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섹스, 결혼 없는 무성애자의 ‘가족-되기’

드라마 시리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박주연 | 기사입력 2022/11/08 [17:01]

연애, 섹스, 결혼 없는 무성애자의 ‘가족-되기’

드라마 시리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박주연 | 입력 : 2022/11/08 [17:01]

사촌 동생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결혼식에 가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아득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일이 생겨 결혼식엔 불참하게 됐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에게 이성애 대잔치의 끝판왕인 결혼식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거기다 결혼식에 모인 온갖 친인척들이 나에게 연애와 결혼에 대해 물을 걸 생각하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이성애) 연애와 결혼에 집착하는 걸까? 아, 맞다.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 사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성소수자 친구들과 만나면 연애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가 많다.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친구에겐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텐데’라며 괜한 걱정을 내비치고, 그 친구가 외로울 것이라 쉽게 단정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야 하니까’라며, 모두가 연애를 원할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 이성애가 아니라 하더라도 연애 중심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마침내 이를 자각하게 된 건, 가까운 친구의 ‘무성애자’ 커밍아웃과 그의 신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였다. 지금의 내 세계가 가진 한계,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들여다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득, 무성애자 이야기를 다룬 일본 드라마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 일본 드라마 시리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포스터 ©NHK

 

공영 방송에서 방영된 성소수자 이야기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恋せぬふたり, 2022)은 일본 공영 방송 NHK에서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방송된 드라마 시리즈다. “밤 드라마”(よるドラ)로 편성되어, 조금 늦은 시간인 밤 10시 45분부터 방송되긴 했지만, 성소수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NHK에서 방영되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더 궁금해졌다.

 

극본을 쓴 건 요시다 에리카로, 국내에선 BL(Boy’s Love) 작품으로 꽤 많이 알려져 있는 만화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30歳まで童貞だと魔法使いになれるらしい, 줄여서 ‘체리마호’로 불림) 드라마 버전의 작가이기도 하다. 요시다 에리카는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으로 매년 우수한 드라마 각본을 선정하는 ‘무코우다 쿠니코 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 작품은 NPO 방송비평간담회 TV부문 특별상도 수상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시청할 수 있음)에 대해 기대만큼 걱정이 앞섰다. 성소수자 캐릭터와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가 이전과 달리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오히려 편견과 오해를 가중시키는 이야기로 구성되거나, 성소수자 캐릭터가 소모적으로 혹은 타자화되는데 그치기도 하니까. 과연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궁금함과 경계심을 동시에 품은 채 시청을 시작했다.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엔 ‘마루마루 슈퍼’ 영업기획부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코다마 사쿠코(키시이 유키노 역)와 ‘마루마루 슈퍼’ 점포에서 야채판매담당 직원으로 일하는 30대 남성 타카하시 사토루(타카하시 잇세이 역)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업기획부 내 사쿠코의 후배가 기획한 캠페인 ‘사랑하는 OO’의 현장 상황을 확인하러 간 슈퍼에서 사쿠코와 사토루는 처음 만나게 된다.

 

사쿠코는 후배의 기획을 칭찬하던 부장이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야”라고 말하자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토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어떤 로맨틱한 가능성을 담은 관심이 아니라, 무언갈 발견했다는 호기심으로서의 관심.

 

이후 사쿠코는 뜻하지 않았던 후배의 고백 사건과, 절친 치즈루와의 동거가 불발된 후 다시금 ‘연애’,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고민하던 사쿠코는 인터넷에서 “연애하지 않는다 모르겠다 이상하다”를 검색한다. 그리곤 ‘날개빛 양배추의 에이로 일기’라는 블로그에서 한 문구를 발견한다. “에이로(에이로맨틱) 에이섹(에이섹슈얼)의 지식에 관계 없이, 연애하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말하는 쪽이 이상하다. 연애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에이로(Aromantic)와 에이섹(Asexual)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게 된 사쿠코는 그 단어의 의미를 찾는 것과 함께, ‘날개빛 양배추의 에이로 일기’ 블로그에 빠져들게 된다. 마치 자신의 경험인 것 같은 이야기에 공감하며.

