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 출신 난민여성들의 ‘먹고살기 전략’

[이주 배경 청년의 목소리] 한국에 온 이주민, 난민들과 만나며(下)

강슬기 | 기사입력 2022/10/13 [19:56]

아프리카 대륙 출신 난민여성들의 ‘먹고살기 전략’

[이주 배경 청년의 목소리] 한국에 온 이주민, 난민들과 만나며(下)

강슬기 | 입력 : 2022/10/13 [19:56]

※국제결혼 가정이나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청(소)년들, 아동 청소년 시기에 중도 입국한 청년 등 다양한 이주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 담론 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주 배경 청년 당사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직접 들어봅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나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필리핀으로 이주하여 대학교를 마친 후, 나 자신이 이주노동자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했고, 지금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에게 ‘이주’는 특별한 것이 아닌, 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이주가 내 삶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내가 이주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14년 11월 전까지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해외 현장에 파견되어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한국 사회에서 내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마침 당시에 이주민센터 의정부EXODUS에서 함께 할 기회가 생겨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주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상담과 의료상담을 진행했다. 그러다 2016년에 센터에서 시작한 난민아동 지원사업을 통해 난민가정을 만나면서 ‘난민’을 알아가게 되었다.

 

동두천에서 만난,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난민여성들

 

내가 활동하는 동두천 지역의 등록외국인 현황은 3,300명 정도로, 외국인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경기 남부의 안산, 시흥, 화성 등 3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주요 외국인주민 집중 거주 지역의 난민 거주 비율이 안산의 경우 3%, 시흥 1%, 화성 2%인 반면, 내가 활동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난민의 비율은 17%에 달한다는 것이다. 경기도 31개 시, 군 중에서 난민 거주 비율이 가장 높고, 그 중 80%가 아프리카 대륙 출신이다.

 

동두천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대륙 출신 난민들의 경우 대부분 난민신청자, 출국기한 유예자, 미등록체류자 등으로 체류가 불안정하며 거주가 안전하지 않다. 이들을 지원하는 거버넌스나 제도 역시 부재하다.

 

이들의 노동의 권리에 대해 살펴보면, 인도적 체류 허가자와 난민신청자는 원칙적으로 취업활동을 할 수 없는 체류자격인 G-1비자(기타비자)를 받는다. 취업을 하려면 별도의 ‘취업활동 허가’가 필요하다. 인도적 체류 허가자는 포괄적 체류자격 외 활동 허가를 받아 비전문직종에서 취업할 수 있다. 허가는 체류기간 상한 1년 범위 내에서 주어지며, 사업장 지정 없이 자유롭게 취업할 수 있다.

 

난민신청자는 난민인정을 신청한 후 6개월이 경과했거나, 6개월이 경과하지 않았지만 장애 등으로 근로 능력이 없는 피부양자를 부양해야 하거나, 기타 사무소장 등이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체류자격 외 활동 허가를 받아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용주로부터 선고용이 되어야만 법무부로부터 취업활동 허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취업이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미등록체류자와 거의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출국기한 유예자는 취업 활동을 할 수 없다.

 

체류자격이 취약할수록 점점 더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 사회에서 경제활동인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 빈곤층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난민의 법적 지위 인정과 보호에 있어서 제도적으로 너무나 미흡하기 때문에, 난민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법제화 방안과 인권 사안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형 속에서 난민의 이미지는 정책의 대상자로서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되기 쉽다. 즉, 이들이 독자적인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전체 난민 중 20%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성인 남성이 주가 되어 난민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본국의 종교나 관습으로 여성의 인권이 고려되지 않는 배경을 지닌 경우, 난민여성의 실태를 드러내기가 더욱 어려운 현실이다. 아프리카 난민 커뮤니티 내에서도 아프리카 출신 난민여성들은 난민-인종-젠더가 결합되어 다층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프리카 난민여성들이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경제적 조건 속에서 어떤 삶의 전략을 취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이들의 노동 경험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전혀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이 여성들은 불안정한 체류 자격과 경제활동의 제약 속에서도 스스로 노동의 기회를 찾거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 머리 땋기 기술을 가진 난민여성이 운영하는 미용실 모습.   ©강슬기

 

머리 땋기 기술을 가진 라이베리아 출신 오펠리아씨

 

라이베리아 출신으로, 출국기한 유예 상태에서 난민신청 중인 오펠리아씨는 2009년 남편과 함께 국내 입국했다. 오펠리아씨는 본국에서 머리 땋기를 배웠고 미용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한국에서 오펠리아씨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일을 해오다, 2012년 드디어 자신의 미용실을 오픈했다. 처음에는 건물 주인으로부터 임대를 거절당하기도 했고, 거울 하나와 사무 의자 하나를 두고 시작했다.

