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케어러’들을 만나다

[사회적 소수자와 돌봄] 돌봄자가 손해보지 않는 사회

조기현 | 기사입력 2022/06/30 [16:48]

‘영 케어러’들을 만나다

[사회적 소수자와 돌봄] 돌봄자가 손해보지 않는 사회

조기현 | 입력 : 2022/06/30 [16:48]

※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를 위하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돌봄 현장을 조명하고, 다양한 돌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 케어러’들과의 만남

 

이제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바로 검색만 해도 관련 기사가 여럿 나오고, 일상에서도 영 케어러를 설명하기 전에 이미 그 뜻을 안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검색창에 ‘영 케어러’라고 치면 텅 빈 기사 목록을 마주해야 했던 몇 년 전이 새삼스럽다. 영 케어러 개념을 소개하는 기사, 지자체마다 영 케어러를 발굴하고 지원에 나서겠다는 기사, 영 케어러들의 힘겨운 사연이 담긴 기사 등이 눈에 띈다.

 

지난 2월에는 정부가 영 케어러를 ‘가족돌봄 청년’으로 번역해서 호명하기도 했다. 돌봄과 관련된 기존의 법률 용어인 ‘가족돌봄 휴가’, ‘가족돌봄 휴직’을 고려한 결과다. 구태여 원어에 없는 ‘가족’이 앞에 붙는 게 어색하기도 하지만, 일단 부를 말이라도 생긴 게 어디냐는 마음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효’라는 가치로 돌봄 경험을 환원하며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효자, 효녀’라는 말보다는 중립적이다. 또한 이 사회에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과 청년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퍼트릴 수 있는 말이고, 돌봄과 생계, 진로 이행이 겹치는 어려움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호명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 지난 2월 14일 보건복지부는 ‘가족돌봄 청년 지원대책 수립방안’을 발표했다. 제6차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발표 자료 중.

 

영 케어러, 가족돌봄 청년 등 무엇보다 이제까지 침묵하던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사회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말이 생겼다.

 

‘영 케어러’라는 말은 영 케어러들이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하나의 장소가 되었다. 내가 쓴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2019)를 읽거나, 이후 출연한 방송과 강연을 보고 “나도 영 케어러(였)다!”라는 연락을 해온 이들이 있었다. 그런 만남 덕분에, 과거 영 케어러였거나 현재 영 케어러인 7명의 생애를 기록한 책 『새파란 돌봄』(2022)을 쓸 수 있었다. 영 케어러 자조모임을 운영하는 이들, 자조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마치 먼 타지에서 모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서로의 공통점을 하나하나 확인해갔다.

 

혼자 삼키고 삭히던 돌봄 경험을 나누며

 

많은 이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돌봄을 겪는다. 부모나 조부모, 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거나 원래 앓던 지병이 큰 질병으로 악화된다. 간병을 어떻게 해야 하고 복지는 무엇을 신청해야 하는지 몰라서 헤매고, 막대한 병원비와 간병비로 휘청거리며, 복지와 의료, 사보험 등 행정 업무에도 시달린다. 그러는 사이, 죄책감과 분노를 오가며 돌봄을 이어간다. 학업을 뒤로 미뤄두거나 포기하게 되고, 준비하던 일을 멈추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도 한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이 하루에 많은 시간을 차지해도 또래들과 나눌 수 없었다. 또래들에게는 잘 실감 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집에서, 병원에서, 학교에서 혼자서 삼키고 삭혔던 경험을 함께 나누며 공통점을 맞댔다. 그렇게 모아진 공통점은 간담회나 그룹 인터뷰 등으로 정부 부처에 전달됐고, 지난 2월 14일에 발표된 ‘가족돌봄 청년 지원대책 수립방안’의 기초 자료가 됐다.

 

“제가 한 돌봄 경험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쓸모’가 있다고 느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치매가 시작된 할머니를 13년간 돌보았던 푸른(가명)이 남긴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영 케어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관심 없을 것 같은 경험이 많은 이들이 경청하는 경험으로 바뀌는 경험이었다.

 

어찌 보면 정말 ‘영 케어러’라는 단어 하나가 시작이었다. 혼자서 삼키고 삭히던 돌봄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료 관계를 만든 것도, 그렇게 찾은 공통점이 사회적 대책을 마련하는 기초 자료가 된 것도 말이다.

 

▲ 필자가 아버지를 돌본 9년을 기록한 『아빠의 아빠가 됐다』(이매진, 2019)와 ‘영 케어러’ 7명의 생애를 기록한 책 『새파란 돌봄』(이매진, 2022) 표지 이미지.

