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이 열립니다. 우리는 사회에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을 비틀고,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약자 생존’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이 광장은 질병, 장애, 성적지향 등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비정상’으로 밀쳐진 모든 존재를 위한 광장입니다. 다른몸들×세바다×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준비하는 〈약자생존〉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세상이 홀로 남겨둔 당신을 나는 만나고 싶습니다
바람 이야기 할까요. 세상의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 없이 숨 쉬고 있는 바람 얘기 말이에요. 당신이 지난 밤 속삭였던 그 언어들에도 묻어 있는 미약하던 바람. 저는 그 바람이 빗방울조차 가벼이 안고 폭풍우가 되어 온몸을 적시는 것을 느꼈어요. 우산도 가려주지 못하도록 거세게 몸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나무들조차 꺾이던 검은 밤의 염려가 있었어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세상을 이리 아프게 할퀴고 지나가는 걸까. 낮은 곳에 모여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더 혹독한 그 아픔은 왜 매해 되풀이되고 눈물은 쉼 없이 흐르는 걸까. 알 수 없었죠. 가난이 스스로의 아픔을 떨치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만 싶었어요.
당신 안에 고인 빗방울처럼 숨겨져 있던 이야기. 당신은 울었고 그것만으로 저는 좋았어요. 눈물조차 지워지게 무표정한 얼굴의 당신을 오래 보아왔기에. 당신 안에 아직도 물결치는 것들이 있다는 게 좋았죠. 바위에 닿는 빗방울들이 바위를 어둡게 하며 젖는다는 것이, 아직 당신이 어두워질 수 있다는 게, 그 어두움의 순간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좋기만 했습니다. 그건 시작일 수 있어서요. 밀려드는 것들을 분간하며, 다시 당신의 가슴으로 푸른 물결이 부딪혀 당신이 띄운 배가 아침이면 흰 돛을 달고 눈부시게 흐를 수 있다는 신호였기에 그랬어요.
바위 안에는 물결무늬가 있다는 거 당신 아세요?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면 깊은 바다의 바닥에 닿았던 생물들이 뭍으로 드러나고 그 깊이에서 잠겼던 그것들을 사람들은 아주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요. 우리의 생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아요. 당신의 하루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죠. 당신의 절망과 당신의 좌절과 당신의 무기력을, 당신의 길고 긴 잠을 그 누구도 감싸주지 않아요. 당신은 홀로 외롭게 세상에 와서 홀로 외롭게 꿈꾸다가 홀로 외롭게 저물어 갈 목숨에 불과하죠. 세상이라는 캔버스에는 당신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배면에 숨어서 자신만이 아는 고통 속에서 힘없이 스러질 숨결에 불과해요. 잔인한 현실은 그게 당신의 삶이라고 말하네요. 그래요. 그런데 당신, 정말 그런가요? 바다의 푸른 수면 아래로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당신이 아름답다는 말, 제가 했던가요? 당신의 절규가 잔별들처럼 어두움을 피 흘리게 한다는 것을, 해저의 용암처럼 굳고 있다는 것을요. 선홍색으로, 당신이 아름다웠기에 장미처럼 가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아직도 품고 있는 순수가 목울대에 맺힌 핏방울처럼 소리치게 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세상과 쉽게 타협하고 그 일부로 녹아들어 불의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들과 당신이 달랐기에, 당신은 길을 잃었으나 당신 자신마저 잃은 것은 아니어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당신의 순수를 지키느라 손목을 긋기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 순수를 살해하기 위해 세상은 시퍼렇게 살아 있고 그 거대한 세상이라는 거리에서 당신은 주소지를 잃어 우리가 열어둔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지 못합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짐이었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당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요. 절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요. 당신이 홀로 듣는 목소리와 홀로 보는 모습들과 홀로 느끼는 것들과 홀로 사로잡혀 있는 생각들이, 그저 이상했다고. 그래서 당신을 홀로 남겨 두었다고. 그래서 세상의 거리에서 지우고 가축처럼 몰아넣어 당신의 의지와 미래와 연인들을 앗아갔다고. 그건 정당한 일이며 세상이 자신의 잉여를 지우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었다고.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모습을 오래 바라봅니다. 꽃과 물과 숨은 하나여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물이 마르면 꽃잎은 바스러지고 말지요. 꽃잎이 내는 젖어 있는 피부가 잉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꽃은 새벽녘 차갑게 맺힌 이슬로 인해서 아름다워지고 꽃은 이슬의 무게를 무거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어서 저기 먼 곳을 떠돌다 온 당신이 투명하게 나의 속까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먼 꿈을 헤매던 내가 당신을 만나 비로소 세상에서 몸을 입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어느 미약하던 생들이 동그랗게 뭉쳐 물방울 하나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모이게 했던 것은 눈으로 볼 수조차 없었던 세상의 먼지 한 톨. 그 가볍고 덧없던 것들이 우리를 만나게 합니다. 구름이 먼지 한 톨의 주위로 몰려든 습기를 타고 희게 하늘로 흐르듯 우리도 저 드넓은 하늘을 흐를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날이 어쩌면 오늘일까요. 아니라면 내일이나 아주 오랜 후여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당신을 만나고 말테니까요. 끝없이 당신을 부르는 이 간곡한 노래로 말입니다.