 

그러던 중, 다시 슈퍼에서 사토루와 재회한 사쿠코는 날개빛 양배추가 바로 사토루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으로 이제 막 정체화하기 시작한 사쿠코와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으로 정체화하고 여러 경험을 해 온 사토루는 함께 “(임시)가족”이 되어보기로 한다.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족이 되는 건 누구일까?

 

사쿠코와 사토루가 “(임시)가족”이 되기로 한 이유는 두 사람 모두 혼자됨, 외로움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사토루와 만나, 에이섹슈얼‧에이로맨틱으로서의 자신을 알게 됐지만 아직 ‘각오’를 하진 못했다고 고백하는 사쿠코는 “연애하지 않는다는 건 아마 혼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거잖아요.”라고 말한다. “혼자인 건 좋아하지 않아서”, “앞으로 계속 혼자서 살아가는 건가 생각하면 견딜 수 없게 외로우니까” 에이섹슈얼·에이로맨틱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거다. 무성애자,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이라고 하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여겨져 혼자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회적 편견은 사쿠코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일본 Aro/Ace 단체 ‘As Loop’의 2020년 〈에이로맨틱/에이섹슈얼 스펙트럼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사자들에게 “연애·성적 대상이 아닌 파트너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51.3%가 파트너를 원한다고 답했다. 15.5%는 그룹을, 6.6%는 복수의 파트너를 원한다고 답했다. 파트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1.7%였다. (출처: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검증팀 블로그)

 

그런 사쿠코에게 사토루는 “어떤 섹슈얼리티라 하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 ‘혼자는 외로워’라는 마음은 ‘제멋대로’인 생각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자신도 답을 알지 못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그 감정에 솔직해도 된다고. 그렇게 공통의 감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연애 감정 없는 (임시)가족”으로서의 실험에 나서기로 한다.

 

낯선 두 사람이, 연애 감정도 없이, ‘선언’만으로 가족이 되는 게 정말 가능한 것일까?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들의 가족-되기는 당연히 쉽게 굴러가지 않는다. 서로에게 낯선 두 사람의 갑작스런 동거는 생각만큼 ‘외로움 해소’에 도움이 안 되기도 하고, 애인도 아닌 이성과 살고 있다는 것으로 인한 오해와 편견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애인인 척하고 참석한 가족 모임은 결국 엉망진창의 결과를 낳는다.

 

이런 삐걱거림은 사실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사쿠코와 사토루의 관계를 연애와 결혼의 관계로, 그렇게 ‘평범한 행복, 평범한 가정’을 추구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주변인들이 문제다. 두 사람은 거기에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고, 비밀을 만들거나 벽을 세울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 속에선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다. 혼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행히 두 사람은 그런 걸림돌에도 “(임시)가족”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쿠코의 전 남친이자 현 직장동료인 카즈가 “(임시)가족”에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여전히 사쿠코에게 연애의 감정을 품고 있는 카즈의 등장은 ‘막장 스토리’로 전개될 위험 요소로 보이지만,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이들의 불균형한 관계를 조금씩 조율해 나간다. 사쿠코와 사토루, 카즈는 그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연애, 결혼, 출산만이 가족을 만드는 요건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

 

▲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사쿠코와 사토루.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앉진 않는다.

 

