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플 권리, 약자가 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약자생존] 밀려나고 억압된 몸들이 광장으로 나와 춤출 때※기획의 말: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이 열립니다. 우리는 사회에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을 비틀고, 약한 사람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약자 생존’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이 광장은 질병, 장애, 성적지향 등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비정상’으로 밀쳐진 모든 존재를 위한 광장입니다. 다른몸들×세바다×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으로 준비하는 〈약자생존〉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건강권이 아니고 질병권?!
지난 몇 년간 치열하게 ‘잘 아플 권리’(질병권)에 대해 주장해왔다. 질병권은 오랜 투병 생활 이후에도 회복될 수 없는 아픈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생각하게 된 아이디어였다. 건강한 사람의 눈으로 나의 아픈 몸을 보며 좌절하고 비극의 시나리오를 쓰는 것을 멈추자 그곳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개념이다. 아픈 사람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제시하게 된 게, 질병권이었다.
질병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연극을 만들거나, 거리의 광장에서 피켓을 들기도 했다. 오랫동안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질병권이라는 말에 위로와 안도감을 느꼈다는 이들부터, 건강권이 아닌 질병권이라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는 놀란 표정까지 다양한 반응을 만났다. 물론 아파서 민폐인 사람들이 권리까지 요구한다며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는 질병권에 적극적인 반응이었다.
질병권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인간의 취약성’이다. 의료화된 현대사회가 분절시킨 생로병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경험하는 늙고, 아프고, 죽게 되는 과정을 모두 ‘극복’해야 할 것으로만 만든 현실을 문제시한다. 안티에이징을 강조하며 비대한 산업으로 만들고, 질병에 걸린 것은 자기관리의 실패이며, 죽지 않고 영원히 젊은 몸으로 남아 있길 원하는 사회가 ‘아픈 몸을 비극’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해왔다.
동시에 질병권은 건강권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초점을 이동시킨 개념이다. 그간 세계보건기구(WHO)나 진보적 보건의료운동 등에서도 건강은 선, 질병은 악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건강불평등 해소와 의학의 발전을 통해 ‘무한한 건강’을 말해왔던 것 같다. 그러나 질병권에서는 이 시대에 우리가 ‘무한한 성장’ 추구에 의문을 던지듯, ‘무한한 건강’ 추구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한히 노동할 수 있는 젊고 건강한 몸만을 찬양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에 더해, 무한한 건강추구가 과연 우리가 꿈꾸는 미래여야 하는지 질문한다.
어떻게 하면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할까
어쨌거나 질병권은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젊고 건강한 몸이 아닌, 아픈 몸을 기본값으로 할 때 우리가 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누구나 아파도 괜찮고,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질병권 운동을 주요한 의제 중 하나로 삼고 있는 〈다른몸들〉에서 동료들과 ‘어떻게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 수시로 토론한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은 돌봄 문제다. 지금처럼 부실하고 불평등한 돌봄 현실에서는 도무지 잘 아플 권리가 보장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1인가구라서, 여성(엄마, 딸)이라서, 가난해서...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은 우리의 잘 아플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게다가 팬데믹에서 수없이 보았듯 질병이나 장애로 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적절한 돌봄이 제공되지 않음으로써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주변화되었던 ‘돌봄’이 어느 때보다 사회적 관심을 받기 시작해서 반가웠으나, 제한적 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서로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지우고, 돌봄을 노화나 질병, 장애 등으로 인한 특수한 욕구로 보는 시선이 변화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돌봄 문제를 사회서비스로서만 축소해서 보는 경향도 다분하다.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돌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돌봄 받고 돌보는 존재에 대한 다양한 접근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를테면 적극적 돌봄이 필요할수록 약자화된다. 중증의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인해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약자화되는 것은 필연이기만 할까?
또한 현재 우리는 누군가를 돌볼수록 ‘약자화’되는 현실을 살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비혼 여성들이 질병이나 노화를 겪는 가족구성원을 돌보는 것으로 보인다. 돌봄노동을 하느라 경력단절이 발생하고, 노년기에 이르면 제대로 된 연금을 수령하기 어려운 현실에 처하기도 한다. 그리고 야근을 해야 성과를 낼 수 있고 인사고과를 잘 받는 현실에서, 퇴근 이후 어린 자녀를 돌봐야하는 이들은 사회적 ‘성공’이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게다가 정부는 여성고용을 촉진하고 워킹맘들의 고충을 줄이겠다며 ‘외국인 가사 도우미’ 도입을 위해 법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겠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여성 ‘내부’를 위계화하고, 소위 빈곤 국가의 돌봄 공백을 증가시키면서 세계적 돌봄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돌봄의 고통을 저렴하게 전가하는 ‘대안’이 아니다. 돌봄의 가치가 존중받고 돌봄의 기쁨이 복원되는 사회다. 그래서 누구나 돌봄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즐겁게 나누는 사회다.
①무엇이 당신을 약자로 만드는가
〈다른몸들〉에서는 돌볼수록 취약해지고, 돌봄 문제를 서비스 문제로 축소해버리며, 돌봄이 점점 불평등으로 나아가는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 돌봄 강좌를 진행했다.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적극적 돌봄이 필요한 이들, 다양한 영역의 활동가, 연구자들이 돌봄을 여러 각도로 접근했는데. 그 내용이 지난달 책으로 출간됐다. 『돌봄이 돌보는 세계』라는 제목의 책인데, 부제가 바로 우리의 핵심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취약함을 가능성으로 공존을 향한 새로운 질서’.