 

2019년 즈음 시청에서 직원이 찾아와 미용실 등록을 해야 한다며, 등록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경고했다. 오펠리아씨는 미용실 등록을 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미용사 자격증을 들고 시청을 찾아갔다. 하지만 한국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고, 시청은 오펠리아씨에게 미용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을 안내했다. 오펠리아씨는 대학교를 찾아갔지만, 대학 측은 오펠리아씨가 갖고 있는 머리 땋기라는 미용기술을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사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애초에 오펠리아씨의 체류자격으로는 입학 자체가 불가능했다.

 

오펠리아씨는 미용실 문을 열지 못했고, 생계를 위해 예약손님이 잡히면 자신의 집에서 미용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미용실은 거의 문을 닫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오펠리아씨는 공장 아르바이트 일을 찾아야 했다.

 

머리 땋기 기술을 가진 아프리카 난민여성들은 꽤 있지만, 오펠리아씨처럼 미용실을 운영하는 여성은 많지 않고 운영도 쉽지 않다. 미용실을 갖고 있는 아프리카 여성들은 머리 땋기 기술을 가진 다른 아프리카 여성들의 연락망을 갖고서, 함께 작업해야 할 때 파트타임으로 이들을 부르기도 한다. 파트타이머 여성들과 함께 손님 한 명의 머리를 같이 작업할 경우, 보통 네 등분으로 나누어 작업한다. 한 파트를 마무리할 경우 2만 원 정도를 받는다.

 

오펠리아씨는 코로나19로 인해 몇 년 간 미용실을 운영하지 못하고 밀린 월세가 몇 달째 쌓이며 공간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4월, 사업장을 운영해온 것을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알게 되면서,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벌금 500만 원을 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오펠리아씨는 이미 본국에서 취득한 미용사 자격증과 미용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미용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불법사업장을 운영한 난민이 되었고, 자신의 기술을 살리지 못한 채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는 불안정한 체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1년 전, 오펠리아씨와 아이 네 명을 두고 홀로 본국으로 귀국했다.

 

▲ 서아프리카 대륙 출신의 난민여성이 운영하는 식당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식당과 판매점이 위치한 거리 모습. ©강슬기

 

서아프리카 식당을 개소한 쉐리프씨

 

역시 라이베리아 출신의 인도적 체류 허가자인 쉐리프씨는 2012년 딸과 함께 국내 입국했다. 입국하자마자 쉐리프씨는 유엔난민기구를 찾아갔고, 거기서 난민을 지원하는 기관을 소개받아 난민인정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쉐리프씨는 난민인정을 신청한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딸을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만 했다. 모녀를 도와주던 한 교회에서 비밀리에 과자제조공장 일자리를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일한 지 2개월만에 쉐리프씨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6개월을 기다리기로 하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후에도 일자리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일자리를 구했어도 언어 문제로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매주 주간과 야간 교대 업무를 해야 했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신경 쓰지 않는 사업주의 태도에, 3주를 일하고 그만두었다. 지인들의 연결로 다시 공장 일을 찾을 수 있었지만, 2년 반 정도 일했을 때 허리통증이 심해져 그만둬야 했다. 이후에도 쉐리프씨는 건강 문제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쉐리프씨의 딸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딸을 통해서 인도적 체류 허가자의 가족으로서 쉐리프씨도 체류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쉐리프씨는 서아프리카 식당을 오픈했지만, 자신의 체류자격으로는 식당 등록을 할 수 없었다. 식당을 열고 1년 후에 첫째 딸이 성인이 되면서, 딸의 이름으로 식당을 등록했다. 사실 쉐리프씨가 식당을 열게 된 배경에는, 일을 하지 않는 남편도 한 몫했다. 남편은 일을 할 경우에도 돈 한 푼 가정경제에 보태지 않았다.

 

쉐리프씨가 운영하는 식당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아프리카 사람들로, 식당은 이들에게 고향과도 같은 공간을 제공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겹치면서 쉐리프씨는 식당 문을 닫아야 했다. 본국에서 베이커리를 운영했던 쉐리프씨는 한국에서도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의 베이커리를 운영하며 다른 난민여성들에게 베이킹 수업을 하는 것이 목표이다.

