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움직이는 딸들

<여성과 오브젝트> 모빌: 연결의 감각으로 잡는 균형

김지승 | 기사입력 2021/10/02 [09:56]

서로를 움직이는 딸들

<여성과 오브젝트> 모빌: 연결의 감각으로 잡는 균형

김지승 | 입력 : 2021/10/02 [09:56]

<들어가는 말> 그동안 사물/객체/대상으로 인식되어온 여성과 오브젝트의 만남은 우연하고 필연적이다. 앞으로 연재할 글들은 여성과 오브젝트가 연결되고 욕망하고 합일하고 분열되어 결국 각각 아름답게 존재하게 되는, 세계가 잠시 오작동하는 순간들의 재구성이 될 것이다. 둘 사이에는 뚜렷하게 실감되는 슬픈 힘이 있다.

 

▲ 모빌: 연결의 감각으로 잡는 균형 (출처: 플리커)


여성과 오브젝트: 모빌(mobile)

 

친구가 아이를 낳았다. 한 몸이었다가 둘이 된 각각이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에 나는 막 창문을 열던 참이었다. “딸이야.”라는 말과 함께 순한 바람이 불었다. 딸이구나. 창밖 멀리 시선을 두는데 목이 잠겨왔다. 하늘이 맑았다. 한 생명의 세계가 시작되는 초침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다시 바람이 불었고, 나는 마음에 한참 못 미치는 축하와 감사를 반복했다.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던 말이 있었다.

 

“모빌을 달아주면 좋겠다. 내가 선물하게 해줘.”

갓 태어난 세계의 초침소리가 점점 커졌다.

 

한 세계가 점점 가까워질 때

 

출산을 앞두고 친구는 자주 공포에 짓눌려서 전화를 했다. 임신중독증으로 사망할 확률, 출산 과정에서 산모와 아이가 사망할 확률, 죽은 아이를 낳을 확률…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자료를 다 구하는 건지 매일 주제와 숫자가 달라졌다. ‘만약’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대부분은 친구의 겁에 질린 울음으로 끝이 났다. 출산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상태는 악화되었다. 자신과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라는 ‘만약’은 끈질기게 친구를 괴롭혔다. 하루는 그래도 아이를 살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가, 다음 날은 아이만 살려두고 자기가 어떻게 죽을 수 있겠냐고 했다가 오락가락했다.

 

나는 결혼이나 출산, 육아와는 한참 동떨어진 세계의 일원이었으므로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 친구의 불안과 공포를 다 헤아리긴 어려웠다. 다만 ‘혼자’라는 상황과 감정에는 오래 익숙했으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면 좋겠다”를 주문처럼 반복하며 친구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너도 아이도 건강하면 좋겠다, 혼자라는 것이 더 많은 기회가 되면 좋겠다, 출산이 덜 힘들면 좋겠다, 네 호르몬이 그만 좀 진정하면 좋겠다, 아이에게 엄마가 마음에 들면 좋겠다, 세계가 아이에게는 덜 가혹하면 좋겠다… 이 주문이자 기도는 매일 달라졌는데 의도치 않게 친구의 불안이 구체적으로 언어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친구는 내 주문에 “내가 그게 두려웠나 봐.”라고 반응하더니 어느 날부터 내 주문을 후렴구처럼 따라했다. 가끔 변형도 했다.

 

“딸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살아가면 좋겠다.”

“응. 딸이면 우리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그럼 좋겠다.”

 

유독 간절해지는 주문 앞에서는 둘 다 먹먹해져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유는 멀었지만 한 세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정일을 2주 정도 남겨놓고는 친구의 불안이, 정확히는 조급함이 내게 건너왔다. 어쩐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세상을 살만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당황스럽게 진지해졌다. 괜히 길가의 쓰레기를 줍고, 집에서 쓰는 그릇을 들고 가서 음식 포장을 해오고, 더 기부할 곳을 찾으면서 다시 한 번 내가 결혼이나 출산, 육아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일원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이 세상에 대해 조금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런 마음으로 내내 살아야 하다니, 아이고.

 

친구와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선물

 

출산 당일까지 이어진 친구와 아이를 위한 주문은 마침내 “모빌을 달아주면 좋겠다”로 한 매듭을 지었다. 왜 하필 모빌인가 하면, 하필 모빌이어야 했다. 모빌의 탄생부터 다양한 형태로의 발전 과정에서 연결할 수 있는 의미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고 그 이야기를 앞으로 조금 하게 될 테지만, 그래도 맨 앞에는 친구와 내가 평생에 걸쳐 한 번도 모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공통점을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게는 없었으므로 네게는 있어라, 하는 마음.