 

돌봄을 ‘차별’의 순간으로 본다면?

 

‘영 케어러’라는 말로 경험들을 맞대며 공통된 문제를 확인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영 케어러’로 수렴할 수는 없다. 영 케어러는 청(소)년 문제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돌봄 문제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아픈 가족을 돌보느라 생애 과업을 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돌봄이 왜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느냐다. 이제까지 돌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고, 또 앞으로 받지 않을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돌봄을 받거나 돌봄을 하는 사람은 예외적이고 불쌍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런 시선은 돌봄을 하면서 얻은 긍정적인 요소를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분명 돌봄을 하면서 슬픔과 함께 기쁨이 있었고, 고통과 더불어 보람을 느꼈다. 상실만큼이나 배움도 컸다. 다만 한 감정을 압도하는 다른 감정이 있었을 뿐이다. 자조모임에서 슬픔과 고통, 상실을 함께 다 꺼내놓고 보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기쁨과 보람, 배움을 발견할 때가 있다.

 

며칠 전에는 영 케어러와의 대화에서 ‘차별’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눈이 번뜩했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기, 청년기의 경험을 ‘차별’의 관점으로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많은 이들이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곧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무시할 근거를 주지 않기 위해서 돌봄 경험에 대해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10년 넘게 와상(臥牀) 상태인 어머니를 돌본 하진(가명)은 자신이 어머니를 돌본다는 사실을 세상에 말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혹시 제가 공개적으로 말했다가 나중에 내가 들어가고 싶은 직장의 면접관이 저를 알아보고 채용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분명 휴가를 자주 쓰고 능률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회사에서 부담스러워할 거 같아요.”

 

조현병과 알츠하이머가 있는 어머니를 돌보는 은영(가명)은 초등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에게 그 사실이 알려졌다. 며칠 후 담임은 반 아이들 앞으로 그를 불러냈고 ‘효행상’을 건네줬다. 그에게 그 순간은 ‘차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상이 마치 낙인처럼 느껴졌어요. 선생님은 저를 위하려고 했지만, 제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냥 똑같은 학생으로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어요.”

 

단지 돌봄으로 힘들었던 순간이 아니라 ‘차별’의 순간으로 다시 경험을 회고해보니, 어쩐지 바꿀 수 있는 부분 같았다. 한 존재를 존재 자체로 인정하는 게 차별금지법의 목적이기에, 영 케어러에게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셈이었다. 자조모임에서는 서로의 언어가 서로의 삶을 비춰주기에, 변화의 지점을 찾을 수도 있었다.

 

▲ 영 케어러 자조모임에서 서로 나누었던 돌봄 경험에 ‘차별’이라는 말을 붙이자 많은 것들이 설명됐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미류 활동가의 단식 42일 차에, 자조모임에서 동조 단식을 참여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독박 돌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군분투

 

은영은 내가 운영하는 영 케어러 자조모임에 함께 한다. 최근 단톡방에 임신 소식을 전했다. 그는 30대 초반으로, 어머니의 주 돌봄자가 된 지 10년을 넘기고 있었다. 자조모임에 참여하는 모든 영 케어러가 축하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를 돌보며 얼마나 정신없었는지 모르지 않기에, 어머니 돌봄과 임신과 출산, 육아가 맞물려 얼마나 더 힘들지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부의 성인돌봄 정책과 아이돌봄 정책, 그리고 그의 삶을 이행할 수 있게 해주는 청년 정책이 그의 삶에서 잘 맞물릴 수 있을까? 영 케어러가 부모의 부모가 될 뿐 아니라, 진짜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현실 앞에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은영의 삶을 되돌아보면 많은 것이 한꺼번에 겹친 순간들뿐이었다. 그가 대학생이던 때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할머니도 장애가 있었다.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대부분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사라진 자리를 메꿀 수 있는 사람은 은영 뿐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우울감에 시달렸고 낙상 사고까지 벌어졌다. 할머니의 인지는 빠르게 저하됐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대학교에 온전히 다닐 수 없었다. 집에는 돌봄이 필요한 할머니와 어머니가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동기는 은영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동기는 은영에게 수강 신청을 취소할 거냐고 물었다. 자신이 수강 신청을 하지 못한 수업이 있는데, 은영이 취소하면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동기의 말 한마디에, 은영은 대학이 자신의 존재가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라고 느꼈다. 결국 자퇴했다.