 

2살 막내 포함 다섯 자녀의 생계 책임지는 은고지씨

 

나이지리아 출신의 난민 불인정자 은고지씨는 매주 수요일부터 금요일 아침에 2살 된 막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는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로 출근한다. 일찍 끝나는 날에는 오후 3시 정도, 늦게 끝나는 날에는 저녁 9시에 집으로 돌아온다.

 

▲ 난민여성이 운영하는 중고의류 창고 모습. ©강슬기

 

은고지씨가 하는 업무는 중고의류 창고에서 옷을 분류하는 작업이다. 옷 종류에 따라 무게 별로 금액이 다른데, 기본 100kg에 2만~3만원 정도 받으며, 하루에 하는 작업 분량은 500~800kg 정도다. 작업량이 많아 하루에 수입이 많을 때는 20만 원까지도 번 적이 있다. 하지만 하루에 6만~8만 원도 벌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취업이 불가한 체류 상태에서 남편이 체류기간이 만료되어 본국으로 귀국한 이후, 은고지씨는 한국에서 홀로 자녀 다섯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이 일로는 생계비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지만, 이제 2살인 막내와 초등학생 3명, 중학생 1명의 등교 시간을 챙기려면 출퇴근이 그나마 자유로운 중고의류 분류작업이 현재 은고지씨 상황에서는 최적의 업무인 것이다. 은고지씨는 막내가 더 크면 안정적인 공장으로 이직할 계획을 갖고 있다.

 

냉장고 하나 규모의 식료품 판매를 하는 이페오마씨

 

나이지리아 출신 이페오마씨는 난민 불인정 판정을 받고 미등록 체류 상태가 되었다. 남편도 미등록 체류 상태로, 부부 모두 안정적으로 노동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페오마씨의 남편은 아르바이트로 일이 있는 날에만 노동한다.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이페오마씨는 구멍가게라고 불리기에는 규모가 매우 작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을 상대로 집에서 아프리카 식료품을 판매하고 있다. 판매 식료품은 냉장고 하나의 규모다.

 

나이지리아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해 아프리카의 말린 음식들을 받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판매한다. 냉동실에는 한국 마트에서 산 아프리카 사람들이 먹는 생선들도 있다. 생선 3개가 들어있는 한 박스를 마트에서 1만 원에 구매하여 생선 한 피스에 1만 원씩 팔아 2만 원의 수익을 낸다.

 

아프리카 커뮤니티에서 세례식, 장례식 등의 행사가 있을 때에 이페오마씨에게 요리를 주문한다. 가게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알음알음 커뮤니티 사람들이 이페오마씨의 집을 찾아온다.

 

이처럼 내가 만난 난민여성들은 노동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조건 속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만의 전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미용, 요리 등 여성에게 특화된 노동을 주로 하면서, 반복되는 경제적 빈곤 속에서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삶의 전략을 짜내며 주체적으로 살아가지만, 인종과 젠더 그리고 난민이라는 특수성은 피할 수 없는 한계로 작동하고 있다. 난민여성들은 사회문화·경제적으로 제한을 받는 환경 속에서, 피해자 혹은 대상으로만 머물기를 거부한 채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기사에 나오는 난민여성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필자 소개] 강슬기.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한국인인지 필리핀인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어느 날 문득 한낱 지구인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이제, 우주인으로 넓혀야 하는지 고민 중이다. kendi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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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3/11/10 [00:14] 수정 | 삭제
  • 나가주라 필리핀인지 한국인인지 정체성 혼란 갖지말고 나가 외노자 이민자 한국을 지옥으로 만드는 유럽 폭동 꼴나는 시한폭탄인데 나가라 한국민은 호구가 아니다 더 이상 밟히지 않고 민초가 들고 일어날 것이다
  • 동정은 그만 2023/01/30 [21:44] 수정 | 삭제
  • 아프리카인들의 무책임성. 이 기사에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투덜대면서 애들은 4명,5명씩 낳는 배짱은 뭐지? 남편과 같이 돌아갔어야지. 이런 사람들까지 한국과 한국인들이 세금으로 도와줘야한다고? 왜? 한두명 불쌍하다고 도와주기 시작하고,법개정을 하면 수만명이 몰려올텐데. 이게 인간세상의 모습이지. 동정심도 함부로 베풀면 사태만 악화될 뿐.
  • 베리 2022/10/14 [18:28] 수정 | 삭제
  • 어떤 집단으로만 뭉뚱그려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난민이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얘기에 공감합니다. 짧은 사연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볼 수 있어서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이분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자녀들은 또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궁금합니다. 한국은 난민 인정 거의 안해주는 국가로 악명이 높은데, 전쟁난민도 많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문을 좀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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