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시대는 가라, ‘약자생존’ 광장을 열자[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으로의 초대※기획의 말: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이 열립니다. 우리는 사회에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을 비틀고,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약자 생존’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이 광장은 질병, 장애, 성적지향 등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비정상’으로 밀쳐진 모든 존재를 위한 광장입니다. 다른몸들×세바다×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준비하는 <약자생존>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마녀, 유색인종, 동성애자…병리화된 사람들
“흑인 노예들의 탈출은 적절한 의학적 자문과 치료를 통해 예방할 수 있다.”
미국 의사 새뮤얼 카트라이트가 1851년에 한 말이다. 그는 노예 상태인 흑인들이 반복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드라페토매니아(drapetomania)라는 정신병으로 설명했다. 이는 그리스어로 탈출을 의미하는 드라페테스(drapetes)와 광기를 의미하는 마니아(mania)가 합쳐진 말이다. 종속된 삶을 거부하고 자유와 평등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실천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의료권력으로 통제하려고 한 것이다. 드라페토매니아라는 병명이 제시됐던 사회에서 노예해방이라는 주장은 미친 소리, 불온하고 위험한 헛소리, 시기상조인 급진적이고 몽상적 주장으로 취급됐을 것이다.
중세시대 위험한 마녀로 지목되어 희생당한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상당수는 조산사들이자 의료적 지식, 지적인 능력, 저항적 정신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던 피임이나 임신중단기술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억압되지 않게 지원했으나, 흑사병과 빈곤 등으로 노동력 공급이 위기에 처하자 그 기술은 악마화되었다. 이는 여성의 사회적 권력을 파괴하고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며, 새로운 사회 질서에 훈육된 몸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였다.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등으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된 시기, 다양한 약자들을 마녀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처단함으로서 내부를 결집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황당한 현실이 오래전 과거로 끝난 것은 아니다. 동성애는 고대부터 존재해왔으나, 근현대에 들어 제도적 억압이 체계화되었다. 의학에서 ‘반사회적 인격장애’(1952년)라는 질병으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동성애의 원인은 극성맞은 어머니 혹은 뇌 구조의 문제라는 설명들이 등장했다. 동성애라는 ‘질병’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축하며, 전환 치료라는 이름으로 뇌엽절제술, 자궁절제술, 전기충격요법 등이 시행되기도 했다.
아픈 몸, 비정상의 몸, 나쁜 몸?
이처럼 시대와 문화에 따라 인간의 특정 조건이나 행위가 질병이나 장애 혹은 비정상으로 규정되며 통제와 지배의 근거가 되었다. 지배권력은 그 존재들을 배제하고 혐오하며, 훈육하거나 지우고자 했다. ‘전통적’으로 장애로 여겨졌던 영역도 마찬가지다.
수어와 음성언어가 공용어였던 마서즈 비니어드 섬(Martha‘s Vineyard, 미국 매사추세츠주 듀크스 군에 속하는 섬)에서, ‘들리지 않음’은 장애가 아니라 ‘정상’적 차이였다. 그러나 다른 사회에서 들리지 않음은 중증의 장애로서, 도시에서 치워져서 시설에 갇혀야 할 이유가 되었고, 저임금이나 강제노동의 근거가 되었다. 누가 장애인인가는 시대와 문화마다 변화해왔고, 여전히 변화하는 중이다.
지금처럼 ‘생산성과 독립성이 잘 발현되는 인간’을 이상적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상적 노동자’에 부합하지 않는 질병과 장애가 있는 존재들은 정상성의 테두리 바깥으로 적극적으로 밀쳐졌다. 시대마다 체제 유지와 지배권력에 필요한 인간형을 장려하고, 그것에 순응하고 안착한 존재들을 중심으로 ‘정상적 인간’이 구성됐고, 정상이 곧 옳고 좋은 것이 되어갔다. 결국 정상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건강은 스펙이 되었고 질병은 자기관리의 실패가 됐다.
2030여성이 ‘n번방 블루’를 겪는 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현실은 정도만 다를 뿐 여전하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조롱과 비정상의 상징적 말이 있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이중의 낙인을 담은 멸칭이다. 페미니스트는 정신이 고장 나서 치료를 통해 ‘정상’으로 교정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 페미니스트와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 서로를 적대하도록 부추긴다. 특히, 위기에 몰릴 때마다 ‘페미니즘 때리기’로 빠져나가며 혐오의 정치로 먹고 사는 이들은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멸칭에 적극적으로 환호한다. 2020년대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는 흑인이고, 동성애자이고, 마녀이고, 아픈 몸이고, 장애인이다.
사회는 우리가 표준의 반듯한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주변으로 떠밀고, 그렇게 밀쳐진 존재들은 더욱더 ‘정상적’으로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2030여성들의 자살 원인을 우울증 증가로 ‘진단’해서는 안 된다. 강고한 성차별과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가 2030여성들의 정신적 고통과 무망감(hopelessness)을 압도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비단 시스젠더 여성뿐 아니다. 퀴어 혐오 사회에서 다양한 성소수자들 또한 비성소수자에 비해 더 많은 정서적 어려움과 자살 충동을 호소한다.