여기, 변방으로 밀려난 삶들이 광장을 엽니다
갇히고 가로막혔던 삶들이 광장을 엽니다. 이 이해할 수 없이 폭력적인 세상의 변방에서. 밀려나고 밀려나던 삶들이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자고 세상을 견딥니다. 세상에서 줄기를 내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자고, 품어 줄 그늘 많은 숲을 만들자고 합니다. 잎이 만드는 그늘에서 보는 어룽대는 햇살을 눈빛에 부드럽게 담아주자 합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죽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나무 밑에 그 이름을 묻고 나무가 커가듯 사라진 죽음이 세상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보자고 합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숨은 어제 죽은 그/녀의 숨을 잇댄 것입니다. 폭력의 역사가 길다면 그것에 저항한 우리의 역사도 유구합니다. 세상은 천국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다만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의 노고가 빛날 뿐입니다. 낮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물길과 같이 슬픔이 차오르는 그곳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될 뿐입니다. 가장 버림받고 상처 받기 쉬운 연약한 삶에서부터 시작되는 고통의 연대가 세상을 살리는 마중물이 되어 줄 뿐입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곳곳에 포진해 있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당신의 영혼은 어른거립니다. 처음 당신을 넘어지게 했던 것이 사랑이었으므로 딱딱한 죽음의 외피에서조차 물기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당신, 그토록 고통받으며 키우고 있던 것이 죽음이라는 나무였나요. 삶과 하나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살며 먼저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지. 삶의 근원에 자리잡은 무상과 무의미에 잠긴 나무가 무성히 당신의 방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하루가 지나면 다르게 건설되어 있는 세상의 저 쉼 없는 생산이 사실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른 가치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을 죽음을 살며 끝없이 일깨우고 있던 것은 아니었나요.
콘크리트 같은 영혼을 가진 저 높은 담 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살도록 해요. 우리는 다치기 쉬운 연약한 피부만을 가진 맨발의 사람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합니다. 흉내내지 못하는 그 사랑은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어요. 그 사랑은 함께 하는 이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과 같아 당신은 곧 그 비밀을 깨우칠 수 있겠죠. 잠 못 이루는 긴긴 밤과 흩어지기만 하던 한낮의 깊은 우울이 빛이 되는 그 기쁨의 비밀을 말이에요. 상처를 간직한다는 것이 선물이 되어 돌아오는 하루하루가 빛과 위로 속에 흰 구름처럼 흐르는 푸른 하늘에 잠겨서요.
이제 나는 나의 목소리를 찾습니다. 나에게 익숙한 당신의 목소리로 수만 가지의 꽃을 틔워내고 싶어요. 세상에는 한없이 낯설 그 꽃들은 당신으로부터 옵니다. 당신이라는 그늘 아래로 가만히 빛이 닿고 그 밑에 풀씨들처럼 흩어져 있는 나는 당신의 주변에서 낮게 피어납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그만 꽃을 무수히 달고 있는 그 언어들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요. 절규와 핏방울과 신음 소리 가득한 그 아름다움을. 무기력과 끝없는 졸음과 가망 없는 무감각으로 굳어 가던 그 아름다움을. 한 그루 나무가 크는 것 같던 그 조용함을. 그 조용하던 살해를 피워낼 것입니다.
우리 같이 이야기할까요. 당신이 하고 싶었으나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던 이야기를. 끝없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희망의 단조로운 이야기들을. 알려진 희망, 그것의 바깥을 꿈꾸지 못하게 하던 잔인하던 지옥의 이야기들을. 당신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던 막막하던 세상의 끝 이야기를.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아버린 차가웠던 해리의 날들을. 더 이상 당신 안에 당신이 남아 있지 않던 그 슬펐던 이야기를.
