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말을 걸지 않는다

[극장 앞에서 만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성냥공장 소녀>

신승은 | 기사입력 2022/06/04 [11:53]

자본주의는 말을 걸지 않는다

[극장 앞에서 만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성냥공장 소녀>

신승은 | 입력 : 2022/06/04 [11:53]

※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종린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의 단식이 53일 만에 중단되었다. 노동자의 외로운 단식투쟁은 끝내 시원한 대답 없이 마무리되었다. SPC 파리바게트 측은 아침식사로 노동자들에게 500원 상당의 해피포인트를 지급해 온 것을 비롯하여, 휴일과 휴게시간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등 부당노동행위와 노동 착취를 해온 것이 드러났다. 임종린 지회장은 보식을 진행 중이며, 곳곳에서 릴레이 단식이 이어지고 있다.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성냥공장 소녀> 포스터, 1990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중 자본주의를 차갑게 다룬 3부작 <아리엘>(1998), <황혼의 빛>(2006), <성냥공장 소녀>(1990)가 있다. 이번에 다룰 영화 <성냥공장 소녀>에도 한 노동자 여성이 등장한다. 이름은 이리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카티 오우티넨 배우다. 카티 오우티넨은 감독의 말 없는 영화들에서 무표정으로 관객들에게 많은 대화를 걸었다.

 

카티 오우티넨이 연기한 이리스는 성냥공장에서 일을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검은 화면에 글귀가 나온다.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숲속 한가운데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을 것 같다.”라는 세르기안 골론, 안젤리카 백작부인의 말이다.

 

조용하지만, 시끄럽게

 

이어지는 검은 화면에 크레딧이 뜨고 차가운 겨울바람 소리가 한참 이어진다. 그리고 화면이 켜지면 공장의 기계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성냥의 제조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기계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컷이 롱테이크로 보인다. 마치 기계가 주인공인 것처럼 주인공 이리스는 한참 뒤에나 등장한다. 자본주의를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기계 앞이 아닌 기계 뒤에 사람이 있는, 자본 뒤에 사람이 있는 현실을 컷 연결로 표현했다.

 

모든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가 그렇듯 영화는 조용하나 시끄럽다. 대사는 20 마디가 채 안 될 정도지만 앰비언스(환경음)와 음악이 귀를 가득 메운다. <성냥공장 소녀>의 오프닝 기계 씬들에서는 기계들의 소음이 가득 찬다. 차가운 기계 소리만 연신 들리고 그렇게 듣고 싶은 주인공의 목소리는 영화 중반부에나 등장한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우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지 영화를 지켜보지만 안타깝게도 이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공장의 소음을 견뎌야만 한다.

 

▲ 영화 <성냥공장 소녀> 중 성냥을 만드는 기계가 움직이고 있다.

 

영화 시작 3분 40초가 지나서야 우리는 이리스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 공장을 배경으로 일을 하고 있는 이리스의 바스트 샷, 원 샷이다. 이리스는 말이 없다. 듣고만 있으면 이리스가 있는 줄, 노동자가 존재하는 줄 모를 것이다. 그저 공장의 소리들뿐이다.

 

고독한 노동자와 천안문 시위

 

일을 마친 이리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이리스에게 편안한 공간일까? 안락함을 가져다주고 말을 걸어줄까? 그렇지 않다. 이리스는 식사를 홀로 준비한다. 엄마와 의붓아버지와 이리스 세 식구는 마주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식사를 한다. 감독은 여기서 텔레비전을 오랜 시간 잡는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천안문 광장 시위 진압작전을 보도하는 뉴스다. 비무장 학생 시위를 진압하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발생한 사건을 컷 전환 없이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길게 보여준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영화가 아닌 뉴스를 보는 것 같다.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을 인물의 대화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한다. 기계의 소리로 텔레비전 소리로 전한다.

