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이 열립니다. 우리는 사회에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을 비틀고,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약자 생존’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이 광장은 질병, 장애, 성적지향 등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비정상’으로 밀쳐진 모든 존재를 위한 광장입니다. 다른몸들×세바다×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준비하는 〈약자생존〉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공황장애 진단 4년차, 좀더 빨리 병원에 갔더라면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지 4년이 되었다. 주 증상은 심장의 부정기적인 떨림, 빈맥, 숨 막힘, 작은 에피소드도 재난처럼 느끼는 재앙적 사고, 12시간이 넘도록 자는 과수면 등이다. 병원을 가게 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만약 내가 10년 전에 병식(病識, Insight,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있고 병원을 다녔다면 지금쯤 꽤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간혹 복기해본다.
내가 병원에 가지 않은(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이 정도 증상으로 이름부터도 무거운 정신과에 가는 것은 과하다. 정신과는 더 심각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둘째, 증상이 있다가 없어졌다가 하기 때문에 괜찮아질 수 있다. 셋째, 주로 신체적 증상이기 때문에 몸에 다른 이상이 있어서 이런 것이다. 넷째, 강박, 우울, 불안 등은 누군가 해결해 줄 수 없는, 평생 안고 가야 할 내 문제다.
네 가지 이유의 공통 전제는 “정신과는 심각한 정신병자가 가는 곳이기 때문에 나와 상관이 없다”는 생각과, “정신질환과 신체질환은 다르다”는 확신이다. 내 막연한 생각 안에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응축되어 있었다.
정신질환에 부여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병원의 문턱이 높아진 것은 아닐까, 개인들의 의지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정신질환이 있는 것을 약점이나 수치심으로 느끼는 이유는 뭘까. 뒤늦게 병원을 찾은 이후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당사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자조, 연대의 커뮤니티 〈페미정신〉
한국여성민우회는 매해 다양한 주제의 소모임을 연다. 나는 작년 9월부터 11월 초까지 정신질환자 페미니스트 모임 〈페미정신〉의 진행을 담당했다. 페미정신이라는 모임 이름은 페미니스트이면서 정신질환자인 이들을 뜻하는 동시에 취약성, 약자성을 자원으로 삼는 ‘페미니즘 정신’의 약칭이다.
낯선 사람들이 만나서 병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하나, 조금 어색할까 했던 우려와 달리 〈페미정신〉 첫 만남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의,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병증. 고마웠던 의료인. 혹은 무례했던 의료인. 병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 가족력을 찾아서. 지금도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일상. 누군가에겐 너무나 쉬워 보이는 일들이 왜 나에게는 어려울까 질문하던 새벽. 병을 인지하게 된 계기….
이날 모임에서 리단의 책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가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병식은 단순히 ‘나는 병이 있습니다’ 하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다. 병식은 병을 인정하고, 이 병을 관리하는 패턴을 만들며, 병적 상태에서 자신의 행위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나는 병이 있다’라고 생각하기만 하는 ‘병식 없는’ 환자 A와 병식이 있는 환자 B는 똑같이 조증이 와도 그 사고와 행동이 다를 것이다.〉 -리단,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41p
〈“병을 학습하고 병에 대응하는 것만이 병식이 아니었다. 병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을 넘어 중요한 것은 일상의 태도가 바뀌는 것이었다. 약 복용이 다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우울증은 허공에 주먹질하는 기분이다. 게으름인지 우울증 때문인지가 항상 헷갈린다.”, “우울증 환자들이 하는 자살 충동 경험이나 죽고 싶다는 말을 불안이 강한 사람이 들으면 공황 증상이 오기도 한다.” “어떨 때는 이게 병 때문인지, 기분 때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페미정신 모임 후기 중, http://womenlink.or.kr/member_activities/23934
〈페미정신〉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나에겐 어렵지 않았던 주제가 어떤 이에겐 매우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배우게 되는 그 지점이 정신질환의 경험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 명이 그간의 질병 경험을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가 얼마나 길든, 이야기의 인과가 길을 잃든, 끝까지 듣는 분위기가 있었다. 누구도 의아해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러니까 나도 그랬다.
신기했던 점은 사람들이 병증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눌 때 나도 존중받는 기분을 느꼈다는 점이다. 꼭 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취약성이 자원이 되는 공간, 정상성을 욕망하지 않는 장소, 그곳이 여기였다.
괜찮아 정(신)병이야, 사실 안 괜찮아
〈페미정신〉 모임에서 우리는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포스터 문구와 같이, 정신질환에 대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 질환 경험의 어려움을 다소 축소한다든지, tvN 〈알쓸범잡2〉 프로그램 타이틀 ‘조현병 범죄’처럼 다른 사회적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정신질환 문제로 회피하면서 질환을 왜곡하는 현상에 대해 비판했다. 이야기 말미에는 정신질환을 범죄로 연결시키는 언론에 대한 분노가 그득했다.
우리끼리 만나는 모임을 넘어서 더 많은 페미니스트와 연결하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모임 구성원들과 웹포스터 만들기, 행사 사회, 사진 찍기, 간식 준비, 사전 홍보물 부착까지 세세하게 역할을 나눴다. 2021년 11월 25일, 〈괜찮아 정(신)병이야, 사실 안 괜찮아〉라는 제목의 이어말하기 행사를 열었다.
