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설화 속 여성 서사를 찾아서
내게는 네 명의 어머니가 계시다. 1895년, 1919년, 1937년, 1939년에 각각 태어나신 할머니, 큰어머니, 엄마, 시어머니다. 내 몸과 마음은 이 분들의 합작품이다. 한 때는 ‘배운 여성이 되어 당신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몸부림쳤건만, 내 얼굴은 갈수록 그녀들을 닮아가고 있다. 나처럼 살지 않겠다는 1991년생 딸의 얼굴에도 그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서로를 밀어내고 있지만 또 되풀이하기도 한다. 같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새삼 옛이야기를 다시 읽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이어온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 이야기겠는가. 옛이야기의 바다에서 ‘혐오로 가득한 막장 드라마’ ‘교훈을 주려고 의도된 서사’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팥죽할머니는 달걀, 자라, 물개똥, 송곳, 도구통, 덕석, 지게의 도움으로 호랑이한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제부터 전하려는 것은 호랑이의 훈계가 아니라 만만찮은 그녀, 우리들의 이야기다.
주변 사람들 예닐곱 명에게 <우렁이 각시> 이야기에 대해 아는지 물었을 때, 안다고 한 사람들은 모두 ‘우렁이 껍질 속에서 몰래 나와 밥 차려 놓고 가는 아름다운 처녀 이야기’라고 대답했다. 결말을 물었을 때는 순박한 총각과 잘 먹고 잘 사는 걸로 끝난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학중앙연구원, 1910년대부터 최근까지 채록한 전국의 민간 설화 등을 gubi.aks.ac.kr에서 검색할 수 있다)나, 『한국구전설화』(임석재, 평민사, 1987년~1993년, 전 12권)에 실린 우렁이 각시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맺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사람은 죽어불고, 그 나랫님허고 부자로 살었대요. 각시허고.>(한국구비문학대계: 1985년 전북 이금녀의 이야기)
<총각은 각시를 원님헌티 뺏겨서 그만 슬퍼서 땅을 치고 울었다. 얼매를 울었던지 울고 울고 히서 그만 목구멍에서 피가 나와서 피를 많이 토하고 죽었다. 그런디 총각의 목구멍에서 파랑새가 나와서 어디론가 날라갔다고 헌다.>(한국구전설화 7: 1933년 전주 백남승의 이야기)
이렇게 집단의 기억은 사실과 어긋나기도 한다. 하긴 각시의 입장에서 보면 나랏님(감사나 원님)에게 새로 시집가서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하는 결말은 비극도 아니다.
구술 채록본들에 따르면 <나무꾼과 선녀>처럼 <우렁이 각시>도 주로 여성들의 이야기다. 내가 유년기를 보냈던 1970년대 경상도 농촌의 살림집은 대개 방이 두 개였다. 사랑방에는 남자들이 생활하고, 안방에는 여자들이 묵었다. 실제로 나의 할머니는 1885년에 태어나 사남매를 두셨는데, “사남매 가운데 방에서 들어선 아이가 한 명도 없다.”고 하셨다. 젊은 부부조차 둘만의 방을 갖기는 어려웠으며, 여성은 대부분의 시간을 여성들끼리 보냈다.
친척이었던 S고모는 마을에서 강을 건너 오십 리 남짓 떨어진 곳으로 출가하셨는데,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시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키우며 평생을 홀로 사신 분이다. 몇 년에 한 번씩 친정 나들이를 할 때면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시곤 했는데, 이 분이 이야기를 참 재미나게 하셨다. 우리 집 안방에는 할머니와, 일찌감치 홀몸이 되신 큰어머니, 어렸을 적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큰어머니의 수양딸이 되어 고생하며 자란 H언니, 그리고 부모님의 쪼들리는 서울살림에 짐을 덜고자 한동안 큰집에 맡겨진 나까지, 네 여성이 지내고 있었다.
S고모가 오시는 날이면 시집간 딸네가 왔다는 핑계로 고모 또래 친척 며느리들도 모여들었다. S고모는 이야기 마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하나 생각나지는 않지만 그 밤의 생동감은 잊을 수가 없다. 이야기가 무르익을수록 엉큼하고 불경스러운 발언들이 무람없이 오갔으며, 욕망을 감춘 채 교훈 따위에 숨는 일은 없었다. 어린 아이였던 나는 행여나 이야기를 놓칠까 봐 안간힘을 쓰며 깨어있었지만, 눈치껏 딴청을 피우거나 자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나도 다 안다’는 신호를 함으로써 이야기판의 흥을 돋우며 자리를 굳히기도 했다.