나는 『돌봄이 돌보는 세계』에 이런 말을 썼다.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말은 재사유되어야 한다. (중략) 보호는 통제를 동반한다. 보호 담론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상’에서 비켜난 모든 몸들을 약자화하는 현실을 문제화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그 너머를 질문해야 한다. 어떤 조건이 특정 존재를 약자로 만드는가? 약자를 약자로 만들지 않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돌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취약성과 소수자 정치에 관한 것이다.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에도 적확히 적용된다. 〈약자생존〉은 이 사회에서 약자로 밀쳐지고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모두를 위한 광장으로 기획되었다. 동시에 무엇이 우리를 약자화하고 비정상화하는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광장이다.
〈약자생존〉에는 다양한 사전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를 약자화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을 시민들과 함께 포착하며 해석해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저항적 질병서사 워크샵’을 진행했다. 저항적 질병 서사란, 질병을 건강관리 실패로 보며 질병 극복으로 삶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주류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안적 서사다. 워크샵을 마무리할 때, 선천성 심장질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참여자가 소감을 들려주었다.
그는 돌봄의 상당 부분을 맡은 어머니와 갈등이 많았고, 차라리 내가 죽는 게 효도가 아닐까 생각할 만큼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워크샵을 통해 어머니의 생애를 복기해 보게 되었고, 자신의 어머니이기 전에 다양한 고통을 지닌 존재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사회적으로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부여되는 역할과 책임 그리고 제도로서의 돌봄의 부재 등이, 한 여성의 삶을 어떻게 힘겹고 뒤틀리게 만드는지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알다시피 돌봄은 아름답고 찬란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갈등하고 좌절하고 흐르고 냄새나고 괴롭고 보람되고 기쁜, 그 모든 것이 돌봄 안에 들어있다. 우리가 회복할 수 없는 아픈 몸으로 이 사회에 존재할 때, 온전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의 상당 부분은 돌봄의 조건과 질에 의해 좌우된다.
②무엇이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
또 다른 사전 참여프로그램인 ‘나를 미치게 하는 것들’에 한 시민은 이런 의견을 보내왔다.
“건강 등의 이유로 수급권자인데, 사회의 편견과 복지제도의 문제 그리고 공무원 갑질이 나를 미치게 한다. 수급자는 거의 누더기 옷을 입고, 밝으면 안 되고, 자기주장을 잘하면 안 되고 똑똑해도 안 된다. 그러면 수급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니 미치겠다. 탈수급하고 싶지만 건강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이 모자라고, 돈은 그만치 못 버는 현실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만든다.
나는 저 의견을 이렇게 해석했다. 빈곤을 만드는 불평등한 구조는 조금도 손대지 않고, 아픈 몸을 가진 노동자를 용납하지 않고 노동의 경로를 열어주지 않으면서, 시혜적이고 잔여적 복지가 빈곤한 사람을 ‘미치게’ 하고 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아픈 몸을 가진 노동자를 어느 기업에서 환영하겠냐고 되물을 수 있겠다. 그런데 통상 장애를 가진 노동자도 기업에서 환영하지 않는다. 환영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차별이나 배제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것은 이윤을 생산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의존하며 서로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약자생존〉은 각자 약하고 비정상적인 몸이나 상태를 ‘극복’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평등하게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동시에 무엇이 우리를 취약한 존재로 만드는지 묻는다. 팬데믹이나 기후위기 앞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는 만큼 적극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넘어서고자 한다. 지금의 능력주의, 개발주의, 성차별주의, 건강중심주의, 종차별적 인간중심주의 등의 사회구조가 특정 존재를 끊임없이 약자화하고 있다고 외친다. 이런 구조가 차별과 억압의 세계, 팬데믹과 기후위기를 불렀다고 말이다.
③무엇이 여성을 폭력의 피해자로 만드는가
최근 신당역 살인 사건을 보며, 무엇이 여성을 폭력 앞에서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지 묻게 된다. 여성이 성폭력을 비롯한 다양한 폭력에 취약한 것은 성염색체라든가 몸의 특성과는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스토킹이나 데이트폭력, 성폭력 등 젠더 기반 폭력은 끊이지 않으며,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여성이다. 구조적 성차별이 여성을 취약한 존재로 만든다.
여성을 약자로 만드는 현실에 분노를 담아 〈약자생존〉 광장에 신당역 살인 사건 피해자를 위한 추모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의 저항과 날 선 애도만이 더 이상의 죽음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우리’를 취약한 존재로 만드는 이 구조를 하나씩 부숴버리자!
한편 많은 이들이 신당역 살인 사건을 보며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무엇이 변했냐며 절망한다. 그렇다,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결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라고 고백했던 현실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진 게 아니라, 아직 이기지 못한 것일 뿐’이라는 말을 상기해보자.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처럼, 우리는 이 길고 지난한 싸움을 이길 때까지 지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지난한 싸움을 분노와 슬픔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해나갈 것이다. 〈약자생존> 광장에는 약하고 비정상인 존재들의 날 서고 유쾌한 이야기로 꽉 채워질 것이다. 비정상인 우리에게 쓸모를 입증하라고 한다면, 저항이 우리의 쓸모라고 호탕하게 말하며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광장에는 차별금지법을 노래한 싱어송라이터 이랑,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의 공연도 준비되어 있다. 우리의 분노와 슬픔, 저항과 변화의 의지를 노래와 구호에 실어 외칠 것이다. 약자가 강자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 우리를 약자화하며 피해자로 만드는 세상을 향해, 바로 지금 이곳 〈약자생존〉 광장에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싸우자.
[필자 소개] 조한진희(반다). 젠더, 질병, 장애, 평화 영역을 넘나드는 활동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연재한 ‘반다의 질병관통기’를 토대로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기획 제작했고, 동료들과 ‘다른몸들’에서 질병권 운동을 개척하며 n개의 몸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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