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앙도 멸시도 아닌, 몸과 기억의 ‘퀴어링’

<책방에서 밑줄 긋기> 한정현의 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달리 | 기사입력 2022/06/13 [10:22]

추앙도 멸시도 아닌, 몸과 기억의 ‘퀴어링’

<책방에서 밑줄 긋기> 한정현의 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달리 | 입력 : 2022/06/13 [10:22]

“세상에서 가장 추앙받고 가장 멸시당하는 사람이 마릴린 먼로인 것 같다고.”(185쪽)

 

마릴린 먼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다고 하자, 한 기자가 비아냥거리듯 물었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스펠링은 알아요?”

 

금발에 ‘백치미’ 캐릭터로 유명했고 사후에도 영원한 ‘섹스 심벌’로 박제된 듯한 마릴린 먼로는 사실 어디에나 책을 들고 다니는 독서광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자신이 소장한 수백 권의 책 목록이었다고 한다. 기자의 무례한 질문에도 마릴린 먼로는 웃으며 답했다. “혹시 그 책을 읽어봤나요? ‘그루센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오는데, 나는 그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지하철 환풍구에서 나오는 바람에 치맛자락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으로 마릴린 먼로를 기억한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의 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살롱드마고’에 입고된 한정현의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문학과지성사, 2021) ©달리

 

한정현의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문학과지성사, 2022)에서 마릴린 먼로라는 인물은 이야기의 중심이기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그리고 퀴어들의 ‘초상’에 가깝다. 이야기는 코난 도일의 유명한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 ‘셜록’과 ‘왓슨’에 비유되는 인물들의 추리소설 형식으로, 잃어버린 조각을 하나씩 찾으며 ‘진실’에 다가간다.

 

변방의 몸들

 

갑자기 종적을 감춘 친구 셜록, 결정적인 사건을 둘러싼 기억이 사라진 주인공이자 ‘왓슨’으로 불린 설영. 두 사람은 과거에 공동연구를 하며, 빨치산(partizan,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내전을 전후로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을 말한다)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에 대해 조사하다 빨치산 내부에서의 성폭력 문제를 접하게 된다.

 

‘빨치산’(작품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파루치잔’도 함께 사용) 토벌이라는 국가폭력과 이후 낙인의 역사에서도 여성과 퀴어의 존재는 더욱 밑바닥 아래에서 감춰지고 삭제된 것이었다. 편하게 주어진 자리도 미루고 지도교수조차 못마땅해하는 연구주제를 고른 셜록이, 설영도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셜록은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소수자들, 그 ‘배제의 대상’에 대한 연구가 없음을 지적하며 “선택은 충분하잖아. 이젠 배제도 좀 찾아봐야 하지 않겠어?”(31쪽)라 말한다. 어쩌면 기록이란, 배제된 존재에 첫 시선을 보내는 일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 특히 과거사 연구는 ‘기억되는 것’ 자체가 목적인 동시에 투쟁에 가깝다. 나는 글쓰기 작업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 역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근처 지역 고등학교에서의 스쿨미투 사건을 공론화했다가 다음 해 그 활동과 관련 인터뷰를 기록으로 남긴 적이 있다.(문화기획달 자료집 『변방의 목소리, 지방의 스쿨미투를 기록하다』, 2019) 그때 기록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고발자들이 ‘미투’를 했다는 이유로 얼마나 심각한 학교폭력에 시달렸는지, 성차별적인 학교 문화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성폭력 문제가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처음 인터뷰에서 “(스쿨)미투 활동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던 졸업생 고발자 한 명이 자료집이 나오고 나서 메일을 보내왔는데, “책을 보고 나니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스쿨미투를 할 것 같다”고 해서 마음이 울컥했다. 스쿨미투를 한 학생을 향해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말을 버젓이 해도 되는 학교, 배제의 대상을 오히려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 코난 도일의 분신은 셜록이 아니라 왓슨이래요. 기록하는 자.”(153쪽)

 

원본 혹은 진짜임을 증명하라는 요구

 

소설에서 이야기의 다른 중심축은, 진실을 추적하는 또 한 명의 ‘왓슨’으로서 설영과 연대하게 된 성형외과 의사 연정으로부터 흘러간다. 성판매 여성 손님들이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성형 시장에서, 연정은 종종 혼란과 갈등을 느낀다. 성형외과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살기 위해’ 추앙되는 외모로 바꾸고자 하는 여성들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살기 위해’ 멸시받는 외모를 바꿔야만 하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 그리고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도 존재했다. 그런 연정에게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선배 의사 지윤이 들려준 말은 연정의 가슴을 울린다.