<우렁이 각시> 이야기도 이렇게 자랐을 것이다. 안전하다고 느껴야 비로소 연한 몸을 드러내는 우렁이처럼, 진짜 이야기는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야 술술 풀려 나온다. 몸과 욕망의 주체임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녀들의 방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자.
<이상하다 카고 다음날에는 일하로 나간치 하고 집 뒤에 가 숨어서 망을 보고 있이일께네 점심 때찜 댕께 고동 속이서 아주 이뿐 처이가 나와서 정지에 드가서 또닥또닥 또닥거리더이 살밥캉 괴기반찬캉 한상 잘 채리각고 나와서 놓고 고동 속으로 드갈라 캤다. 총각은 이걸 보고 얼능 쫓어 나와서 처이로 붙잡고 나랑 살자 캤다. 처이는 안죽은 살 때가 몬댄다 쿤단 말이다. “그러나 저러나 우찌 되든지 나캉 사자”캄서 깍 붙잡고 놓지 안했다. 그리서 처이는 할 수 엄시 총각캉 살기 댔다.>(한국구전설화 10: 1973년 하동 고광술의 이야기)
각시에게 고동(우렁이) 껍질은 ‘자기만의 방’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밥을 지어 줄 수는 있지만 돌아갈 곳은 여전히 우렁이 껍질인 것이다. 그러나 총각에게 그것은 거무튀튀하고 딱딱하며 쓸모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총각은 각시에게 껍질을 버리고 자기 집의 속살이 되어 달라며 매달린다. 그리고 각시를 집 안에 가둔다.
<총각은 고동이서 나온 각시하고 살민서 각시로 밖이 내보지앙코 집안에만 있게 했다. 하리는 밧 쫏는 일로 마니 하겠다 카고 점심밥을 날라다 돌라꼬 어무이보이 일르고 갔다. 점심때가 점심을 해서 시어무이보고 갖다주라 카이 시어무이는 솥에 누른 누름밥이 욕심이 났는디 지가 엄는 새에 미니리가 누른 밥을 다 긁어 묵을가바서 안갈라꼬 니가 갖다 주라 캤다.>(한국구전설화 10: 1973년 하동 고광술의 이야기)
그런데 그 집에는 총각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의 배필에게 자리를 내 줄 생각이 없다. 덕분에 각시는 밥 광주리를 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고작 누룽지만도 못한 대접을 받던 각시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것은 마침 지나가던 원님(나랏님이나 감사일 때도 있다)이다. 원님은 각시의 아름다움에 반해 끈질기게 구애하고, 각시는 정조를 지키려고 혀를 깨물기는커녕 그의 가마에 오른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셈인데, 아내를 놓친 총각의 원통함에 무색하게 원님과 각시의 만남은 꽤 길고 로맨틱하게 묘사된다.
<“여봐라 저어기 저 논두렁 밑이 서기가 뻗치고 있으니 멋이 있는가 가보아라!” 항게 사령이 얼른 달려가서 봉게 이뿐 각시가 웅크리고 있었다. 사령이 가자 헝께 각시는 금가락지를 빼서 사령헌티 줌서 이것밲에 없더라고 허라고 힜다. 사령은 금가락지를 받어각고 원님헌티 가서 “이것밲이 없십니다” 헝께, 원님은 아니다. 또 “서기가 또 뻗치고 있다. 가봐라.”>(한국구전설화 7: 1933년 전주 백남승 등의 이야기)
각시는 ‘서기’(瑞氣)가 가락지와 비녀와 갓신에서 나왔다고 믿지만, 원님은 ‘아름다운 빛은 바로 당신’이라고 거듭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앞가마를 내주고 그녀를 맞이한다. 한편 총각은 하릴없이 어머니를 원망하지만, 사실 각시가 원님의 가마에 올라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원통함과 분함을 이기지 못해 죽어서 파랑새가 되었다고 한다.
여성들은 이 이야기에서 자기만의 방을 빼앗긴 채 가부장제 가족의 굴레 속에서 명석함과 아름다움을 빛낼 수 없었던 자신을 위로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옛이야기는 대부분 여성들의 ‘말’이었으며, 남성의 문자로 해석된 것에 한해 간신히 문학 대접을 받아 왔다. 그 과정에서 말한 당사자는 쉽게 지워진다. 더구나 어린이 교육용으로 재구성되면서 쉽게 기성 사회의 교훈을 담는 수단으로 쓰이곤 했다. 그 과정에서 ‘묘령의 처녀가 몰래 밥을 해주는 이야기’라는 남성 판타지가 이야기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집단의 기억은 그들의 기획물이다. ‘효자로서,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다 보면 평생 말없이 밥해 주는 예쁜 여성을 얻는다’는 따위의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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