 

지금껏 친구와 나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모빌을 딸의 삶에는 거의 처음부터 있게 하고 싶다는 바람은 사실 간단히 설명되진 않았다. 우리 삶에는 존재하지 않아서 선택할 자유도 없었던 것들에 대한 회한일 수도 있었지만 거듭되는 회한으로 끝내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모빌은 많은 것들 중 하나였고, 아이는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무언가가 좋은지 싫은지 자신과 맞는지 아닌지 감각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삶에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자유의 조건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선택할 자유도 앉을 자리가 없다.

 

감각하고 선택하고 관계 맺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을 구성해주고 싶은 그 마음이 매만지는 건 친구의 삶이기도 했다. 내가 아이의 머리 위에 모빌을 달아주면 친구의 삶 안에도 모빌이 달리는 거였다. 그것을 가져본 적 없는 이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사물이 있는데, 모빌이 그러길 바라면서 나는 아이와 친구, 그리고 모빌을 함께 떠올렸다. 내 머릿속이 다 보인다는 듯 친구가 말했다.

 

“네 모빌은 내가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나는 딴소리를 했다.

“우리의 ‘좋겠다’ 한참 전에 알렉산더 칼더의 ‘좋겠다’가 있었어.”

“또 말 돌린다. 그 이야기는 조리원 나가서 들을래. 얼굴 보고 해줘.”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했으니 준비를 해야 했다. 충분한 사실 정보를 수집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었다. 사실만으로는 그러니까 시치미, 침묵, 거짓말과 과잉 없이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문제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빌을 어떻게 시치미, 침묵, 거짓말과 과잉 안에 고정시켜 담을 것인가였다. 우선 시치미 뚝 떼고 입 싹 닫고 모르는 척 거짓말을 시도해보기로 하자. 어차피 이 글은 출산 소식으로 시작되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움직이는 조각, 칼더의 모빌

 

“몬드리안의 점과 선, 면들이 모두 움직이면 좋겠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알렉산더 칼더는 몬드리안의 아틀리에를 우연히 방문한다. 정체된 미국 예술계에 싫증을 느낀 그의 눈에 몬드리안의 작품들은 추상미술의 매력을 선선히 드러냈다. 그즈음 대각선을 그림에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갈등으로 소속되었던 그룹과 멀어진 몬드리안도 먼 대륙에서 온 새 친구의 경이에 찬 눈빛에서 얼핏 자기 미래를 본다. 손님은 으레 오래 묵은 공기에 새 공기를 뒤섞으며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하는 존재이니까.

 

칼더는 수직선, 수평선, 원색, 무채색만으로 엄격하게 제한한 몬드리안의 추상 공간에 시간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시간 축이 있다.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이 스스로 움직이는 상상을 하면서, 시간 속 추상의 흐름이 얼마나 재미있을지를 칼더가 잔뜩 흥분해서 묻자 몬드리안은 덤덤하게 대꾸한다.

 

“내 그림들은 이미 충분히 빨라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건지, 미국인 친구의 호들갑이 언짢았던 건지, 괜한 일을 벌이지 말라는 경고성 대꾸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멋진 말이다. 칼더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다만, 이미 충분히 빠른 몬드리안의 그림에 진짜 ‘움직임’을 부여하고 싶은 욕심을 철회할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정도로 칼더를 강력하게 옭아맨 “움직이면 좋겠다”로부터 새로운 오브젝트, 모빌이 탄생한다.

 

모빌은 움직임이다. 처음에는 점, 선, 면을 철사로 잇고 모터를 달아 가능해진 움직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롭고 획기적이었다. 움직이는 조각이라니. 1932년, 이 놀라운 조각을 본 뒤샹은 ‘모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기 변기는 분수라고 부른 이의 작명치고는 굉장히 평범해서 두 사람이 별로 안 친했나보다 추측한다. 이후 모터나 전기장치 없이 창가에 걸어두는 것만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오브제의 이름이 된 모빌은 탄생부터 명명까지 몬드리안, 칼더, 뒤샹의 우연한 이동과 만남을 의미 있게 했다. 모빌이 모빌 한 것처럼.

 

초기 칼더의 모빌은 천장에 매달거나 벽에 걸거나 고정물에 연결한 오브제 등으로 다양했다. 한 전시에서 1943년 작품인 ‘별자리’를 보고 나는 비슷한 모빌을 오래 찾아다녔다. 세계대전 당시에는 금속재료가 부족해 나무를 이용하는 변화를 겪는데, ‘별자리’도 채색된 일곱 개의 나무 조각들이 북극성 같은 균형점을 중심으로 금속 막대에 매달려 있었다. 얼핏 단순한 구조로 보였으나 그렇지가 않았다. 칼더의 전성기로 꼽히는 40년대 모빌 작업은 균형을 잡는 단순한 기능에 그치지 않고 낙관적인 역동성을 구현했다. 나무나 청동 등의 새로운 재료가 실험성을 더 부가했을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그리고 그의 딸에게 선물하고 싶은 건 그와 비슷한 모빌이었다. ‘별자리’는 약한 바람, 천천한 기류, 어쩌면 세계의 희미한 징후만으로도 움직일 것 같았다. 나는 어떤 위험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조각을 아이 곁에 둠으로써 아이의 불안을 희석시키고 싶은 것일까, 잠깐 생각했다.

