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이 열립니다. 우리는 사회에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을 비틀고,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약자 생존’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이 광장은 질병, 장애, 성적지향 등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비정상’으로 밀쳐진 모든 존재를 위한 광장입니다. 다른몸들×세바다×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준비하는 <약자생존>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신경다양성이란 무엇인가?
신경다양성 지지 모임 ‘세바다’에 들어오기 전, 나는 신경다양성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전에 자폐 특성을 설명한 글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공감은 해도 내가 자폐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신경다양성에 대한 글을 보고 ‘이건 딱 내 얘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신경다양인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신경다양성이란 ‘일반적’, 다른 말로 ‘전형적인’ 형태를 벗어나는 모든 신경 발달의 형태를 가리킨다. 신경다양인은 이러한 특성을 가진 당사자를 말하고, 신경전형인은 ‘전형적인’ 발달 과정을 거친 사람(비장애인)을 일컫는다. 신경다양성의 대표적인 예로 자폐와 읽기장애, ADHD가 있으며, 최근에는 정신장애로 그 개념이 확대되고 있다.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신경다양인은 영유아기에서 양육자와의 애착 형성을 어려워한다거나, 처음 말을 하는 시기가 비장애인 유아에 비해 느린 것 등, 비장애인과 다른 발달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경다양인의 많은 특성 중 하나로 ‘제한된 관심사’를 들 수 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영우가 고래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신경다양인은 저마다의 고유한 흥미를 가지고 있다. 사회성에 대한 다른 감각 역시 주된 특성이다. 사회적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말 혹은 무례한 말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느끼는 감각도 다르다. 신경다양인은 새가 스치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거의 모든 소리를 생생하게 듣기도 한다. 길가를 걸을 때는 낙엽의 잎맥까지, 조약돌의 무늬까지 보인다. 반면 신경전형인보다 감각을 적게 느끼는 당사자도 있다. 자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목소리를 크게 키우다가 제지받는 경우가 생기고, 손의 감각이 없어 키보드를 크게 두드리기도 한다.
신경다양인의 특성은 다양하다. 다시 설명하자면, 신경다양인의 특성은 각자 다르다. 어떤 당사자에게 있는 특성이 다른 당사자에게는 없을 수 있다. 학계에서는 자폐를 ‘자폐 스펙트럼 장애’, 조현병을 ‘조현병 스펙트럼 장애’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들의 특성이 개인마다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나 마치 무지개의 여러 빛깔을 보는 것 같기 때문에 지어진 용어이다.
나는 신경다양인인가?
나는 신경다양인에 대한 묘사의 대부분이 나에게 걸맞다고 생각했다. 그중 하나로 관심사를 들 수 있다. 나는 초등학생 때 휴대전화에 강렬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휴대전화의 모델명과 그 명명 규칙, 스펙을 외우는 것은 기본이었다. TV에 등장하는 휴대폰의 모델명이 무엇인지 맞히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놀이였다. 010 번호 통합 정책의 배경에 관심을 가지고, 삼성 휴대전화와 에버 휴대전화의 자판이 같은 이유와 그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휴대전화의 시스템을 해킹해서 벨소리를 넣는 일도 익숙했다. 이 관심사는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져서, 스마트폰이 도입된 이후로는 스마트폰을 루팅(휴대전화의 최고 권한을 얻는 것)해서 시스템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일을 하곤 했다. 바비 인형이나 자동차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작은 소리를 크고 민감하게 들었다. 컵이 떨어지기 전에 컵이 떨어지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에는 동급생들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크고 무섭게 들려서 담임 선생님께 괴로움을 털어놓았던 기억이 있다. 촉각도 예민했다.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어서 목티를 입을 수 없었다. 발톱을 깎는 느낌이 극도로 이상해서 발톱을 깎을 수 없었다.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라면 안 할 법한 이야기를 한다’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 말은 내가 특이하고 엉뚱하다거나,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무례한 말을 한다는 뜻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집단 따돌림을 겪는 것 역시 일상이었다.
나는 누가 봐도 신경다양인이 맞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경다양인 정체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경다양성 하면 다들 자폐와 ADHD를 떠올리는데, 나는 정신과에 가도 자폐 진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폐 대신에 내가 받은 진단명은 ‘조현형 성격장애(Schizotypal personality disorder)’였다. 조현형 성격장애는 조현병의 약한 특성이 성격처럼 나타나는 정신장애로, ‘별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사회성 등에서 자폐와 특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기 때문에 자폐와 함께 자주 언급되곤 한다.
그 무렵, 나는 신경다양인 모임에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정신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던 중 신경다양인 모임장이 나에게 내가 신경다양인일 수 있다는 말을 해주어서, 용기를 얻어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경다양성을 탐구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정신장애가 신경다양성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신경다양인과 많은 특성이 일치한다. 그러나 나는 자폐나 ADHD 진단을 받지 못했다. 그럼 나의 신경다양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나의 진단명인 조현형 성격장애의 진단 기준을 살펴보았다.
