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며 겪은 세 번의 성폭력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여성, 40대, 초임변호사로 산다는 것※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이 된 성폭력과 미투 사건들을 맡아 해결해 온 이은의 변호사의 기록,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날이 갈수록 도장깨기, 초임변호사에게 실무수습이란
2014년 1월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빡 일주일간 변호사 시험을 치르며 시작됐다. 합격자 발표까지는 터울이 길었다. 4월 말이나 되어야 나오는 상황이었다. 막연한 기대와 막막한 공포가 공존하는 날들, 떨어진다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걱정도 밀려왔다. 로스쿨을 사십 대에 진입하면서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시험이 끝나고 졸업도 하고 나니 현실로 다가왔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엄마와 저녁을 먹고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셨다.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났다. 미안함과 아쉬움, 안도감이 밀려오던 그 밤, 그렇게 마흔한 살의 4월이 시작됐다. 시험은 붙었지만 본 게임은 이제 시작이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정식 변호사로서 활동하려면 6개월간 실무수습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만으로도 마흔을 넘긴, 삼성과 직장내 성희롱과 고지 후 불이익 문제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하게 송사를 벌이고, 지방대 로스쿨을 나온 여자였다. 막상 졸업하고 시험을 통과해 변호사가 되었지만 나를 누가 써 줄 것인가는 또 다른 현실의 무게였다. 수습 기간 동안 급여를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 아니, 급여가 있긴 할 건지, 고용이 전제될 건지, 급여도 안 주고 고용도 안 해줘도 괜찮으니 실무수습이나마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머리가 조여왔다.
변호사로서 어떤 포부도 밝힐 수 없었던 불안한 날들
실무수습 문제는 뜻밖의 지점에서 해결됐다. 여기저기 한탄과 걱정을 남겼는데, 삼성과 소송하던 시절 알게된 후 늘 격려해주시던 분의 소개를 받아 면접을 거쳐 실무수습을 할 수 있었다. 로펌에선 실무수습만 시켜줄 수 있고 고용은 어려운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거리였다. 집이 경기도 남쪽인데 사무실 위치가 서울북부지방법원 앞이었다. 지하철로 출퇴근 시간만 왕복 3-4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다. 근처 오피스텔을 알아봤는데 6개월짜리 방을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매주 광주와 서울도 오가던 로스쿨 시절의 경험에 힘입어 집에서 출퇴근하기로 결정했다.
실무수습을 하게 된 로펌은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좋았다. 선임변호사들은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줬고, 물어보면 친절히 알려주었다. 직원들도 내가 수습변호사라고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준비를 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변호사의 업무란 것이 자율적이고 고무줄 같은 것이어서, 기록을 검토하고 서면 초안을 작성하는 것 같은 일들에 얼마의 시간을 쓰고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느냐는 순전히 내 할 탓이었다.
전관 로펌이라 그런지 형사사건이 많았다. 가끔 사무실에 예약 없이 들이닥치는 방문객들과의 상담에 함께 투입되기도 했는데, 학교에서 수험 때문에 배운 지식과 실전 사이에는 차이가 컸다. 변호사실 안에서 자기 일하기 바쁜 선임변호사들에게 일일이 묻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여기 내 책상이 있고 실무수습을 하고 있다는 걸로 족했다.
하지만 내적 갈등은 엉뚱한 데서 왔다. 선임변호사들도 직원들도 너무나 공손하고 나긋하게 나를 ’변호사님‘이라고 불렀다. 아침마다 또래의 직원분이 예쁜 커피잔에 커피를 주고 예쁜 접시에 간식을 챙겨줬다. 한껏 대접해주는 것은 로펌 의뢰인들이나 방문객들도 다르지 않았다. ‘변호사’가 된 후 경험하게 된 한껏 존중받는 일상의 풍경이 불안정한 나의 지위와 상반된 엇박으로 마음 한 편에 공허한 바람을 불러왔다.
일단 변호사가 되긴 했으니 우선 주어진 현실을 열심히 살자고 다잡았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던 50만 원이 교통비 명목으로 통장에 입금됐을 때 멘탈이 쿠크다스처럼 부서졌다. 얼마를 받기로 하고 실무수습을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급여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배려로 결정되었을 돈인데, 막상 통장에 입금된 50만 원을 보니 서럽고 막막했다.
하필 그날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와 약속이 있었다. 약속장소인 종각 앞에는 삼성전자서비스의 노조가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분들이 모여 뒤풀이 자리를 갖고 나를, 내가 변호사가 된 걸 진심으로 축하했다. 누군가 나에게 앞으로 진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반가움과 기대가 공존한 얼굴들을 마주한 채 나는, 이런저런 방향이나 진로를 꿈꾸고 있노라는 변호사로서의 어떤 미래도 말할 수 없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조금 일찍 일어났다. 오랫동안 반올림 활동을 했던 임자운 변호사를 이날 처음 만났고, 종각에서 버스정류장이 있는 종로2가까지 같이 걸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날의 이야기를 편히 나눴지만, 이날 이 길 위에서는 하지 못했다.