사랑 이야기가 없으면 안되나요?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을 기획, 연출한 오시다 유우타는 ‘연애를 담지 않으면 드라마가 되지 않는건가?’라는 생각에서 이 드라마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처음 NHK에 입사하고 드라마를 만들었을 때, ‘카구라’라는 일본 전통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는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는데,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니까, 역시 연애 요소가 빠지면 안 되겠죠?’라는 주변의 말들로 인해 연애 이야기를 넣은 후 찝찝함을 갖게 됐다. ‘그냥 동아리 활동에 집중하는 이야기로 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라는 후회가 남았다. 이후로도 드라마를 만들 때마다 ‘안티-연애 드라마는 드라마가 되지 못하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작가로부터 ‘리스로맨틱’(타인에게 로맨틱 끌림이 있긴 하지만, 그 상대와 연애 관계로 맺어지길 원하지 않거나 상대가 반응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에이로맨틱 스펙트럼 중 하나)이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조사하다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이라는 말을 만났다. ‘연애는 좋은 것, 당연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오시다 감독은 ‘연애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은 건가?’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드라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극본을 쓸 작가로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에서 ‘연애하지 않지만 행복한 캐릭터’를 등장시켰던 요시다 에리카를 섭외했다.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당사자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고증 팀도 섭외했다. 고증 팀은 당사자와 연구자, 활동가 중심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들의 활동은 단지 한두 번 인터뷰를 응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시네마 카페와의 온라인 토크 이벤트에 참가한 고증 팀의 나카무라 켄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취재에 응했고 이후 대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의견을 내는 등 활동을 했다고 한다.

 

오시다 연출에 따르면, 이들은 기획부터 드라마 방영까지 거의 2년 동안 의견을 주고 받았다. 드라마 방영 중에도 검증 팀은 드라마 홈페이지에 ‘검증 팀의 블로그’를 매회 방영이 끝난 후 올리기도 했다. 매회 드라마에 담긴 이야기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적고, 이 이야기가 실제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당사자들의 삶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 연구 자료 등도 덧붙였다.

 

▲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3화 시작 시, “드라마 안에 성적 접촉의 묘사가 있으니 유의해 달라”는 안내 문구가 나온다. 키스나 섹스 등의 성적 행위가 아름답거나 즐거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고증 팀과의 협력은, 이 작품을 좀 더 당사자 친화적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6화에서 사쿠코가 찾아가는 당사자 모임 장면엔 실제 당사자들이 출연하기도 했고, 모임 참여자들이 부착하고 있는 명찰 표기 하나하나까지도 고증 팀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검증 팀의 블로그’ 등을 운영함으로써 이 작품을 보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다시 탐색하게 된 사람, 혹은 새롭게 발견하게 된 사람, 당사자로서의 자각이 아니더라도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을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세부적인 정보도 제공했다. 하나의 드라마가 꽤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사례로서도 의미가 깊다.

 

드라마 제목인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원제에서 사랑은 愛(あい, 아이)가 아니라 恋(こい, 코이)다. 恋는 여러 형태의 사랑 중에서도 연애 관계의 사랑을 의미한다. 사쿠코와 사토루는 연애로서의 사랑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사랑’ 없이 새로운 관계인 “(임시)가족”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 또한 놓치지 않았다.

 

“평범한 행복이라는 게 뭐야? 평범한 가정이 뭐야?”라고 묻던 사쿠코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본다. ‘평범한’이라는 말에 가려진 행복 또는 가족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행복과 내가 만들고 싶은 가족이 무엇인지도 함께 그려본다.

 

※ 참고 자료

-시네마카페 온라인 이벤트 토크 영상 https://youtu.be/Hcbo2hGZXXk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홈페이지 및 스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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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9 2022/11/22 [14:59] 수정 | 삭제
  • “드라마 안에 성적 접촉의 묘사가 있으니 유의해 달라”는 안내 문구가 인상적이네요. 인생사에서 우리가 겪는 감정과 관계는 다양한데 재현되는 건 바이섹슈얼에 한정되어 있다는 게 따분하긴 해요.
  • nick 2022/11/12 [22:51] 수정 | 삭제
  • 오.. 이런 드라마가 나오다니. 꼭 봐야겠다. ㅎㅎ
  • 리버 2022/11/09 [15:40] 수정 | 삭제
  • 성애화하지 않음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사회가 더 이상한 사회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좋겠어요~
  • ㅇㅇ 2022/11/08 [21:43] 수정 | 삭제
  • 글만 봐도 재밌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이런 말이 있는 거 자체를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조금 알 거 같고, 더 제대로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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