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네이버 웹툰 <마녀의 심판은 꽃이 된다>와 드라마 <구경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트위터 타임라인과 텔레그램 뉴스 채널에 떠 있는 뉴스 기사를 쭉 훑는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여성 살해 뉴스에 앓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대선 후보들이 특기 ‘기자들 앞에서 헛소리하기’를 보여준다. 한 10분 그러고 있으면 기분이 끝장나게 더러워져서, 얼른 일어나 오늘 하루도 120% 페미로 살아보자 하는 이상한 추진력을 얻는다.
친구들과 가끔 하는 농담이 있다. 너를 짜증나게 하는 지인 한 명과 불법촬영 사이트 운영자 한 명 중에 한 쪽만 없앨 수 있다면 어디로 할래? 가볍게 던진 얘기에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한다. ‘지인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운영자를 없애자.’ ‘아냐, 운영자 걔 하나 없어진다고 달라지겠냐? 차라리 아는 사람을 없애고 편하게 살지.’ 당연히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살인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지만 여성으로, 혹은 페미니스트로 살다 보면 가슴 속에 데스노트 하나씩은 끼고 살기 마련이다.
그러던 내 앞에 마녀가 등장한다. ‘악인’만 골라서 없애는 마녀인 데다가, 왠지 죽이는 방법도 특이하다. 너를 괴롭게 하는 사람을 모두 죽여주겠다며 웃는 마녀 앞에서 나는 과연 놀라서 고개를 가로저을까, 악당 같은 얼굴로 한 번 가 보자고 손을 잡을까?
‘수선화’는 아주 어릴 때 엄마를 잃고 얼마 후에 아빠의 죽음까지 맞이하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죽은 아빠의 시체와 함께 며칠을 방치되고 난 후에 선화는 악한 사람에게서 악취를 맡는 반갑지 않은 능력을 가지게 된다. 돌봐줄 사람 없이 장례식장에서 눈물만 흘리던 선화에게 고모는 같이 살자며 손을 내밀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악취가 나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고모와 함께 살게 된 선화는 고모가 아빠의 사망보험금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지속적으로 고모와 그의 아들 ‘정규환’으로부터 학대를 당한다. 규환은 학교에서까지 선화를 괴롭히고 무리를 지어 선화를 왕따시킨다. 머리까지 좋은 선화 덕분에 만년 2등을 하는 규환은 성적 발표가 있는 날에는 집에서 선화에게 화풀이를 하며 폭력을 일삼는 악한 사람이다. 심지어 대학에 입학해 이 집에서 탈출하는 게 유일한 꿈인 선화에게, 규환은 학교장 추천서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협박까지 한다. 고모며 규환이며 악취밖에 없는 집에서 이를 갈며 버티던 선화 앞에 튼튼한 동아줄 하나가 내려온다.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를 풍기는 ‘아줌마’다.
악취는 없고 향기뿐이라니, 이 사람은 악한 면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뜻인가? 규환에게 살해 협박을 받고 도망쳐 나온 골목에서 선화는 아줌마가 그녀의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편이 유리병을 깨 아줌마를 해하려는 순간, 선화는 옆에 있던 벽돌(원래는 정규환이 오면 쓰려고 들고 있었던)을 번쩍 들고 그의 머리통을 내려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죽지 않고 선화에게 달려들었고, 아줌마는 ‘아직 죽일 생각은 없었다’면서 남편을 한 송이의 꽃으로 만들어버린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얼어있는 선화에게 아줌마는 ‘보답을 하나 해볼까 싶다’면서 ‘죽이고 싶은 사람 있니?’하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고 사라진다.
선화가 또다시 학교에서 따돌림과 폭력의 피해자가 된 순간에, 가해자들을 싹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아줌마는 우아한 모습으로 선화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날 보았던 것처럼 선화를 괴롭히던 고모를 한 송이의 꽃으로 만들어버린다. 아줌마는 선화에게 ‘악한 인간일수록 아름다운 꽃이 된다’는 자신만의, 그러니까 마녀만의 원리이자 비밀을 알려준다. 앞으로 아줌마와 선화가 악한 놈들을 다 꽃으로 만들어서 아시아 최대의 화원을 지을 것인지 아닌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제목 『마녀의 심판은 꽃이 된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아줌마는 ‘심판’을 하는 ‘마녀’일 것이다. 아줌마가 심판하는 ‘악인’은 참 다양한데, 가정폭력 가해자인 남편, 성구매 남성, 살인 미제 사건의 범인, 인신매매를 일삼던 마약 사범을 포함해 지금까지 꽤나 많은 ‘악인’을 꽃으로 만들어 심판하셨다.