ADHD, 우울증, 불안장애, 조현병,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조울증 당사자들 20여 명이 참석해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로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헉, 제가 왜 울죠?” 하면서 울먹이기도 하고, 이렇게 웃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웃기도 했다.(원래 슬플 때 웃을 준비가 더 되어 있다.) 행사가 끝나고 참여자들이 오픈 카톡방에 남겨준 후기도 주옥같다.
“저는 오늘 모든 말들마다 사이사이 침묵의 순간들마다 마음이 엄청 울렸어요. 내 얘긴데!! 하는 부분 너무 많고요.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페미/정병이란 키워드로 모여서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적 같고 소중했어요. 그리고 빻음이 뭔지 레즈가 뭔지 설명할 필요 없고 정병혐오 걱정 없는 상쾌함… 안전한 공간 열어주신 페미정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려요. 말하기에 나서주신 분들과 자리에 함께 있던 분들 다 마음으로 꼭 안아주고 싶었답니다.(마음으로만요ㅎ) 다들 안녕히 귀가하시길 바랍니다.”(매일)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니까 이런 곳에 살면서 아픈 게 어쩌면 건강한 반응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아프고 지칠 때, 아파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상담이 도움 됐지만, 항상 자신이 변화해야 하고 이런 세상이지만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게 싫었어요. 저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이 무력감은 나아질 리 없을 것 같아요. 도른(?) 페미 동지들도 비슷한 마음이실 거라 생각해요.”(선율)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를 미워하느라 정작 나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로서는 스스로를 어여삐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ㅎㅎ... 저도 각자의 못난 부분, 아픈 부분, 취약한 부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나아질 수 있었어요. 나를 피해자로만 생각하면 외부의 요인에만 분노하거나 대응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게 되니까 상담쌤이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싶네요.... 저도 상담 가면 자기연민에 대해 한번 물어봐야겠어요!”(좌절하는 라이언)
불안이 온몸을 휘감을 때의 질식감을 나는 안다. 오랜 시간 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의 행동에 관대할 수도 있다. 내가 겪은 시간에 누군가를 비추는 능력이 생겼다고나 할까. 정신질환이 감기 정도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아마 오랜 시간 가져가야 할, 관리하며 약을 복용해야 하는 질병이다. ‘왜 내가…’란 생각을 할 때가 좀 지나서 나에게 정신질환이 있다고 말하게 되면서, 많은 이들에게서 자신도 약하며 불안하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게 까마득하고 타인은 절대 이해 못할 두려움이 있다는 고백을 듣기도 했다.
이어말하기를 하며 나는 내 병이 내 재능의 단면이기도 하다는 것, 정신병을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을 깨닫는 게 얼마나 아프고 어려운지 안다고 고백했다. 10년만에 병원에서 병을 진단받고 돌아오는 골목에서 정신병에 대한 사회의 수많은 낙인과 편견을 내 안에서 발견했다고. 우리가 페미니즘을 만난 그 순간처럼.
약자가 생존해야 모두가 산다
2021년 OECD 가입국 중 한국의 자살율이 다시 1위에 올랐다. 자살은 한국인의 사망 원인 중 5위를 차지했다. 20대 여성 자살률이 2017년에 비해 16.5% 증가했으며 우울증 유병률도 코로나19 전후로 OECD 국가 중 1위로 집계되었다. 이 정도면 한국은 정신건강 전담 정부 부처가 만들어져도 어색하지 않은 나라다.
이런 상황인데 정신질환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 무지도 강하다. 악순환의 고리다. 언론은 정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기도 한다. 지금도 ‘조현병 범죄’라고 검색하면 수십 개의 기사가 뜬다. 국내 전체 범죄에서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은 0.1% 수준이며, 일반인의 4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또한 실제 조현병 환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초기 치료의 미비, 약물 치료까지 가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병 자체가 범죄의 원인일 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에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을 비틀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강자생존’의 세상을 넘어,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약자생존’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약자생존〉, http://womenlink.or.kr/notices/24500
9월 24일 토요일, 〈약자생존〉 행사에서 정신질환이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를 환영하며 광장을 채우는 광경을 상상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미쳐 있음’이 서로, 그리고 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드러낼 것이다.
약자생존 행사 중 ‘나를 미치게 하는 것들’을 모아서 전시하는 참여 프로그램이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의 늪’, ‘여전히 성착취 영상물이 거래되는 현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내 성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상황’, ‘정신질환 치료를 지지하지 않는 가족들’, ‘직장 상사의 교묘한 괴롭힘’, ‘악화되는 기후위기’… 정신질환이나 정신질환이 있는 당사자를 문제적 존재로 지목하던 사회가 정말로 문제시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 될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여서 논리적이어야 하는데, 내가 정신질환이 있으면 말에 두서가 없어지고 감정이 둔해지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던 〈페미정신〉 구성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페미니즘은 단지 언어적 능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누가 약자인지를 이해하는 능력, 감정, 실천력과 큰 연관성이 있다. 분노는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의 욕설들은 여자, 장애인, 정신질환자, 퀴어 등을 지칭하곤 한다. 이 욕설을 받고 있는 얼굴들과 연대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무력한 약자로 남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약자성을 연결하는 힘을 갖게 된다.
페미니스트인데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의 가해자와 병명이 같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던 친구의 질문을 듣고,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가 해야 한다.
[필자 소개] 꼬깜.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어제 안경을 벗다가 난 눈 밑 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쓰라림, 따가움, 작은 상처 같은 것들로 시작되는 연대의 가치를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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