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웹툰 『남남』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남』은 2019년 여름부터 연재되고 있는 카카오 웹툰 작품이다. 이 웹툰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작품의 주인공인 ‘진희’는 애인과 다투던 중 엄마에 대한 험담이 나오자, 머리끝까지 화가 나 씩씩대며 집에 돌아온다. 원래는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으니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돌아오게 된 진희는 집에서 엄마와 마주친다. 이때 엄마는 성인채널 영상을 틀어놓고 자위를 하던 중이었다.
『남남』은 1화에서 경고한 대로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았던 이야기―혹은 당연하지 않았지만 사실 당연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나는 보석 같은 대사들 중에서 다름 아닌 설 특집편에 실린 작가의 말을 기억한다. ‘이게 돼?’와 ‘왜 안 돼?’의 사이.
내가 재학하던 학교 총여학생회의 약 15~20년 전 슬로건은 ‘당연의 세상에 거부의 화살을 쏜다’였다. 2017년도에 들어서 다시 세워진 총여학생회의 슬로건은 ‘우리 대학에 틈을 내다’였고, 나는 여전히 이 문장들이 나의 여성주의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돼?’와 ‘왜 안 돼?’의 사이는 거부의 화살이고 세상의 틈일 것이다.
그리고 『남남』의 캐릭터들이 서로 관계 맺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이게 돼?’와 ‘왜 안 돼?’를 넘나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손을 잡으면 당연했던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하고, 몰랐던 세상의 틈이 나의 길이 되기도 하고, ‘이게 돼?’ 싶으면서도 스스로 왜 안 되냐고 반문하게 되기도 하니까. 그렇게 우리는 그전과 다를 수 없으면서도 절대 똑같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간다.
진희의 엄마는 고등학생일 때 진희를 가졌다. 과거, 고등학생이었던 엄마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빈곤하게 살면서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교생활을 한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고, 다른 친구들의 돈과 물건을 뺏는다. 자기와 비슷한 친구들과 놀다가 과음을 한 엄마는 친구네 집 화장실을 빌리고, 이때 마주친 친구네 오빠가 마음에 들어온다. 친구네 오빠는 엄마와는 다르게 얌전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조용한 성격의 인물이다. 엄마는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오빠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적극적으로 다가가 관계를 리드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 친구의 부모님이 엄마 같은 학생을 존중하지 않는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을까. 엄마는 친구네 오빠와 몰래 교제하는데, 서로 처음으로 섹스를 해보려다가 그 모습을 친구의 부모님께 들키고 만다. 이 사건은 마을에 파장을 일으킨다. 두 사람은 죄다 소문이 퍼진 학교에서 놀림 혹은 눈치를 받고, 친구네 오빠는 부모님께 폭행을 당하고, 엄마는 멀쩡한 집안을 풍비박산 냈다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억압의 시간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한 번의 성관계를 맺고, 친구네 집이 이사를 감으로써 연락이 끊어지지만 엄마는 이미 진희를 임신한 채다.
엄마는 임신 사실을 가정에도 학교에도 숨긴다. 얘기해봤자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아이를 지우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다. 딱 한 명, 유일하게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은 우연히 말을 섞게 된 같은 반 친구(같은 반인 것만 알고 얼굴도 몰랐던) ‘미정’이다. 미정은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아이를 지우는 게 낫지 않겠냐면서 “네 인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엄마는 그 말에 마음이 상해 미정과 더는 교류하지 않으려 하지만, 미정은 그가 눈에 밟혀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미정은 동네에서 엄마를 마주치고 심상찮은 분위기에 집까지 따라가게 되는데, 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도 폭행을 서슴지 않는 엄마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미정은 순간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리고, 주저앉아 있는 엄마에게 손을 내민다. 엄마는 미정의 손을 잡고 고등학생 때부터 미정의 어머니와 셋이서 살게 된다.
그때부터 진희의 가족은 엄마, 미정이 이모, 할머니였다. 추후 엄마는 할머니에 대해 “내가 정한 내 엄마”였다고 회고한다. 『남남』의 1부가 끝날 무렵, 진희의 할머니는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준비할 새 없이 급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자 생전 연락 한 통 없던 삼촌네가 찾아와 할머니가 진희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로 한 것에 대해 따지고 든다. 어째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자식인 진희에게 그 돈을 주냐는 것이다.
