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보이는 금쪽이인가요?

[극장 앞에서 만나] 셀린 시아마 감독 영화 <톰보이>

신승은 | 기사입력 2022/05/05 [12:46]

톰보이는 금쪽이인가요?

[극장 앞에서 만나] 셀린 시아마 감독 영화 <톰보이>

신승은 | 입력 : 2022/05/05 [12:46]

지난 3월 11일 채널A에서 방영된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는 치마를 입기 좋아하는 지정성별 남성 아동이 나왔다. 오은영 박사님은 아빠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남성성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유추했다. 그러면서 엄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딸들은 톰보이가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방송이 나간 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다. 지극히 프로이드적인 해석이었고, 프로이드의 이론은 여성혐오적, 성별이분법적, 결정론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으므로 현세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아빠와 관계가 안 좋으면 화장하기 좋아하고 치마 입기 좋아하는 남아가 될 수 있고, 역으로 엄마와 관계가 안 좋으면 톰보이가 되는 것일까?

 

▲ 셀린 시아마 연출 영화 <톰보이> 포스터, 2011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톰보이>(Tomboy, 2011)에는 톰보이가 등장한다. 주인공 로레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며 ‘미카엘’이라는 이름으로 남자아이인 척을 한다. ‘로레’와 ‘미카엘’ 중 그가 진정 무엇으로 불리길 원하는지 영화를 끝까지 보아도 단정지을 수 없기에 이하 톰보이로 칭하겠다.

 

<톰보이> 속 카메라는 인물들을 핸드헬드(handheld)로 끈질기게 따라간다. 오래도록 톰보이의 뒷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역할들의 얼굴 또한 화면을 가득 채우게 잡는다.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은 인물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묘한 감정까지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톰보이는 계속해서 미묘하고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관객 또한 여기서 멀찍이 바라볼 수만은 없다.

 

톰보이는 오은영 박사님의 말과는 반대로 엄마와 사이가 아주 좋다. 임신한 엄마를 대신해 동생과 놀아줄 줄 아는 든든한 존재다. 톰보이가 ‘미카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엄마는 톰보이를 크게 혼내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평화롭다. 과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 엄마와의 관계가 안 좋아서 톰보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톰보이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엄마와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선후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성별이분법적인 세상에서 톰보이의 무표정을 응시하는 카메라

 

카메라는 톰보이의 무표정을 끊임없이 응시한다. 카메라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에게 선함과 웃음이 강요되어왔다. 미디어 속에서도 그러했다. 아이들은 해맑은 존재로, 고민 없는 존재로 그려졌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고민은 무거웠고, 존재는 해맑지 않았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속 톰보이도 그렇다. 시시각각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 그대로 비춰진다. 성별이분법적인 세상 속에서 톰보이는 어떻게 ‘미카엘’을 유지해야 할지 매순간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영화 속에서는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아빠와 카드놀이하는 장면, 축구하는 장면, 수영하는 장면, 동생과 인물 맞히기 놀이하는 장면 등. 이 모든 놀이는 성별이분법적이다. 아빠와 함께하는 카드놀이는 가족을 맞추는 게임인데 여기서는 딸, 아들,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뿐 그 사이와 밖은 존재하지 않는다. 축구하는 장면 또한 남자아이들만 참여하며, 남자아이들은 웃통을 벗고 남성성을 과시한다. 수영하는 장면에서는 수영복이 문제다. 여자 수영복은 가슴을 가리게 위까지 올라와 있으며, 남자아이들의 수영복은 팬티뿐이다. 동생과 인물 맞히기 놀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성별에 관한 질문이다. 여자인가요? ‘아니오’가 나올 시 바로 남자인가요? 질문이 뒤따른다.

 

‘미카엘’을 유지하고 싶은 ‘로레’는 이 이분법적인 세상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웃통을 벗은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지 않은지 남몰래 거울을 보고, 여성 수영복을 자르기도 한다. 자른 수영복을 입어보니 뭔가 또 다른 의심이 다가올 것 같다. 톰보이는 찰흙으로 음경 모양을 만들어 수영복 속에 넣기로 한다.