 

집에는 당장에 쓸 돈이 없었다. 병원비와 생계비로 잔고는 바닥이 난 상태였다. 은영은 8시간 근무할 수 있는 일을 구했지만, 월급은 120만 원에 불과했다. 월급은 들어오는 족족 병원비와 생계비로 자취를 감췄다. 식사는 밥을 물에 말아서 김치로 때우는 게 전부였다. 할아버지가 죽고 유산으로 남은 집 한 채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유산은 여러 자식들의 공동 명의여서, 함부로 처분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의 인지 저하는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이모에게 할머니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이모는 할머니를 돌보는 대신 집 보증금을 달라고 했다.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보증금을 빼주기 위해서 어머니와 살 곳을 찾아야 했다. 당시 사귀던 사람이 군인이었다. 결혼을 하면 군인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남편과 어머니, 은영 셋의 생활이 시작됐다. 여전히 은영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잘 지냈다. 은영의 돌봄 부담을 많이 나눠서 졌다. 주변 사람들은 아내의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며 남편을 치켜세웠다. 은영도 남편이 고맙고 없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 속에서 은영은 또다시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느꼈다. 자신의 돌봄 역할이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날은 없을 거 같았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은영이 어머니를 돌보는 건 딸이니까 당연한 것이었고, 그러므로 돌봄으로 아무리 고생해도 인정을 받을 길이 없었다.

 

결혼을 하니 가구소득이 올라간다. 남편과 은영이 번 돈이 합해지면 수급자 선정기준을 훌쩍 넘어버린다. 좀 더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선택했던 결혼이 모든 복지 신청의 기회를 막아버렸다. 어머니가 아플 때마다 큰 병원비는 남편에게 손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자신의 부모를 부양해야 했는데, 은영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도 모자라 부양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니 언제 문제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은영은 남편에게 금전적으로 기대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요원했다.

 

‘영 케어러’ 지원을 넘어 돌봄 전반에 질문을

 

작년에는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을 팔았다. 자식들 간에 몇 년간 소송 분쟁을 거친 끝에 목돈이 조금 생겼다. 그사이 친척들과는 절대로 보지 않는 사이가 됐다. 돈이 얽히면 핏줄도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배웠다. 목돈으로 어머니 병원비와 약값, 생활비, 주간보호센터 비용 등을 충당한다. 한결 수월해질 즈음 임신을 하게 됐다.

 

은영의 이야기는 영 케어러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말해준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중으로 돌보고, 돈 문제로 친척들과 협상하거나 갈등해야 한다. 안정을 위해서 결혼을 했지만, 가구소득 증가로 아무런 복지 혜택도 받지 못하니 개인의 책임은 더욱 더 강화된다. 앞으로 어머니를 돌보면서도 임신과 출산, 양육을 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 케어러는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이 많아진다. 누군가는 가족돌봄 청년에서 가족돌봄 중년이 되고, 누군가는 돌봄이 끝난 이후를 살아가며, 돌봄하면서 자신이 아프게 될 때도 적지 않다.

 

각기 다른 돌보는 삶들을 마주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가족돌봄 청년을 넘어, 전 세대 돌봄자를 위한 지원을 마련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가족돌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 케어러가 나이가 든다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돌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충분한 돌봄서비스와, 모든 돌봄자를 위한 지원이 짝을 이룰 방법을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더 나아가, 돌봄을 시작하고 지속하는 것뿐 아니라 ‘돌봄 이후’에도 대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돌봄이 끝났다고 모든 게 다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연명 치료 중단을 스스로 결정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죽음 이후 상속된 빚을 막고자 3개월간 서류를 떼러다니며 고생하기도 한다.

 

‘영 케어러’ 논의는 이런 질문들을 곱씹을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새로운 사회적 약자가 등장했고,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 영 케어러는 다양하다. 자조 모임에서는 중증‧만성질환을 앓는 부모나 조부모를 돌보는 청(소)년뿐 아니라, 장애 형제를 둔 비장애 형제, 농인의 자녀로 자라는 코다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다.   ©돌봄청년 자조모임 N인분

 

무엇보다 영 케어러에 대한 인식은 돌봄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 케어러의 문제는 한마디로 영(young)과 케어(care)의 갈등이다. 규범적으로 가장 생산적이여야 한다고 여겨지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케어라는 비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생산가능인구의 손실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재생산보다 생산이 더 우선되는 것은 이제까지 돌봄을 무시해온 핵심적인 맥락이다.