 

뉴스 화면은 한 번 더 등장한다. 교황이 스칸디나비아를 순방한 영상이다. 영상은 천안문 광장 시위 진압 영상에 비해 짧게 비춰지고 소리는 계속된다. 컷은 넘어가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와 의붓아버지를 비추고 뒤로는 다림질을 하는 이리스의 모습이 보인다. 뉴스 소리는 천안문광장 소식으로 넘어간다. 인민해방군이 시민을 무차별 사살한 소식이다. 다시 뉴스 화면으로 컷이 전환된다. 다음 컷은 바로 성냥공장의 기계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리스의 원샷으로 넘어간다. 핀란드 여성 노동자의 상황과 천안문 학생 시위 무력진압 사건은 어떤 연관성을 가질까.

 

한 여성 노동자의 고독과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발생한 무력 진압 사건은 어쩌면 맞닿아 있다. 파리바게뜨 지회장 단식과 그에 대한 SPC 측의 태도도 겹치는 지점이 있다. 무력감이다. 기계들 뒤에 가려져 사랑을 꿈꾸는 노동자 이리스, 평화를 원했던 비무장 학생 시위, 노동자의 평등한, 당연한 권리를 원했던 단식은 연결되어있다. 이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 또한 연결되어 있다. 묵묵부답, 폭력 진압, 노조 검열 등 무력감을 유발하는 행위다. 영화 속 인물 이리스는 그 중 가장 무력함에 찌들어 있다.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포기한 듯싶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꾸준히 사랑을 찾기 위해 댄스홀을 찾는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구원해 줄 사랑을 찾는다.

 

현실 속의 사람들 또한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사랑의 형태가 단순히 성애적인 사랑이 아니다. 연대의 모양을 가진 사랑을 찾는다. 사람들은 사랑을 나눈다. 불매 운동에 참여하고 시위에 나서고 릴레이 단식을 한다. 이리스에게도 다른 사랑을 찾을 방법이 있었다면 결말은 덜 슬펐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리스의 목소리를 더 들었을 지도 모른다.

 

이리스는 댄스홀에서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하고 꿈을 키우지만 차갑게 버림받는다. 기계들은 계속해서 돌아가고 감정이 없다. 자본주의는 이리스에게 말 한 번 건네지 않는다. 회사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임신했어요.” 드디어 이리스가 입을 여는데, “그래요?”하고 피우던 담배를 끄고는 떠나버린다. 이리스는 달려오던 차에 치여 버린다. 그 와중 가족들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이리스는 집에서 마저 쫓겨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이리스는 고독과 절망 끝에 서버렸다. 여기서 이리스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성냥공장 소녀>(1990) 중 이리스가 공장 기계를 바라보고 있다.

 

이리스는 쥐약을 산다. 나는 이리스가 쥐약을 먹을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랬다면 이 영화에 대해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스는 쥐약을 댄스홀에서 만났던 남자에게 먹이고, 부모님에게도 먹인다. 이리스의 분노는 연대를 만나지 못했다. 결국 타인에게 하는 개인적 복수로 마무리되었다. 여느 날처럼 공장에서 일하던 이리스, 형사들이 다가와 이리스를 데려간다. 카메라는 이리스가 떠난 공장을 오래도록 찍는다.

 

자본주의만치 차가운

 

<성냥공장 소녀>는 자본주의만치 차가운 영화다.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유머 한 스푼조차 찾아볼 수 없다. 영화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카티 오우티넨, 이리스의 무표정이다. 이리스는 퇴근 버스 속에서 책을 볼 때만 잠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에겐 노동의 즐거움도, 함께 일하는 동료도, 가족의 부당한 처사에 맞받아쳐 줄 친구도, 품어줄 사랑도 하나도 없다.

 

안데르센의 단편 소설 <성냥팔이 소녀>의 소녀 안나도 마찬가지다. 안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성냥을 팔지만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 소녀는 홀로 성냥을 켜 추위로부터 자신을 지킨다. 성냥 하나마다 안나가 꿈꾸는 환상이 떠오르지만 성냥에 불이 붙어 꺼지기까지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성냥을 다 쓴 소녀는 결국 추위에 동사한다. 안데르센의 잔혹동화에서 영화는 출발했다.