씨앗은 자신을 피워내고는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꽃과 잎은 남아 있어요. 당신이 사라진 자리에 있던 그 잡히지 않던 꽃과 잎을 만져 봅니다. 얼마나 수없는 당신이 그렇게 허공 중에 자신을 새기고는 숨결을 놓곤 했을지 나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 피 흘리는 역사가 있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도래하는 순간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써야 합니다. 그럴 때 허공은 조용히 울기 시작할 것입니다. 격렬하게 어깨를 떨며 돌아와야 할 눈물이 흐르게 할 것입니다. 빼앗겼던 삶이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뜨거운 눈물로 우리는 상실한 것들을 불러낼 것입니다. 다시 온몸이 되게 할 것입니다. 온몸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숲의 그늘이 깊다는 것은 하나의 비밀. 그리고 우리의 역사도 깊습니다. 이제 당신과 나는 이곳에 도착했을 뿐이지만 먼저 도착해 숲을 이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녀들의 눈물과 아픔들로 숲은 커갑니다. 그 눈물과 아픔이 초혼하듯 당신과 나를 불러냈습니다. 바다의 거센 비바람을 맞는 해송숲처럼 밀려오는 삶의 파고를 견뎌내라고 푸르게 서 있습니다. 이곳에 씨앗으로 움터 세상이 주었던 몰이해와 고립과 조롱들을 게워내듯 뿌리 내려 꽃으로 피워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날 선 것들을 연약하고 부드러운 살결로 되살려낸다면 좋겠습니다. 숨 쉬고 소통하는 몸으로 무한한 가까운 언어로 우리가 번져갈 수 있는 아름다움을 노래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영혼과 좌절과 절망들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진정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숲처럼 다정한 지붕을 우산처럼 서로의 머리 위로 드리우기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햇빛을 바라볼 때 손가락으로 차양을 만들 듯이, 그럴 때 손가락은 잎처럼 빛을 가려 어룽지는 풍경을 보여주듯이.
세상에는 눈물의 강이 흐르고 그 강물을 가슴에 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 위로 돋을 볕은 언제나 뜨겁고 눈부십니다. 아주 천천히 오는 그 빛은 어쩌면 긴 밤, 달빛으로 가득했을 빛. 밤비 소리로 가만히 깊어갔을 어느 추운 가을날의 미약하던 빛. 강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빗방울이 더 깊이 젖어들어 가는 지금은 어느 때일까요. 당신과 내가 만날 그날을 약속으로 남겨 두고 싶습니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나고 싶은 당신은 일 년이 되고 긴 긴 날이 흘러도 나의 세상에 번져 있을 약속일 테니까요. 사랑한다는 그 말도, 언젠가는 당신에게 하게 될까요. 내가 잔별들로 태어나고 있을 즈음에는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앓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사랑하게 해 줄까요. 세상 전체를 이고서 힘겹게 틔우던 당신의 말. 세상의 무게만을 무겁고 고독하게 느낄 뿐 곁을 찾지 못한 당신에게로 가는 무수한 발걸음이, 함께 그 짐을 지는 어깨가 우리를 사랑하게 해 주지는 않을까요. 당신, 당신처럼 연약한 것을 언제나 사랑하고 있기를. 우리의 피부가 찢어지던 순간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기를. 부드럽고 상처 입기 쉬운 모든 것들의 안녕을 언제나 바라고 있기를. 그렇게 낮은 곳에서 함께 물길을 맞기를.
우리가 미친 채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함을 앎이므로 우리 영원히 낫지 않기를. 다만 서로의 가슴을 가만히 여며주기를. 바람 속에 너무 오래 두었던 흰 빨래를 이제는 걷을 때이므로. 나의 아기가 상한 울음에 젖어 울고 있으므로 보드랍게 마른 빨래로 그 젖은 몸을 닦아주어야 할 때. 바람 냄새 나는 빨래에 코를 묻고 그 바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필자 소개] 목우. 정신장애 동료상담가. 조현이 꿈의 발목을 가만히 감싸쥐는 중력처럼 길 위를 걷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스물여섯 해 조현의 삶을 살고 있다. 다른몸들 산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 출연했다. 공저로 <질병과 함께 춤을>(푸른숲),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오월의봄),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미디어일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동아시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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