실무수습 6개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 동안 수습변호사인 것을 알면서도 나를 믿고 의지하는 의뢰인들이 생겼고, 내게 이런저런 강의를 맡겨준 구청과 학교의 관계자분들도 있었다. 허심탄회하게 사건에 대해, 사람에 대해 자기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여자 선임변호사도 있었다. 실무수습 6개월간 어떤 날은 울었고 어떤 날은 웃으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 부족하지만 세상으로 혼자 나아가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 변호사들의 조언이 필요하던 시기, 그러나
41살이 끝나가는 비혼, 한국에서 삼성과 젠더 문제로 다투며,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며 달려온 ‘여자 변호사’를 누가 고용할지, 누군가 고용은 할 건지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다.
일단 실무수습을 마친 다음 날 언니와 며칠간 마카오에 다녀왔다. 새벽에 도착한 첫날은 구시가지의 낡은 호텔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도착해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방 창문 밖 저편으로 가난한 동네의 지붕들을 쭉 이어진 저 끝에 베네치아 호텔의 호사스런 지붕이 보였다. 언니가 “이 가난한 동네의 저만치 끝에 이어진 궁전이라니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닿기는 할 건지 모를 무지개 같군.”하며 웃었다. 그런 말을 들으며 웃고 떠드는데 마음 저 구석이 단단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내가 나를 고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의 배려로 작은 공간을 마련해 우선은 사업자등록을 하고 임시로 사무실을 열었다. 별다른 투자 없이, 직원 없이, 혼자였다. 그렇지만 이전 실무수습 로펌에 양해를 구하고 나를 따라와 준 의뢰인들도 있었고, 내가 변호사가 된 것을 용케 알고 찾아와준 의뢰인들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매달 일이 생기고 먹고 살아졌다. 연말이 금방 왔고, 이듬해 1월 서초동에 정식으로 사무실을 알아봤다. 처음 나를 고용한 ‘이은의법률사무소’를 개소하고 싶었고, 단독개업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서울중앙지방법원과 검찰청 정문이 마주한 공간의 첫 번째 건물에 터를 잡았다.
그렇지만 개업한 후 줄곧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아는 선배 변호사들에게 귀동냥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 과정에서, 술에 취한 선배 변호사로부터 추행을 겪었다. 나름 존경했던 선배 변호사가 송년회랍시고 남자 소속변호사와 남자 사무장들이 자리한 노래주점으로 불러서는 내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접대부들을 부르고 같이 어울려 놀 것을 종용하는 일도 겪었다.
지금도 맥주를 따라주며 그 선배 변호사가 했던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 “도와주는 분들을 불렀는데, 괜찮죠?”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소위 노래방 도우미를 불렀다는 말인 것 같았다. 맥주를 원샷으로 마시고, 괜찮지 않으니 가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 선배 변호사가 다시 맥주를 따라주며 “괜찮죠?”라고 물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지, 알아들었지만 무시하고 동의를 강요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고, 몹시 당혹스러웠다. 조용히 “안 괜찮다니까요”라고 말하고 나가려는데 맥주 잔이 다시 채워졌다. 그때 ‘눈부신’ 여성 두 명이 홀로 들어왔다. 짧은 원피스에 가득 달린 스팡클이 조명에 반사돼 반짝거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냥 일어나서 나왔다. 심지어 그는 내가 어떤 경로로 변호사가 됐는지를 잘 아는 변호사였다. 모욕감과 수치심을 조절하기 어려웠다.
‘을’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친구 하나가 사업을 하는 선배들이 나를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했고, 개업을 앞둔 나는 누구라도 만나둬야 할 것 같은 ‘을’의 마음이었다.
그 자리에 처음 나간 날, 업무적인 대화보다 ‘예쁘시네요’ 같은 시답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이후 그 사람이 몇 번이나 SNS로 만남을 청해왔다. 내키지 않았지만 ‘개업할 건데’라는 을의 마음이 자꾸 발동했다. 결국 여러 명의 모임 자리로 한 번 더 나갔다. 그 자리가 파하고 헤어지는데 악수를 청해왔다. 손을 잡거나 했으면 피하거나 뿌리쳤을 텐데, 청해온 것이 악수다 보니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악수에 응했는데, 악수를 빙자해 가운데 손가락을 나의 팔목 안쪽으로 뻗어 꾹 누르고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러 명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것도 당혹스러웠는데, 그래서 더 즉각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을 빼려고 애쓰면서 얼굴이 굳어지고 붉어졌다. 이후 친구에게 다시는 같이 만나는 자리에 부르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은, 시작하는 때니까’라는 마음이 컸고 그 마음과 타협했다.
이렇게 변호사가 된 첫 한 해 동안 기억나는 일상의 성폭력이 세 번이나 있었다. 내가 변호사인데, 직장내 성폭력이나 갑질 문제로 삼성하고도 싸우고 나온 사람인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의 자책이 엉켜 마음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런 일 따위와 타협하지 않아도 되게 하루빨리 변호사로 자리잡고 단단해지겠다고. 마음을 꼭 붙들면서도 여성 초임변호사로서 홀로서기가 위태롭고 춥게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필자 소개] 이은의. 2014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후, 서울 서초동 법원검찰청 코앞에 <이은의 법률사무소>를 열고 지금까지 여러 성폭력, 성차별 사건들을 다뤄왔다. 특별한 정의와 굉장한 진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게 처리되는 세상을, 합리적인 사고와 담론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어느새 9년째 말하고 글 쓰며 싸우는 최전방에서 세상을 계속 배워가는 중이다. 저서로 『삼성을 살다』, 『예민해도 괜찮아』, 『불편할 준비』, 『상냥한 폭력들』 등이 있다.
이 기사 좋아요 46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