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인 퀴어 페미니스트로서 한국 생활의 스냅샷들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차별금지법이 필요합니다”

김현숙 | 기사입력 2022/09/29 [09:48]

입양인 퀴어 페미니스트로서 한국 생활의 스냅샷들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차별금지법이 필요합니다”

김현숙 | 입력 : 2022/09/29 [09:48]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2015년 봄, 대한민국 서울 잠실동, 택시 안

 

2014년에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미국에서 자란 나는 이제까지 두세 번 정도밖에 택시를 타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택시를 타는 즐거움과 불쾌함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었다. 장점 -가격이 싼(편)! 엄청 빠르다! 택시 기사님께 빨리 가주세요! 서울역에서 10시 30분 기차 타야돼요! 라고 하면 택시 기사님은 마치 아침 드라마 속에 한 장면처럼 엄청난 속도로 밟는다. 그런 순간들에서 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와 교통법규를 조금은 느슨하게 지키는 택시 기사님께 감사한다.

 

유일한 단점이라고 한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기사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질문을 받게 되는 것인데,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그것마저 한국어를 연습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잠실에 있는 친구 집에서 이화여대 앞에 있던 내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외국인이야?” 택시 기사님은 출발하면서 질문을 시작했다.

 

“아니오, 한국사람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기사님이 그 질문을 하는 이유가 내 방식의 한국어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질문을 꽤 자주 들어왔고, 비교적 익숙한 편이었다.

 

“뭐? 외국인야? 어디서 왔어?” 기사님은 확인하듯 재차 질문했다.

 

“아니오, 한국사람입니다,” 더 정확하고 천천히 다시 대답했다. 어쩌면 내 말하기 속도가 아저씨에게는 조금 빨랐는지도 모른다.

 

아저씨는 백미러로 내 얼굴을 쓱 쳐다보면서. “한국 사람 아닌데? 외국 사람이구만. 어디서 왔어요?”

 

“저는 한국사람입니다. 저는 입양인입니다,” 나는 대답 대신 설명했다. 그때 나는 매일 하루에 네 시간씩 한국어학당에 다니고 있었다. 어학당의 커리큘럼은 아쉽게도 입양 산업을 낯선 사람에게 설명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입양인'이라는 단어를 다른 입양인 활동가 친구에게 배워뒀었다. 나는 기사님에게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인에 대해 좀 알려주고싶다는 생각에 ‘입양인'이라고 말해보기로 했다.

 

“입 양 인,” 이번에는 더 크고 천천히 다시 대답해줬다. 한국어를 쓰는 많은 사람이 이 단어를 모르거나 쓰려하지 않지만, 입양인들은 ‘입양인’이라는 말로 우리 스스로를 오랫동안 지칭해왔다. 어떤 사람들을 우리가 어린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입양아’라고 하거나, 좀 더 격식 있어 보이기 위해 ‘입양아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을 붙이면 존댓말이라도 되는 듯이.

 

“거 입양이 됐어도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말을 해야지! 거참 한국말 한번 잘~하네!” 아저씨가 대답했다.

 

앗싸! 한국어 교과서에서 들어본 표현이 드디어 나왔다. 지난주에 수업 시간에서 배운 바로 그 표현이다. -사람들이 내 한국어에 대해서 코멘트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에 대한 바로 그 표현.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벨기에에서 온 백인 남자랑 연습했던 바로 그 대화! 새로 배운 이 표현을 실제 생활에서 써 볼 완벽한 기회가 드디어 왔다.

 

“잘하기는요,”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기사님은 꽤 오랫동안 백미러로 나를 쳐다봤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예! 오늘도 한국어 실력이 업그레이드 됐다! 이제 한국 사람 다 됐네.

 

▲ 2018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난민 환영 집회에 참여했다. ©김현숙

 

2017년 겨울, 대한민국 경기도 안양시, 엄마와의 대화

 

일요일 오후 12시 롯데백화점 푸드코트 앞에서 나는 엄마와 만났다. 엄마는 이복동생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나를 만나기 위해 교회에서 몰래 조금 일찍 빠져나왔다. 엄마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정색으로 빼 입고선 카멜색의 긴 울코트를 걸쳐 입고 있었다. 엄마는 단발머리 스타일에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눈썹 문신을 하셨다. 엄마는 나와 비교도 안 될만큼 세련돼 보인다. 이날을 위해 나는 제일 잘 어울리는 청바지를 입고, 늘 신고 다니는 크록스 대신 하얀 운동화도 신고 나갔다.

 

“살쪘네,” 그리고, “뭐 좀 먹자.”

