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고로 접속한 용산 기지생태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의 정여름 감독을 만나다

심아정 | 기사입력 2022/05/21 [12:52]

포켓몬고로 접속한 용산 기지생태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의 정여름 감독을 만나다

심아정 | 입력 : 2022/05/21 [12:52]

미군들에게서 빌려온 수많은 눈들

 

정여름 감독은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고’를 하다가, 미군기지 내 ‘체육관’과 ‘포켓스톱’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미지들을 단서로 미군기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체육관’(PokeGym)은 게이머가 포켓몬을 이용해 대결을 벌이는 장소인데, 게임을 하면서 찍은 주변 사진들을 포켓몬고 측에 보내어 등록하는 과정을 거친다. ‘포켓스톱’(Pokestop)은 포켓몬을 잡는데 필요한 아이템 보급소를 말한다.

 

포겟몬고를 하면서 미군기지 내의 여러 장소와 기념물을 등록하는 미군들의 시선을 빌려옴으로써, 이제껏 군사기밀과 안보상의 이유로 지도에 표시될 수 없었던 용산 미군기지 안을 들여다보는 기획이라니! ‘신박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정여름 감독 영화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33분,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스틸컷

 

영화의 제목인 ‘그라이아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눈 하나와 이빨 하나를 함께 사용하는 데니오, 엔뉘오, 펨프레도라는 이름을 가진 백발의 세 자매 괴물로, 각각의 이름은 ‘무서운’, ‘전쟁을 좋아하는’, ‘깜짝 놀라게 하는’이라는 뜻을 갖는다. 하나의 눈과 세 개의 시선은 정여름의 영화에서 미군들에게 빌려온 수많은 눈들로 확장된다. 공식 기록영상부터 미군들이 올린 유튜브, 브이로그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복안(複眼)을 장착하고, 이제껏 없던 방식으로 미군기지를 가시화하는 방식이다.

 

사실 용산은 100여 년 동안 기지로 사용되어온 내력을 가진 곳이다. 1910년에 작성된 아래 지도는 용산기지의 초기 시설과 도로 현황을 보여주는 자료다. 일본군은 조선에서의 영구 주둔을 위해 용산, 평양, 의주 세 곳을 군용지로 확정하고, 1904년 8월 15일에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거해 용산 300만평 등 총 975만평의 토지 수용을 조선정부에 통고했다. 군사기지 공사는 190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13년 11월에 완공되었다.

 

▲ 1910년 경성시가전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편, 『이태원; 공간과 삶』 2010년, 32쪽)

 

불꽃놀이와 기지생태계

 

미군기지를 재현한 기존의 많은 작업들은 ‘기지촌 여성’의 삶에 주목하는 일종의 전형성을 지닌다. <그라이아이>는 이러한 전형성에 ‘삑사리’를 내는 새로운 시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미군기지 안 미군들의 일상을 그들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미군과의 관계를 피해와 가해로 이분화해서만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제가 말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요. 저는 오로지 그들이 모방하는 것(반복적으로 자체 생산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안에서 만들어진 영상을 보는데, 미군들이 의외로 너무 쾌활하게 지내고 있더라고요. 기지 안에 있는 여러 시설을 과시하기도 하고요. 그들이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한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렇다면 포켓몬고와 미군기지는 어떤 접속면을 갖는 것일까.

 

“포켓몬고와 미군기지를 연결지어 생각하게 된 것은 제가 용산으로 이사오면서부터예요. 어느 날 자고 있다가 밖에서 펑...펑...하는 소리에 너무 놀라 뛰쳐나왔는데,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일기를 쓸 때에서야 그날이 7월 4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던 거예요. ‘아,.. 이곳에 뭐가 있구나’라는 걸 그 순간 느꼈어요. 그전까지 저는 미군기지에 대한 뚜렷한 경험을 품고 있진 않았어요. 가족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들만 갖고 있었죠. 기지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 기지를 포함한 주변 지역 사람들의 생태계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에요. 그때부터 미군기지로 작업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포켓몬고를 통해 발견한 미군기지 내부의 이미지들이 무언가 가시화되고자 하는 욕구처럼 느껴졌어요. 유통되는 이미지와 불꽃놀이의 감각이 이질적이면서도 닮았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어요.”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을 만든 정여름 감독. (사진: 박상환)

 

‘생태계’라는 표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미군기지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말하기 위한 표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이아이>에는 미군들이 카페테리아에서 먹는 장면과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카페테리아와 골프장이라는 장소성이 ‘기지생태계’와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다.

 

“미군들의 일상에 허구성이 있다는 걸 카페테리아의 음식을 보고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미국이라는 문화가 재현되는 것 자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증이 느껴졌어요. 미군기지에서 먹게 되는 음식들이 미국 본토에 있는 그대로라고 해요. 그들이 실제로 머무르고 있는 곳과 공간 사이에 붕 떠 있음, 외면됨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점에 집중하고 나니, 미군기지가 일종의 연극무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골프장 장면에서는 땅이 깎이는 것을 초점으로 두고 용산공원까지 얘기를 해보는 거죠. 그곳이 예전에 일본군이 광장으로 쓰던 곳이래요. 그곳을 다듬고 잔디를 심어서 골프장으로 쓴다고 하더라고요. 점차 낮아지는 땅이 상상됐어요.”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스틸컷

 

<그라이아이>는 직접 촬영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다. 푸티지(footage)로만 만들어진 작품이고, 결국 누군가의 눈을 통해서만 세계를 보게 된다. ‘빌려온 시선’에 대해 물었다.