 

차이점은 이리스는 복수를 한다는 점이다. 이리스는 성냥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켜지 않고 저 차가운 세상을 향해 던진다. 그리고 본인도 끝내 잡혀가는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이리스에게 동료가, 연대의 성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카메라는 fix(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을 시켜놓고 하는 촬영)로 대부분의 샷을 찍는다. 최소한의 무빙만 허용한다. 무심히 서있는 카메라는 무표정의 이리스를 꼭 닮았다. 이리스를 유일하게 지켜봐 준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카메라일 것이다. 카메라는 다가가지도 시선을 떼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같은 사이즈로 그를 응시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비참함을 그대로 전하기 위한 연출의 전략이다. 일말의 동정도, 연민도, 회피도 없이 바라본다. 원 샷, 바스트 샷으로 마치 증명사진을 찍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온도를 증명한다.

 

▲ 영화 <성냥공장 소녀> 중 이리스가 빵을 앞에 두고 책을 읽고 있다.

 

카메라는 이리스의 삶을 아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표현하는 듯싶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그 그림자의 가려진 노동자의 삶을 꾸준히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나는 감독이 제안한 방식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길 소원한다.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불매 운동에 참여하고 연대 기금을 보태는 등 이리스에게 말을 한 번 걸어주는 것처럼 행동하길 바란다. 감히 이리스의 앵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클로즈업으로 이리스를 바라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단 아이레벨(인물의 눈높이에서 촬영)로 바라보아야한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닌 연대다.

 

세상을 사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 음악이다. <레닌그라우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라는 음악영화를 연출할 정도로 감독은 음악에 큰 관심을 보인다. 이 조용한 영화에서 음악 속 가사는 배우가 내뱉는 대사보다 많은 자막을 할애한다. 처음 나오는 음악은 댄스홀에 간 이리스를 배경으로 나오는 탱고 음악이다. 댄스홀의 여자들은 모두 남자의 선택을 받아 춤을 추고 홀로 남은 이리스는 음악을 듣는다. 뮤지션들의 모습이 또 다른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이리스는 없는 듯이 댄스홀의 풍경이 그려진다. 어디서든 이리스는 없는 존재다.

 

가사가 주가 되는 음악은 총 세 번 나온다. 처음은 이리스가 홀로 남은 댄스홀에서, 두 번째는 댄스홀에서 만난 남자에게 버림받은 뒤 카페에서, 세 번째는 쥐약을 모두에게 먹인 뒤 이리스가 직접 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각각의 음악은 이리스의 마음을 묘하게 대변하거나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첫 번째 음악의 가사는 쓸쓸하기 그지없고, 두 번째 음악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에 푹 빠진 남자의 마음을 담은 가사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리스는 형사에게 잡혀가고 음악은 계속 나온다.

 

마지막 장면의 노래 가사는 “네가 줄 수 있는 것은 실망 말고는 없어, 추억의 짐은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사랑의 꽃을 이젠 피울 수가 없어, 너의 차가운 눈길과 냉소만이 토해내네.”이다. 음악이 끝이 나면 다시 시작된 침묵 속에서 크레딧이 쓸쓸하게 올라간다. 마지막 씬의 가사는 잔혹한 이별 노래다. 연인과의 이별을 그린 듯한 가사지만 차디 찼던 자본주의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는 이리스의 마음과도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리스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를까. 비슷하다면, 다른 결말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대하고 행동한다면 마지막 씬에서는 무슨 음악이 나올까. 꽃다지의 ‘바위처럼’이 나올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나올까. 감독은 이리스는 사랑 받지 못하는 노동자 여성으로 표현했지만 자본주의를 그린 그의 방식을 보면 그가 말했던 사랑은 단순한 가족애나 성애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한 관심이다. 기계는 관심이 필요 없이 잘도 돌아가지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마지막 음악의 가사로 글을 마무리한다. “오, 당신은 어떻게?”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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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Y 2022/06/05 [09:46] 수정 | 삭제
  • 예전에 보았던 영화 <망종>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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