 

▲ 영화 <톰보이> 중 수영복을 입고 있는 미카엘/로레와 리사

 

매 순간 갈등하고 판단해야 하는 톰보이의 얼굴은 무표정일 수밖에 없다. 마음껏 당황할 수도 없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들통난 뒤에 톰보이는 엄마에게 혼이 나고 나서야 엉엉 운다. 종횡무진 톰보이를 졸졸 쫓아다니던 카메라는 그제서야 ‘달리 아웃’(dolly out)으로 아이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방안에 있는 아이에게서 멀어지자 아이가 집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 틀에 갇혀서 우는 톰보이의 눈물은 그를 문제아, ‘금쪽이’로 단정 짓는 사회 탓이다. 카메라는 평화를 되찾았지만 미카엘의 세계는 무너졌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평화일까. 한 아이의 세계를 무너뜨려 유지하는 세상의 균형이 참된 균형일까.

 

아이들에게도 들통이 나고 톰보이는 수난을 겪는다. 톰보이는 숲속에서 홀로 운다. 카메라는 이를 롱 샷으로 멀리 비춘다. 더 이상 카메라는 다가가기를 멈추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톰보이는 큰 숲속에서 아주 작아 보인다. 그래도 그의 슬픔은 크게 다가온다. 카메라가 더 다가갔다면 톰보이의 비참함만 부각시켰을 것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롱 샷을 택함으로써 톰보이가 홀로 마음껏 울 수 있게 지켜주었다.

 

톰보이의 정체성을 해석하는 최소 세 가지의 갈래

 

<톰보이> 속 톰보이의 정체성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의 갈래가 필요하다. 첫 번째로 <톰보이>는 트랜스 남성 아동의 서사라는 것이다. 톰보이는 ‘바디 디스포리아’(body dysphoria)를 겪으며 여성을 상징하는 치마를 극도로 거부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톰보이가 좋아했지만 톰보이가 지정성별 여성인 것을 알고 떠났던 리사가 다시 집 앞으로 돌아온다. 톰보이에게 이름을 묻는다. 톰보이는 대답한다. “내 이름은 로레야.” 그리고 마침내 톰보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갈 때쯤 영화는 끝이 난다.

 

이는 트랜스 남성의 서사로 해석했을 때 남자 이름, 여자 이름을 떠나 그냥 자신의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한 톰보이의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 혹은 적당히 세상을 속이며 살아가야 하는 트랜스젠더들의 고충을 보여준 장면일 수 있다.

 

두 번째로 <톰보이>는 논바이너리(non-binary)의 서사로 읽힐 수 있다. 남성 여성 이분법적인 세상을 탈피하고자 하는 톰보이의 투쟁일 수 있다. 톰보이는 어느 순간에는 ‘미카엘’일 수도 다른 순간에는 ‘로레’일 수도 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세상은 남성, 혹은 여성이길 원한다. 자신의 성별 정체성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톰보이>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타이틀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파란색과 빨간색이 번갈아 스펠링을 메우는 폰트가 등장한다. 논바이너리 아동의 서사로 읽혔을 때, 소위 남성다운 취미를 가지고 여자아이를 사랑하는 톰보이는 ‘미카엘’이 되는 법 밖에는 사회에서 남는 도리를 몰랐을 것이다. 톰보이의 엄마도 후반부 아이에게 묻는다. “어떡하면 좋겠니. 나는 방법을 모르겠다”라고.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방법을 없앤 것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톰보이>는 레즈비언 아동의 서사로 해석될 수 있다. 다양한 ‘여성성’을 체득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은 톰보이가 자신의 취미와 성적 지향을 여성(지정성별)인 채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톰보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남성인 척하며 정상성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엔딩에서 자신의 이름을 로레라고 하는 것을 여성이지만 축구도 좋아하고, 여성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톰보이 서사를 해석하는 한 가지의 갈래일 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그 이후 레즈비언 영화들을 찍었다고 해서,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톰보이>를 레즈비언 영화로 정체화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톰보이는 톰보이다. 언급한 세 가지의 갈래 말고도 무수히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퀴어한 아동을 바라보는 자세여야 한다.