1. 친분 관계를 급작스럽게 불편해하고 인지 및 지각의 왜곡, 행동의 괴이성으로 구별되는 사회적 및 대인관계의 결함의 광범위한 형태 2. 신체적 착각을 포함한 이상한 지각 경험 3. 이상한 생각이나 말을 함 4. 일차 친족 이외에 친한 친구나 측근이 없음 5. 자폐스펙트럼장애의 경과 중 발생한 것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나는 나의 진단명의 특성이 자폐와 비슷하기 때문에 내가 신경다양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더욱 근본적인 사실에 대해 고민했다. 조현형 성격장애가 아닌 다른 정신장애도 신경다양성일 가능성은 없을까?
겉으로 드러나는 특성을 놓고 보면, 자폐와 ADHD, 그리고 다른 정신장애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자폐 당사자와 조현병 당사자는 같은 약을 먹고 있었다. 또 ADHD에서 나타나는 주의력 저하가 기분장애에서도 나타남을 알게 되었다.
신경다양성 활동가들은 신경다양성이 약점만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장점이 있으며,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신의 특성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pride)을 가질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을 구축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울장애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면이 있고, 양극성 장애는 생산성이 좋으며, 조현병은 창의력을 상승시켜주는 장점도 있다. 정신장애의 프라이드(pride) 운동은 ‘매드 프라이드’(Mad Pride)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정신장애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신경다양성을 인정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신경다양인을 지원하지 않게 되면, 신경다양인은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사회적 맥락 파악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회생활, 직업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게 된다. 또 부정적 인생 경험으로 인해 기분의 저하, 자존감의 저하, 긍정적 자기정체감의 상실을 겪게 된다. 현재는 신경다양성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많은 당사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신장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뒤에, 나는 정신장애를 신경다양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신경다양인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나의 정신장애는 더 이상 부끄럽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나 자신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도전할 용기를 얻게 되었고, 신경다양성 단체 ‘세바다’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약자생존: 약 먹는 자가 생존한다?!
세바다에서 한국여성민우회와 ‘다른몸들’과 함께 연대사업을 구상하면서, 나는 정신장애인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장애인은 여전히 차별과 낙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뉴스에서 조현병 당사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기도 한다. ‘F20’, ‘범죄도시 2’와 같은 영화들은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고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정신장애인들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잘못을 하지 않아도 죄인처럼 살아가야 했다.
신경다양성의 측면에서 정신장애를 새롭게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함께 할 행사의 제목을 정하던 도중 ‘약자생존’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신장애인들이 약을 먹으면서 살아가니까 약... 약... 약... 하다가 약자생존이 떠오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리처럼 떠받들어지던 말이 ‘적자생존’이었다. 환경에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의 구절이다. 많은 사람이 이를 ‘강자생존’으로 오해하고 있고, 사회의 절대적인 규율처럼 여기며 약한 사람들을 차별했다. ‘약’을 먹는 정신장애인은 ‘약자(藥者)’였고 ‘약자(弱者)’였다. 그러한 억압과 폭력의 관계를 뒤집어서 약을 먹는 사람들도, 약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정신장애인에게 약물이란,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삶의 동반자이기도 하고, 강제입원으로 대표되는 화학적 구속과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한 약을 성소수자, 여성, 청소년, 노동자, 다른 유형의 장애인 등 다른 소수자와 사회 전체의 의제로 확장시키고 싶어서 기획한 것이 <약 헤는 날> 전시이다. 약물의 자리에 소수자 정체성과 연대를 상징하는 모형을 넣어서, 이러한 정체성과 연대가 우리를 울고 웃고 움직이게 하는 ‘약’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두가 그러한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9월 24일 토요일 오후 2시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열릴 ‘약자생존’ 본 행사에서, <약 헤는 날> 부스에 여러 개의 모형이 전시될 것이다. 그 중에 무지개를 고른 사람들은 성소수자이거나 관련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장미를 고른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를 상징하는 ‘빵과 장미’를 떠올릴 것이다. 나뭇잎을 고른 사람들은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에 관한 트라우마를 공유할 것이한다. <약 헤는 날>의 캔버스는 수많은 삶의 궤적과 문제의식이 모인 다양성의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정신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약 먹었니?’라는 말을 욕으로 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정신장애가 무슨 정체성이 될 수 있냐, 어떻게 자부심(pride)을 가질 수 있느냐, 정신병에 걸린 것이 자랑이냐고 묻는다.
나는 신경다양성의 이름으로 말한다. 정신장애 역시 존중받아야 할 다양성이라고. 정신장애인들은 저마다의 서사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다른 신경다양인들처럼 장점을 살려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정신장애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정신장애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정체성이 될 수 있다고. 사회가 정신장애를 부끄럽지 않게 대우할 때까지, 약자생존의 정신은 유효할 것이다.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약자생존> 카카오같이가치 응원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draisings/98987
[필자 소개] 리얼리즘: 세바다 대표. 신경다양성 지지모임 세바다에서 ‘대표 일꾼’으로 일하고 있다. 정신장애인의 삶과 권리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있다. 정신장애인과 신경다양인, 특히 미등록 장애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칼럼을 쓰고 있다. 현재는 발달장애인과 더불어 다른 소수자와의 새로운 연대를 꿈꾸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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