‘무엇이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새삼 붙잡게 된다.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의 우울증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성폭력 피해자가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일상적으로 고객 폭언에 시달리는 콜센터 노동자의 분노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공장에서 산재로 사망한 동료를 본 노동자의 불안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n번방 기사를 보면서, 오랫동안 극도의 우울과 분노 상태인 n번방 블루를 겪었다는 것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공부에 미치고, 일에 미치라는 시대정신 속에서
또 한편,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강화되고 자기경영이 강조되면서, 공부나 일에 ‘미쳐라’라는 말이 넘쳐나게 됐다. 책이나 강연 제목에 ‘미쳐라’라는 단어가 유행했고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어떤 직장인들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미치도록 영혼을 갈아 넣으며 성과를 내고, 업무를 마칠 즈음엔 몸 곳곳이 아파오지만 병가는커녕 잠시 병원 갈 시간도 없다. 게다가 병원을 들락거리는 게 인사고과에 영향을 줄까 봐, 야근 후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는 경우도 상당하다. 미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시대정신’ 속에서 많은 이들에게 번아웃은 주기적 일상이 되었다. 영혼을 활활 태워가며 살아도 끝없는 고용불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절망하며 ‘미쳐’가고 있다.
‘미치다’의 뜻 중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는 것(고려대한국어대사전)을 의미한다. 정상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미치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강연과 책이 넘친다. 이런 담론은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현실을 은폐하면서, 끊임없이 빈곤과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긴다. 결국 많은 이들은 미라클모닝을 비롯해서 끝없이 노력하고도 자신이 부족해서 성공하지 못한 거라며, 스스로를 책망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분노와 분열감을 느낀다. 이런 현실에서 우울증을 겪고, 죽음의 언저리로 눈길이 향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정상’적 현상에 가깝지 않을까?
미치도록 최선을 다해도 자신이 처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느낄 때, 성별이나 학벌 등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열정과 재능이 지속적으로 배제당할 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삶이 나아질 수 없다고 느낄 때, 좌절한 존재들은 죽음으로 더 쉽게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페미니스트 나혜석, 김명순, 실비아 플라스, 버지니아 울프처럼 말이다.
이 시대의 비정상과 정상은 누구일까
우울증이나 정신병이 나약함과 게으름의 결과라거나, 질병은 자기관리의 실패라는 말들은 비판받아야 한다. 어떤 질병도 완전히 개인적인 것은 없다. 질병의 발병과 치료는 상당 부분 사회적이다.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한 현실은 개인의 몸에 질병이 되어 흐른다. 또한 누군가 나약하고 자기관리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건강이 스펙이고 젊고 건강한 몸이 규범이 되는 사회는 나쁜 사회이다. 거대한 기계의 정교한 부품처럼 전체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사불란하게 배열될 수 있는 존재만 인정받는 사회도 나쁜 사회다.
앞서 강조했듯 ‘정상’은 변화하는 유동적 장이다. 시대마다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변화해왔다. 책 읽기에 몰두하고 글을 쓰는 여자는 생식기에 문제가 생길 거라며 금기시했던 시대, 흑인 여성의 몸이 서커스에서 전시되던 시대(사라 바아트만), 우생학이 법률에 근거해 ‘비정상인’들의 출생을 막고 ‘건강한 인구’ 증가에 열을 올리던 시대, 트렌스젠더를 성주체성장애로 병리화하던 시대를 우리는 지나왔다. 지금 이 시대의 비정상과 정상은 누구일까?
‘정상’과 관련해서,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정신장애인 운동 사례를 보자. 유럽에서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 의해 시작된 ‘목소리 듣기 운동(Hearing Voices Movement)’은 조현병의 주요 증세인 환청에 대해, 재규정한다. 즉 현대의학은 환청을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비정상적 증세’로 규정하고, 약물로 제거되지 않는 환청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목소리 듣기 운동에서는 환청에 대한 탈병리화를 주장하며, 본인이 듣고 있는 목소리가 환청이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되묻는다. 환청이라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본인이 그 ‘목소리’와의 ‘관계’를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들은 의료권력의 일방적 규정과 통제를 넘어 자신들의 목소리로 삶을 재정의하고 있다.
정체성 정치를 넘어, 비정상을 횡단하는 연결의 광장
9월 24일 토요일 오후 2시,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이 열린다. 다른몸들, 세바다, 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준비하는 <약자생존>은 기존 소수자들의 광장과는 조금 다르다. 질병, 장애, 성적지향 등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모인 목소리가 아니라, ‘비정상’이라고 밀쳐지고 배제되는 모든 존재들을 위한 광장이다. 우리도 정상에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결과 정치의 시도다.
페미니즘은 누가 정상이고 표준인가 물으며, 그 범주와 경계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우리에게 비정상이라며 낙인찍는 세상에 묻고자 한다. 우리가 비정상이라면, 당신은 ‘어쩌다’ 정상이 되었나? 당신의 정상성은 완벽하고 지속가능한 것인가? 당신의 정상이라는 지위는 어디로부터 부여된 것이며, 정상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약자생존>은 사회에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게으른 부적응자가 아니라, 이상한 정상의 세계가 우리의 적응을 부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글같은 ‘강자생존’의 세상에 반대하며,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약자생존’의 사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정상으로 승인받지 않아도, 약한 사람이 강해지지 않아도 온전히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정상과 표준에서 밀쳐진 n개의 다른몸들이 서로를 뜨겁게 지지하는 광장을 기대한다. 우리를 ‘교정’하지 않아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가자. <약자생존>은 질병과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압도적 의학권력에 대한 비판의 장이고,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고 혐오함으로써 유지되는 주류 사회에 대한 도전의 장이며, 약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존재들이 서로를 환대하며 세상을 향한 저항을 멈추지 않는 작은 해방구가 될 것이다.
*약자생존 -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저항적 질병서사 워크샵> 신청: https://me2.kr/v0rxs
[필자 소개] 조한진희(반다). 젠더, 질병, 장애, 평화 영역을 넘나드는 활동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연재한 ‘반다의 질병관통기’를 토대로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기획 제작했고, 동료들과 다른몸들에서 질병권 운동을 개척하며 n개의 몸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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