 

“제가 예전부터 신을 빌려와서 얘기하는 걸 좋아했어요. 신의 이야기는 신이 아닌 자가 전한다는 점에서도요. 그라이아이는 전쟁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신 엔뉘오로 시작하고, 엔뉘오의 눈을 빌려서 들어갔다가 계속해서 눈이 전도되는 과정들이 있는데, 그걸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하나의 눈과 세 개의 시선- 기억‘들’을 빌려오기

 

“기억이 선풍기라면 그 선풍기를 다 해체해서 어떤 부품들이 있는지 보고 싶어요. 보고 나서는 만져보고, 다른 것끼리도 붙여보고 싶고요. 그 많은 부품들을 다시 재조합한다 해도 저는 선풍기를 만들 수 없거나 같은 선풍기를 만들 수가 없어요. 그게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을 만들 때의 관점인 듯해요. 누군가의 선풍기를 가져와서 다 흐트려놓은 다음에 그걸 재조합하면 일단은 선풍기가 나오진 않는다. 그렇다면 뭐가 나올 수 있을까? 무엇이 나올지는 상상에 맡기면서 작업했고, 그런 식으로 많은 부품들을 서로 연결하기도 하고 멀리 두기도 했어요. 그게 ‘기억’을 빌려오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모뉴먼트(기념비, 동상 등 조형물)도 대부분 함께 옮겨졌다. 그러나 포켓몬고에 접속하면 그 모뉴멘트들이 기존의 장소에 그대로 있다. 용산 미군기지가 용산 공원이 되면, 그 모뉴먼트들은 포켓몬고에서만 볼 수 있고, 실제로 그곳에 가보면 존재하지 않지만 가상의 세계에는 남아있게 된다.

 

정여름은 이런 관계들을 가시화하는 것이 이 영화의 초점이라고 말한다. 가상현실 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된 기념비, 지금은 없는 것들의 흔적. 그것이 원래 있었던 자리를 보는 것.

 

▲ 정여름 감독 영화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포스터

 

이미지의 조립으로 가시화되는 역사적 기록

 

정여름은 실제로 존재하는 미군기지가 지도상에는 표시되지 않고 좀처럼 그 안을 볼 수 없지만, 미군들이 포켓몬고에 등록을 해놓았기 때문에 미군기지 안의 모뉴먼트들이 보이게 되었다는 것,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없지만 나중에 이 모뉴먼트들이 다 뜯겨나가거나 옮겨지더라도 그것들은 가상세계 안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발상으로 글을 먼저 썼고, 거기에 맞춰서 영상을 만들어갔다고 한다.

 

함께 작업한 안지환 피디는 아카이빙의 과정에서 어떻게 이미지들을 조립했는지, 역사적인 기록을 어떤 식으로 가시화하려고 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일제 시대에 병사들을 훈련해서 내보내는 과정을 찍은 영상을 구했는데, 그 큰 길이 지금 녹사평에서 삼각지 가는 그 길이거든요. 그걸 우리가 지도상에서 봤을 때는 미군기지가 가려져 있어요. 그런데 나무들은 그대로 있단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이미지들이 재밌게 조립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어떤 역사적인 기록이 보이게, 정여름 감독 말처럼 가시화되도록 했죠.”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스틸컷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서사‘들’

 

이제껏 미군기지에 대한 서사는 주로 ‘기지촌 여성’의 몸을 통해 재현되어 왔다. 물론 ‘기지촌 여성’의 삶을 생략하고서 기지 문제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억압하는 폭력적인 미군과 ‘기지촌 여성’ 피해자로 도식화된 이분법적 틀만으로는 미군기지를 매개로 한 수많은 삶의 주름들을 펼쳐 보여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전형적인 기지촌 재현을 걷어내면, 우리가 놓쳐온 기지생태계 속 얽힌 관계들과 삶들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미군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들, 그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 기지 안팎에서 미군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미군기지에 대한 이해의 지평과 윤곽도 확연히 달라지지 않을까?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정여름은 이미 ‘다른’ 서사의 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화와 게임이라는 가장 비현실적인 모티브를 통해서 현실을 비춰내는 역설로 시작하여, 증강현실 속에서 과거의 용산 미군기지와 현재의 용산 공원이 중첩된 채 접속하는 혼성공간을 영화 속에서 구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조우하게 되는 것은 타자들의 눈을 빌림으로써만 볼 수 있는 미군기지, 시선이 전도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 서사‘들’이 가시화되어 출몰하는 사태이다.

 

-이 기사는 2020년, 변방의 북소리에서 펴낸 <둥둥> 2호에 실린 인터뷰를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제10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5월 21일과 23일, 인천 애관극장에서 상영됩니다. 링크 참조. https://www.diaff.org

 

[필자 소개]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동물·난민·여성·가해자성을 키워드로 공부와 활동을 이어가면서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앎과 삶을 모색하는 중이다. 주요역서로 『유곽의 총파업』(논형, 근간),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논형, 2021) 등이 있고, 최근에 쓴 글로는 「외국인보호소와 출입국관리체제의 현재적 계보」(『황해문화』, 2022), 「페미니즘과 생태적 관점으로 다시-쓰는 ‘민’들의 법정의 계보」(『사이間SAI』, 2021), 「가해국 여성들의 피해, 일본인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문제화’할 것인가」(2021), 「민간인학살 수행 병사들의 PTSD와 가해자들의 말하기」(2020)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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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갤럭시 2022/05/26 [14:54] 수정 | 삭제
  • 진짜 신박함
  • 메론 2022/05/22 [09:20] 수정 | 삭제
  • 너무 좋네요.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이번엔 온라인 상영도 하던데, 그라이아이는 프로그램에 없어서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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