 

영과 케어,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갈등에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돌봄을 아예 하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아니면 돌봄을 하더라도 손해보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이제까지 돌봄은 가장 약자에게 떠넘겨져 왔다. 가정 내에서 여성이 도맡았고, 저임금의 돌봄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며, 이주노동자에게 떠넘겨진다. 영 케어러 또한 이런 성별화된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부분 집안에서 돌봄을 담당하던 여성의 공백을 청소년과 청년을 채우면서 영 케어러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 케어러들을 만나보면 가사와 돌봄을 담당하던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프거나, 이혼 후 어머니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영 케어러는 남성 생계부양자와 여성 가정주부로 구성된 ‘정상가족’ 모델의 한계를 증명한다. 성별 분업의 위기가 곧 영 케어러의 시작인 셈이다.

 

돌봄 시민 되기

 

돌봄을 계속해서 사회의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떠맡게 되면, 돌봄은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돌봄을 하던 사람은 나중에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돌봄을 받지만 돌봄을 하지는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린다. 종국에는 그들만 돌봄을 받게 되는 구조다. 돌봄을 하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이 철저하게 나뉘는 셈이다. 우리에게는 돌봄을 그 누가 하더라도 손해보지 않는 사회가 필요하지 않을까?

 

결국, 모두가 돌봄 역할을 일정 정도 분담해야 한다.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그런 비전을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이라고 불렀다. 모두가 돌봄제공자이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사회를 구성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런 사회는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위계가 해소된다. 그렇게 된다면 돌봄노동자가 저평가될 리 없고, 가정 내 돌봄노동자도 무급일 리 없다. 여성이 독박 돌봄에서 해방될 수 있고, ‘정상가족’ 중심의 돌봄을 벗어나는 길이 열린다.

 

어쩌면 지금 인구 변화와 가족 규모 축소 등이 기회를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세대와 성별을 막론하고 돌봄제공자로 자신을 상상해야 하는 기회 말이다. 청소년과 청년이라고 돌봄에서 멀어질 수 없고, 남성이라고 돌봄을 피해갈 수 없다.

 

이를 위해 돌봄 경험을 더 많이 이야기하자. 돌봄 경험 속에서도 내가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만큼이나 ‘해낸 것’을 찾아내자. 내가 한 돌봄을 평가절하하면서, 사회적 돌봄이 가치 있다고 하는 건 모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한 모든 돌봄이 귀하고 가치 있으며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경험이 공적 세계를 만드는데 어떻게 기입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자.

 

돌봄을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돌봄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감각을 함께 나누자. 돌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돌봄제공자가 되기 전에 느끼는 막막함과 불안함, 두려움은 더 나은 방향을 구상하는 힘으로 삼을 수 있다. 어떤 사회를 구상할 수 있을지, 지금 우리의 위치에서부터 찬찬히 되짚어보자. 우리 모두 돌봄 시민이 되어야 한다.

 

[필자 소개] 조기현.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와 <새파란 돌봄>을 썼고,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를 만들었다. 돌봄청년 자조모임 ‘N인분’을 운영 중이며, 돌봄 경험으로 연결된 시민들과 함께 돌봄을 ‘새 파란’을 일으키려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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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07/02 [10:04] 수정 | 삭제
  • 돌봄을 하면서 슬픔과 함께 기쁨이 있었고, 고통과 더불어 보람을 느꼈고, 상실만큼 배움도 컸다는 건 사실이죠. 소득과 불안정의 문제, 독박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면 돌봄은 좋은 경험이고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경험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사회적 인정도 인정이지만 돌봄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너무 정보가 없는 거. 누구나 돌봄을 받고 컸고 돌봄을 요하는 때가 오는데.. 모두의 문제인데도 어쩜 이렇게 안갈쳐줄 수가 있나. 닥쳐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케어러의 문제도 돌봄 전반으로 바라보는 얘기에 공감을 했고 고마운 마음도 드네요.
  • 교육을걱정하는일인 2022/07/02 [10:00] 수정 | 삭제
  • 초등학생이 어머니 돌봄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학교가 개입해서 직접 도움주지는 못하고 반 아이들 앞에서 효행상을 주다니 한숨이 나옵니다.
  • ㄷㅇㄴ 2022/07/01 [22:53] 수정 | 삭제
  • 돌봄을 모두가 나누면 돌봄이 지금처럼 부담스럽지도 않고 막막하지만도 않겠네요 지금은 이상적으로만 느껴지는데 언젠가는 현실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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