주인공 선화도 ‘악인’ 얘기 하면 빠지기 어렵다. 선화는 더욱 악한 사람에게서 더욱 심한 악취를 맡는다. 아마도 이때까지 선화가 맡아본 악취 중에 가장 심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은 같은 반의 ‘이나’일 것이다. 이나는 규환이의 여자친구인데, 어느 새부터 규환을 대신해 선화를 괴롭히는 주동자가 된다. 이나는 학교 이사장 딸이라는 꽤나 올드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또 동급생 괴롭히고 처벌 안 받기에는 딱 좋은 위치인 것 같다. 그래서 이나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화를, 그리고 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해서 선화의 편을 들어주는 아줌마를 괴롭힌다.
만화에 등장하는 주요한 세 여성은 각각 심판자(아줌마), 가해자(이나), 피해자(선화)의 자리에 앉아있다. 끝도 없이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서로 다른 여성 캐릭터들이 작중에서 갈등만 일으켜도 재밌는데, 이 작품은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마녀의 심판은 꽃이 된다』 첫 화 댓글을 보면 가정폭력 가해자인 남편을 꽃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줌마에게 ‘멋있다’, ‘사랑한다’는 반응부터 시작해 ‘(죽이고 싶은 사람) 엄청 많다’, ‘일단 쟤(규환)부터 죽여주세요’ 하는 섬뜩한 내용이 가득하다. 아줌마가 아무나 죽이고 보는 살인마가 아니라 ‘악한 사람’만 찾아서 죽이되, 구질구질하게 총이나 칼을 쓰지 않고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바꿔버리는 멋진 방식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얼핏 보면 나쁜 놈을 벌해서 ‘정의구현’하는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줌마는 조금 다르다. 아줌마는 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줌마는 마녀다.
아줌마는 JTBC 드라마 <구경이>(성초이 극본, 이정흠 연출)의 K를 떠오르게 한다. K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인상이 찌푸려지고 속이 메스껍지만, K가 죽인 사람을 쭉 훑어보면 왠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K는 불법촬영물 유포범, 불법촬영물 공유 사이트 운영자, 성구매자 남성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였고, 그들의 피해자가 용의자가 되지 않도록 모두 수를 써둔다. 그래서 <구경이>를 보다 보면 경찰인 구경이가 K를 잡기를 바라면서도 K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넘쳐흐르는 여성 살해 뉴스를 보다 보면 가끔 ‘귀신은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뭐하나’하고 한숨을 쉬곤 한다. K와 아줌마는 ‘저런 놈’들을 각자의 방법으로 없애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결국 K와 아줌마의 살인 혹은 심판에서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질문은 이 쾌감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왜 아줌마의 살인을 응원할까? 아줌마의 살인을 응원하는 것은 악한 일일까?
아줌마와 K의 전적을 떠올려보자. K도, 아줌마도 여성 캐릭터라 그런지 유독 특정 종류의 범죄 가해자들을 자주 타겟으로 삼는다. 배우자폭력, 불법촬영, 성희롱 사건에서 80~90%의 피해자는 여성이다. 가정폭력범인 남편에게 맞거나 쫓기는 아줌마의 모습에서 여성 독자는 실제로 가정폭력 피해 경험 유무와 상관없이 아줌마에게 공감한다. 한 남성이 아줌마를 허락 없이 만지며 데려가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삶에 흔하디흔한 폭력이 묘사되는 순간 여성 독자는 아줌마에 이입한다. 여기서 아줌마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는 할 수 없는 아주 사적인 방법으로 폭력의 가해자들을 심판하고 엄벌한다.