하지만 진희 엄마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갑자기 찾아온 삼촌뿐이고, 미정과 할머니에게 있어 진희 엄마의 이름은 혈연보다 가깝다. 이름에 대한 성찰은 할머니의 이름으로 이어진다. 혈연, 법적으로 맺어진 가족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진희는 외조모상을 당했는데도 회사에서 휴가를 받지 못한다. 상복을 입은 미정이 이모와 검은 정장을 입은 엄마를 뒤로하고 진희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이름을 곱씹어본다.
“이름도 모르는 년? 당신들이나 모르겠지. 세상에서 내 이름, 미정이 얘 다음으로 많이 불러준 게 얘네 엄마라고.” 『남남』 46화 이름 中 ‘박금순.. 할머니 친구들은 금순아 금순아 하고 불렀겠지? 할머니 이름이 엄청 낯설게 느껴졌다. 세상에 가깝고 낯선 이름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했다.’ 『남남』 46화 이름 中
가깝고 낯선 이름. 재미있는 점은 이 시점에 처음으로 엄마의 이름이 넌지시 밝혀진다는 점이다. 故 박금순이라고 적힌 전광판 아래에 유가족의 이름으로 ‘김미정’과 ‘김은미’가 쓰여 있는데, 빈소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미정과 엄마뿐인 것이다. 맞다. 1부가 끝나도록 독자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엄마의 이름은 ‘은미’다. 삼촌과 실랑이를 하면서 나온 말대로 ‘남남’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이름이 있지만, 가까운 동시에 ‘남남’처럼 낯선 이름들이 있다. 진희가 할머니의 이름을 두고 가깝고 낯설다고 한 것처럼 사실 은미의 이름도 그렇다.
남이 아니면서도 남남
진희와 은미는 분명 닮았지만 성격과 성향이 많이 다르다. 생활력이 없고 의존적인 성향의 은미, 가사에 능숙하고 독립적인 성향의 진희. 둘은 서로의 다른 점이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퍼즐처럼 잘 맞기도 한다. 이 모녀는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모습을 지켜가며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남남’이기 때문이다.
진희와 은미 모녀가 오랜 시간 함께 살면서 다듬어온 ‘남이 아니면서도 남인 경계’는 다름 아닌 진희의 친아빠의 등장으로 어지러워진다. 물리치료사인 은미는 어느 날 근무하고 있는 병원 원장의 후배라는 사람과 마주치는데, 그가 바로 고등학생 시절 교제했던 친구네 오빠, ‘진홍’이었던 것이다. 은미는 처음에는 진홍을 용서하고 교류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 또한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진홍의 진심 어린 미안한 마음과 미련을 알게 되면서 천천히 마음을 연다. 그렇게 은미와 진홍은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다.
문제는 ‘친아빠’인 진홍과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진희였다. 진홍과 진희를 둘 다 알고 있는 은미도, 은미와 진희를 새롭게 만나게 된 진홍도, 은미와는 가깝지만 진홍과는 먼 진희도, 모두 다른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결국 세 사람은 회피하려고 해봐도 갈등에 부딪치고 만다.
‘나는 내가 남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엄마에겐 남이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남남』 36화 다 읽은 책 中
진희는 남인데도 남일 수 없는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가, 우연히 책장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장의 수평이 맞도록 괴어놓은 책이 한 쪽만 숨이 죽어버린 탓이다. 숨이 죽은 쪽의 책은 진희의 책이었다. 진희는 자신이 좋아하던 책을 빼고, 높이에 맞는 다른 책으로 교체한다. 진희가 새로 골라 교체해둔 책은 엄마가 좋아하던 책이다.
그러면서 진희는 독립을 준비한다. 은미와 진홍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은미와 진홍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심술을 부리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떨어질 때가 되었다고 느껴서다. 이사 후 진희는 혼자만의 방에서 설레는 자취 첫날을 맞이하고, 은미는 혼자가 된 집에서 쓸쓸한 첫날을 맞이한다. 둘은 다른 집에 살기로 하면서 흐트러졌던 나와 타인의 경계를 새로 쓴다.
진희와 은미는 그렇게 수많은 남들과 엮이며 삶을 여행한다. 둘의 삶은 그전과 다를 수 없으면서도 절대 똑같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남이 아니지만 남인 사람들이 만들어준 삶의 일부가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고, 남이지만 남이 아닌 사람들이 넓혀주고 새로 해석하게 하는 삶의 일부가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이들을 따라 ‘이게 돼?’와 ‘왜 안 돼?’의 사이, 세상의 틈, ‘남남’의 경계를 질문하다 보면 어느새 같이 넓어지고 달라지는 삶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원정. “문학이 언제나 약자를 대변하길 바라는, 유니브페미 활동가.”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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