 

“왜, 사람들. 툭하면 근본 없다는 말 많이 하잖아? (중략) 근데 연정아, 난 생각했어. 그 원본이라는 것도 결국엔, 세상 사람들이 정해놓은 진짜 같은 무언가잖아? 그 원본 안에 안 들어가면 가짜라는 거고. 그럼 그 원본, 꼭 필요한 걸까? 그게 없어져야 가짜라는 말 안 들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186~187쪽)

 

전남편의 딸 도영을 10년간 키우며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지만, 세상으로부터 '진짜 엄마'로 인정받지 못한 연정은 지윤이 말한 ‘근본’과 ‘진짜’라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도영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소수자로서 도영이 당한 고통과 폭력에 대해 알게 되고, 죄책감은 연정을 계속 짓누른다. 도영이 죽은 후에도 연정은 사건을 바로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원본’만이 진짜고 나머지를 모두 ‘가짜’로 규정해 낙인찍어 놓은 세상의 혐오는 ‘피해’조차 온전히 인정받을 수 없게 했다.

 

진짜 가족, 진짜 여자, 진짜 성폭력 피해자… 그 ‘진짜’라는 구분과 ‘근본 없는’ 신념이 가진 폭력은 셜록이나 도영처럼 배제된 존재들이 밀려나거나 사라지게 만들어버렸다.

 

▲ 책방 살롱드마고 입구 문에 붙어 있는, ‘길벗체’(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여섯 색 무지개가 담긴 한글 서체)가 사용된 성소수자 관련 포스터들. (촬영: 달리)

 

원본 혹은 진짜임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사실 일상 어디에서나 우리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얼마 전 교사들을 대상으로 젠더 교육을 하던 중, 한 선생님이 “요즘 청소년들은 외모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상대의 성별을 구분하거나 확인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먼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너 여자야 남자야?”라는 질문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분법적 성별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혹은 그러한 기준으로 자신의 성별을 정체화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질문’이 어떻게 다가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청소년기에 나 역시 ‘진짜 여자’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 내가 또래보다 가슴이 일찍 발달하자 사촌언니들은 “남자들한테 사랑받겠다”고 놀렸는데, 그 말이 기분 좋기보다 왜인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자라면서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슴 큰 여자는 멍청하다”는 말을 들었다. 고등학생 때 여름마다 가슴에 압박붕대를 몰래 감고 다니면서,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가슴이 없다면 내가 ‘진짜 여자’라 할 수 있는지, 너무 ‘여자 같’아도, 너무 ‘여자 같지 않’아도, 내 몸은 불순하거나 부끄러운 존재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무엇을 ‘내 몸’ 혹은 ‘올바른 몸’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진짜’ 존재하긴 할까?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을까? 왜 진작 말 안 했니, 너.”

“뭐 하러 선배한테까지 그래요. 이건 내 몫인데.”

“연정아. 왠지 이건 내 일이기도 한 것 같아서 그래.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일…… 확실히 모두의 일 같아서 그래.”(327쪽)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여성 빨치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로 살 수 없는, ‘몸’에 속하지 않는,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가족’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폭넓게 담고 있다. 소설이 생생하게 증언하는 이야기들은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위해 싸우고 있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당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지윤의 입을 빌어 이 '소설 같은 현실'이 우리 모두가 마주한 일이라 말한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책을 덮고 나니 진짜, 정상에 대한 욕망에서 이탈해 근본에서부터 ‘퀴어링’(queering) 해보자고, 셜록이 속삭이는 듯했다.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완간된 지역독립잡지 『지글스』를 비롯해 여성들과 함께 글 쓰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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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22/06/18 [10:51] 수정 | 삭제
  • "반짝인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작가의 문체
  • ㅇㅇ 2022/06/15 [19:56] 수정 | 삭제
  • 놀랍다 휴가 때 읽어봐야지
  • 책읽기전 2022/06/14 [20:15] 수정 | 삭제
  • 마릴린 먼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더욱 혼란해졌던 기억이 났어요.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고 했으나 결국 알지 못한 느낌이 들었고, 그 시대 여배우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추앙하는 이면에 멸시하는 대중들의 욕망과 지식인 남자들의 이중성이 더 크게 느껴졌죠.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헌사를 하듯이 소설을 집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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