 

푸드코트에서 돈까스를 받아서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엄마는 돈까스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고 내가 돈까스를 먹는 걸 쳐다보기만 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엄마의 시선은 어색하게 느껴지고, 그 시선을 받으며 돈까스 먹기는 어렵다. 우리가 다시 만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이 없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는, 내 한국어 실력이 최근에서야 파파고를 통하거나 제스처로 바디랭귀지를 하는 것이 아닌 진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도 나에 대해서 비슷하게 생각할까?

 

“질문 있어요.” 잘게 썰어진 양배추와 샐러드 드레싱을 섞으면서 나는 대화를 시작했다. “제 아빠에 대해 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어떤 분이셨어요?” 이 질문이 엄마에게 있어 갑작스럽고 민감한 영역에 있는 걸 알기에 나는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지난번에 문자로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 엄마는 문자의 답장도, 몇 개월 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 눈썹을 불태울 것처럼 쳐다봤다. “모른다.” 답한다. “그 사람 이름도, 얼굴도, 나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 엄마의 눈은 두 번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눈빛을 받아치면서 다시 시도해본다. “아빠 고향은요? 나이는…?”

 

“모른다고.” 엄마는 다그치듯이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안 적도 없고.”

 

그 대답이 거짓말인 줄 알고 있지만,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상견례도 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기에, 엄마가 나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정보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삶이 임신, 파혼, 출산, 입양, 나를 보내고 난 후에 아픔과 트라우마로 가득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엄마와 나는 블랙홀의 각각 양 끝에 서서, 우리 둘 모두에게 비슷한 이유와 다른 이유들로 인해, 누가 먼저 감히 거기로 뛰어들건지 서로를 지켜본다.

 

나는 엄마의 시선을 무시하고 식사를 이어갔다.

 

“나는 몰랐었어.” 엄마는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아무도 나한테 얘기해준 적이 없었어. 내가 너를 혼자 키울 수 있는지 몰랐어. 한 사람이라도 나한테 혼자라도 애를 키울 수 있다고 말해줬으면 나는 너를 키웠을 거다.” 마치 고해하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니 동생들, 내가 걔들 아빠 없이 키웠어. 내가 혼자 키웠다고. 지금은 나도 알지, 혼자서도 애들 키울 수 있는 거. 근데 그때는 아무도 나한테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 없어. 전부 다 나한테 너를 보내버려야 한다고 했어. 그러면 안 됐는데, 그때는 몰랐지.” 엄마의 목소리엔 메스꺼움이 섞여 있지만 이번엔 나를 향한 감정이 아닌 것을 안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애쓰며, “몰랐잖아요,” 대답했다.

 

2018 가을,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퀴어들의 축제

 

행사 전날 밤, 우리 다섯 명, 세 명의 입양된 한국인과 두 명의 입양되지 않은 한국인, 모두 퀴어들은 광주로 향하는 은색 현대 렌트카 차량을 타고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광주에 도착한 몇 시간 후 우리는 5.18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광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광주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퀴어들의 무리 속에 섞여 들었다.

 

▲ 2018년 광주 퀴어문화축제 행진 모습. ©김현숙

 

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펜스 앞으로 모여든 우리들로, 공간은 서로에 대한 친근함과 압도적인 에너지로 채워졌다. 기업의 스폰서 광고나 길게 늘어선 행진 차량도 없었다. 그저 수백 명의 퀴어들, 많은 10대들이었고, 각자 깃발과 직접 만든 표지판 그리고 무지개 깃발을 든 채 광장을 메웠다.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하라’고 쓰인 표지판과 한국입양인참여연대 깃발을 풀어 긴 장대에 묶어 들었다. 행진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서 있는 우리들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어머! 저도 동물 입양에 찬성하는 사람이에요! 저도 강아지 입양하려고 하거든요!” 잠시 혼란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 잠깐 헷갈렸지만, 곧 우리가 입양된 한국 사람들이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강아지랑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입양이 가난한 가정과 미혼모의 자녀들이 부자의 집으로, 백인들의 가정으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옮겨지는 불공정을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제도라고 설명하려고 했다. 소란스러운 군중들 속에서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란 쉽지 않다. 입양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사회와 복지제도가 지켜내는 것에 실패한 결과라고, 우리가 소리 지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입양인 활동 단체에서 홈메이드로 만든 브로셔를 건넨다. 서로 알아들은 듯하다. 화이팅!!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소리치며 주먹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서로 이 정도만큼은 이해한 것 같다. 마주 서서 미소를 교환하니 출입구가 열렸고 깃발을 높게 들고, 출발!