수상한 아줌마의 모습에 망설이던 선화도 곧 아줌마의 심판을 원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선화는 이나가 자신에게 약을 탄 음료수를 준 것을 눈치 채고 아줌마에게 자신이 곧 음료수를 마시고 쓰러질 테니 경찰에 신고해달라는 문자를 보낸다. 하지만 이나와 가해자 일당은 경찰서에서 쉽게 빠져나오고 ‘장난이 심했지? 미안~’이라며 선화의 화를 돋운다. 법이라면 악인을 제대로 심판하리라는 선화의 믿음이 무너지면서 선화는 아줌마에게 더욱 의지한다. 이 장면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학교 폭력을 비롯한 수많은 사건에서 공권력은 실망스러운 대응만을 보여준다.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에서 성착취물 4,758개를 다운받은 가해자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여자친구를 감금하고 강간하며 4개월 동안 위협한 가해자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떨어졌다. 특히, 폭력의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에 사법부는 제대로 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
데이트폭력 가해자 신상공개 기사에 달린 ‘매일 비슷한 일이 일어나서 이제 이 사람이 어떤 사건의 가해자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댓글에 수백 명이 공감한다. 심판을 내리는 사람도, 심판의 기준도, 그 사람과 기준을 정하는 사람도 모두가 공범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 우리는 마녀를 찾게 된다. 악인을 꽃으로 바꾸는 마녀의 마법에 박수를 치는 선화를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최근 N번방 방지법에 대한 쓸 데 없는 말이 늘었다. 대선이 다가오니 정치 인사들이 어떻게든 지지층을 만들려고 애를 쓰다가 이제는 디지털 성폭력 가해자들의 표심까지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다. 여전히 너무 많은 여성들이 안타깝게 죽어가는 현실 속에서 왜 권력은 제대로 된 심판을 할 능력을 스스로 잃어가고 있을까. 픽션보다 더 픽션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아줌마나 K같은 캐릭터에 환호하는 이유를 힘 있는 자들은 왜 모를까.
개인적으로 마녀라는 말을 좋아한다. 2019년 3·8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학 페미니스트 동료들과 <마녀행진>을 기획했다. 2020년에는 ‘N번방에 분노한다는 이유로 마녀가 된다면, 나는 이미 마녀다’라고 적힌 SNS 프로필 사진 프레임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올해 여성의 날에는 <범우주마녀OT>라는 이름으로 대학 신입생 페미니스트들과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과도한 공격을 받는 현실도 반영할 겸, 그렇다고 그 공격이 나에게 별 타격감을 주지 않는다는 느낌도 줄 겸, 나와 페미니스트 동료들을 ‘마녀’라고 불러보았다.
마녀들은 사법부의 한심한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고, 언론의 엉망진창 보도 행태에 분노를 표출했고, 날치기 입법만 하는 국회 앞에서 깃발을 들었다. 마녀들은 제대로 된 심판을 하라는 요구를 쉬지 않고 해 왔다. 어쨌든 우리는 계속 살아 나가야 하기 때문에 나는 동료 마녀들이 다 사람 죽이는 킬러 마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진짜 ‘과도한’ 무언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씩이라도 변화가 필요하다.
어쨌든 아줌마를 히어로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아줌마가 악한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꽃을 향한 자신의 욕망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선화에게 ‘걔네들은 얼마나 악한데?’라고 물으며 무섭게 눈을 번뜩이거나 타겟이 더욱 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악함’이라는 키워드는 작품의 전개 내내 보는 이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든다. 결국 악한 자만 죽이는 아줌마, 악한 자에게서 악취를 맡는 선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일단 악함이 무엇인지, 누가 더 악한지를 따질 수 있을지 모호한 질문들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아줌마의 심판이 또 누구를 향할지, 선화는 그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울지, 선화는 스스로의 악취를 맡을 수 있는지, 앞으로 이 작품에서 ‘악’과 ‘심판’에 대해 펼쳐나갈 이야기를 기대한다. 특히 우리의 마녀는 또 어떤 새로운 질문을 던질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오늘도 온건한 마녀들은 거리에서 피켓을 든다.
[필자 소개] 윤김진서, 유니브페미 활동가, 과몰입이 특기인 오타쿠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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