있다는 믿음이 활동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싸우고 연대를 확장하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새로운 희망과 애정과 가능성이 생겨나죠. 여성들이 어디에서든 자신을 지키며 계속해서 투쟁해 나갔으면 해요.”
연양갱: “2016년,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밝히는 기폭제가 된 이화여대 학생들의 점거 투쟁에서 <다시 만난 세계>가 새로운 ‘투쟁가’로 떠올랐고, 이후 페미니즘 행사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되었잖아요. 퀴어퍼레이드에서 다같이 그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영상을 힘들 때마다 돌려봐요.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힘을 얻는 거죠.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여성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누구에게나 버팀목이 필요하고, 자신을 챙기는 게 우선이라는 거. 그리고 막막하게 느껴지더라도, 주변에는 같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동지들이 있다는 거.”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中)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들은 싸우고 있다. 상처받은 여성들과 연대하기 위해, 더 많은 여성들과 손잡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만날 세계’를 향해서.
[필자 소개: 태린. 클 태, 굳셀 린을 쓴다. 이름처럼 크고 굳센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듣고, 말하고,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청년 여성들의 노동 기록 프로젝트: 소란'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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