 

▲ 영화 <톰보이> 중 동생 잔이 미카엘/로레의 머리를 자르는 모습


퀴어한 아동은 존재한다. 퀴어 퍼레이드를 두고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냐’는 일각의 글을 볼 때마다 수많은 퀴어 아동을 생각한다. 그리고 수많은 시스젠더 이성애 미디어들을 생각하며 ‘퀴어 아동 보기 부끄럽지 않냐’고 되묻고 싶다. 이은경 감독의 단편영화 <셔틀런>(2017)에서도 퀴어 아동이 나온다. 체육 선생님을 사랑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더 많은 미디어에서 퀴어 아동을 보고 싶다. 퀴어 아동들이 자신들의 퀴어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straight은 아니지만 right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톰보이는 아빠에게 운전을 배운다. “직진으로 가요?” 톰보이의 질문에 아빠는 오른쪽으로 가라고 대답한다. 영어로 직진은 ‘Go Straight’(고 스트레잇)이다. Straight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오른쪽은 Right로 ‘옳다’, ‘권리’의 뜻을 가지기도 한다. 톰보이는 지정성별 여성에게 기대되는 Straight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톰보이는 우회전을 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Turn Right한 그 삶 그대로 Right, 옳으며, 권리를 가져야 한다.

 

‘금쪽같은 내 새끼’의 결론이 대체로 그러하듯 문제 아동으로 보이는 금쪽이들은 잘못이 없다. 부모가, 사회가 잘못이다. 톰보이를 포함한 성별이분법을 벗어난 아동들 모두 그러하다. 그들은 문제아동이 아니며 편협한 사회가 문제사회다.

 

▲ 영화 <톰보이> 중 미카엘/로레와 엄마가 마주보고 웃고 있다

 

톰보이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성애자 여성, 논바이너리, 남성, 레즈비언 등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영화 속에는 음악이 딱 한 번 등장한다. 톰보이가 좋아하는 리사의 집에 놀러갔을 때 같이 춤을 추며 듣는 음악이다. 영어 가사의 의미로 “영원히 사랑해”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 리사가 다시 돌아왔을 때, 톰보이는 자신의 이름을 답하고는 입꼬리를 올린다. 순간 화면이 느려지면서 영화는 끝이 나고 음악이 나온다. 리사와 함께 들었던 그 음악이다. “영원히 사랑해” 가사가 울려 퍼진다. 이는 리사에 대한 톰보이의 마음일 수도 있지만 퀴어 아동의 미래에 대한 감독의 응원으로도 느껴진다. 네가 무엇이 되던 사랑한다고, 영원히 너의 미래를 응원한다고. 아동들에게는 그런 사회와 부모가 필요하다. 음악은 감독이 크레딧의 글자 뒤에 숨어서 흔드는 응원봉일 수 있다. 나 역시 감독이 내민 응원봉을 잡는다. 그리고 흔든다. “I love you, always.”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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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yGirl 2022/05/09 [21:32] 수정 | 삭제
  • 셀린 시아마 감독이 그린 톰보이.. 꼭 보고 싶다
  • 2022/05/07 [13:18] 수정 | 삭제
  • 모든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 공감 2022/05/06 [12:45] 수정 | 삭제
  • 치마 입기 싫어해서 절대 안 입은 여자 아이였던 나도 금쪽이? 걍 냅두면 알아서 자기한테 맞는 스타일 찾아갑니다. 여자애니까 남자애니까 그런 소리 들으면 너무 스트레스 받고 자신감 떨어지고 정신건강에 해로움. 그리고 웃긴 게 아빠와 사이가 안 좋아서 애가 커서 이성애자가 되었다, 이런 걸 가설로 세우면 얼마든지 끼워맞출 사례들이 많을 걸요.
  • 보리 2022/05/05 [17:14] 수정 | 삭제
  • 저도 그 프로 보고서 좀 씁쓸했어요. 금쪽이 시리즈 다 잘보고 있었는데... 조금은 실망스럽더라고요. 이렇게 잘 짚어준 글을 보니까 가슴이 뚫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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