 

2022년 여름,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파트너의 어머니

 

어느 금요일 오후, 7년을 함께 한 내 파트너와 그의 어머니와 나는 함께 시내에 있는,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어머니께서 운영 중인 마사지 샵을 방문했다. 마사지샵은 서면에 자리한 조용한 5층짜리 건물의 2층에 있었다. 우리는 입구에 서서 각자 신은 크록스와 진홍색 등산화를 일제히 어피치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솔직히 말하면 파트너의 어머니에게 별 설명 없이 간 자리였기에, 우리 커플과 어머니 모두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조금 긴장되었다.

 

▲ 성소수자 부모모임 회원이 운영하는 마사지 샵에 파트너와 나, 파트너의 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다. ©김현숙

 

마사지 샵을 운영하는 성소수자부부모임의 회원님께 미리 전화해서 ‘어떻게 하면 파트너의 어머니도 성소수자부모모임에 나가게 만들 것인지’ 우리끼리 입을 맞췄지만, 파트너의 어머니에게는 일언반구 하지 않고 모셔갔다. 파트너의 어머니는 드러내서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난 7여년간 아주 천천히 당신의 자녀가 퀴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혐오세력도, 앨라이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쯤에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함께한 7여년간의 시간 동안 파트너의 어머니는 당신의 자녀가 퀴어라는 사실에 대한 많은 대화들(혹은 대화 같은 말싸움)을 파트너와 가졌고, 당신이 아무리 기다려도 파트너는 이성애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되셨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머니의 “게이들은 죽어도 된다!”라고 하던 의견이 “(모든) 게이가 다 죽어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바뀌어 가는 신기한 장면들을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회원인 다른 부모님을 소개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일이었기에, 파트너와 나는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우리 넷—나, 내 파트너, 파트너의 어머니, 그리고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회원인 사장님—은 사장님이 미리 준비해두신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인 테이블을 사이로 마주하고 앉았다. “사장님 엄청 유명한 분이세요!” 내 파트너는 어머니가 최근에 사장님이 출연한 다큐멘터리인 〈너에게 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맞나?” 어머니는 대답했다. 관심을 보이셨다. (어머니의 희망 사항 중 하나는 유명해져서 TV 출연을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스테비아 토마토를 입에 넣으며 “뭐를 하셨어예?” 라고 물었다.

 

두 어머니는 당신들과 당신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장님은 능숙하게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대화 속에 집어넣으시면서, 솜씨 좋게 아로마 테라피와 페이셜 케어에 대해 이야기 하시면서도 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 설명했다. 내 파트너가 전화를 받으러 잠시 밖으로 나간 후 파트너의 어머니는 병상에 계신 시어머니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전신 아로마테라피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마사지를 거절하고 대신 마사지실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딸기와 사과를 집어먹으면서 마사지실에서 들리는 두 여성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마사지 오일이 발라진 피부의 마찰음과 세상을 바꾸는 사회운동을 만들어 나가는 활동에 대한 대화가 토막 토막 들려왔다. 찰싹! “손님들 오면 제가 그래 말을 해예, ‘우리 아들이 게입니다!’” 촤악! “그라면서 —찰싹— “차별금지법이 필요합니다!” 촤악! 촤악! “손님들한테도 따라하라고 해예.” 사장님이 나체인 파트너의 어머니를 마사지 테이블 위에서 뒤집는 소리가 들린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그날 저녁, 파트너의 어머니에게 마사지 샵 방문이 어땠는지 묻는다. “마사지 좋드라.” 그리고 “다음 주에 또 가볼라고.”

 

[필자 소개] 김현숙. 미국에서 자랐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퀴어 한국입양인 활동가. 현재 문화인류학 석사과정 중에 있다. 풍물, 퀴어, 강아지, 먹거리에 관심 있다. “늘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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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1 [14:11] 수정 | 삭제
  • 입양인들 중에서 바다 건너 와서 어머니를 찾게되는 경우가 드문데... 모녀가 만나게 된 것 축하드려요. 두분의 대화가 좀 슬펐는데, 파트너의 어머니 얘기를 읽고 앞으로 더 좋은 날들이 펼쳐지겠구나 싶어 다행이에요.
  • 써니텐 2022/09/30 [10:58] 수정 | 삭제
  • 마사지숍 안에 들어가있는 것처럼 리얼~ 두근두근하기까지 했당... 글이 넘 흥미진진 매력이 통통 튀네요
  • 푸른 2022/09/29 [16:56] 수정 | 삭제
  • 부산에 그 마사지샵에 엄마랑 같이 가보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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