 

대상관계이론 전문가 도널드 위니캇은 갓 태어난 아이가 휩싸이는, 우리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불안감’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중 하나가 자기가 조각조각 나뉘는 불안이고, 영원히 추락할 것 같은 불안과 자기 몸과 영영 관계 맺지 못할 것 같은 불안, 방향을 잃는 불안까지 하나씩 꼽을 때마다 친구와 나는 그 불안들이 모두 현재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 늘 깜짝 놀라곤 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자기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가장 약자의 상태이다. 그들의 불안이 제도 밖의 존재인 친구와 나의 불안과 닮아 있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다는 몰라도, 위니캇이 명명한 것처럼 상상하기 힘들지는 않았다. 모빌은 그 모든 불안을 닮아 있었다. 중요한 건 불안 뒤의 균형과도 그렇다는 점이었다. 모빌은 움직임이자 멈추지 않는 균형의 시도였다.

 

아이가 처음 만나는 우주

 

딱 한 번 모빌을 가질 뻔한 적이 있다. 이십 대였을 테고, 선물을 받기 직전에 작은 자취방에 걸어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선물을 골랐다. 모빌이 외부의 마찰로 움직이고 다시 균형을 잡는 것을 반복하려면, 그리고 그게 아름다우려면 가능한 큰 창과 햇살과 바람이 있어야 했다. 모빌의 그림자가 놓일 하얀 벽은 아름다움과 관련해서는 더 중요했다. 내게는 그런 공간이 없었다.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이 그랬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이 세계에 그 새 존재를 위한 시공간이 예비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게 남은 “좋겠다”를 다 써서 그게 가능해진다면 나는 전생이나 후생의 “좋겠다”까지 다 가져올 의향이 있다. 누구는 자기 몸만큼의 시공간을, 누군가는 그 몇 백 배의 시공간을 얻는다. 공평하지 않다. 내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없이도 꽉 찬 세상에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마련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친구의 딸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그 아이에게는 모빌을 달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되어 있다. 햇살과 바람이 닿을 창이 달린 조그마한 방. 그 방에 달릴 모빌은 아이가 처음 보는 우주가 될 터였다. 조각들이 서로를 의지해 균형을 잡고 외부의 파동에 유연하게 움직이는 원리를 감각하면서, 아이는 다른 여자아이를 만나는 순간 그 감각을 기억해낼 것이다.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 못된 말과 시선들이 흔들어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지. 이쪽에서 기울면 저쪽에서 솟아나는 춤을 추듯 살았으면 좋겠다. 딸이라서 자랄수록 더 많은 “좋겠다”의 주문이 필요할 거라고 지금은 조금 아껴두자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고 일주일,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대뜸 그랬다.

 

“얘, 나랑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아.”

“너도 딸이고, 네 딸도 딸이잖아. 지금은 아니어도 닮을 거야.”

“아, 그러네. 우린 다 딸이구나.”

 

모든 여자는 딸이다. 딸들의 삶이 때로 모빌처럼 흔들리고 아름답게 그늘지는 걸 본다. 서류상으로는 혼자 아이를 키울 친구 옆에 나와 또 다른 딸들이 있다. 서류 밖에서 친구를 대신할 몸이 될 준비를 하면서 현재 아이 이름 짓기에 골몰하고 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우리 중 가장 작은 딸을 위한 모빌을 주문했다.

 

[필자 소개] 김지승. 작가. 비영리단체 매체 기획자.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노인 서사에 관심을 두고 개인 연구와 여성/노인 대상 예술 수업을 진행 중이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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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동이 2021/10/12 [14:59] 수정 | 삭제
  • 너무 재밌게 읽어서 댓글 남깁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주셨을 것 같아요
  • 반가워라 2021/10/04 [17:10] 수정 | 삭제
  • 모빌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의 실체가 이런 거였구나!
  • 묘정 2021/10/03 [00:11] 수정 | 삭제
  • 의자 글도 너무 좋았는데 모빌 글은 더 좋네요. 이렇게 짱짱한데 바람이 충분히 드나드는 서늘한 글이라니! 오래오래 연재해주세요!!
  • Green 2021/10/02 [23:22] 수정 | 삭제
  • 글이 넘 재밌어요
  • 안개 2021/10/02 [22:55] 수정 | 삭제
  • 내게는 없었으므로 네게는 있어라 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갑니다. 작가님께 모빌을 선물하고 싶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푸른글 2021/10/02 [16:51] 수정 | 삭제
  • 나도 모빌을 가지고 싶어했는데 끝내 갖지 못한 이유를 알겠네요. 공간이 없어서... 정말 모빌을 선물하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 미레 2021/10/02 [13:59] 수정 | 삭제
  • 이야기에 쏙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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